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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인간이 되기 위한 인문

쉬운 글을 선호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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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kijet.egloos.com/4116278

언어는 권력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폭력이 되려 한다.

정희진의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를 여러 번 곱씹어 읽었다. 결론은 “쉬운 글은 없다. 소용 있는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이 있을 뿐이다.” 왜 쉬운 글을 선호하는 사회는 위험한가? 칼럼의 제목은 순화해서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이다. 다시 결론을 한 번 더 말하자면 “쉬운 글은 두렵다.”

“쉬운 글이 좋은 글일 수 없다”는 도발적인 결론에 적극 공감한다. 하지만 “좋은 글은 가독성이 뛰어난 글이다.” 즉 잘 읽히는 글이다. 우리는 쉽게 글을 써야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 좋은 글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는 ‘세상’에 익숙하다.

“쉬운 글은 실제로 쉬워서가 아니라 익숙하기에 쉽게 느껴”진다. 쉬운 글은 익숙한 논리와 상투적 표현으로 쓰여 아무 노동(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글이다. 다른 하나는 “진정 쉬운 글은 내용과 주장이 있으면서도 문장이 좋아서 읽기 편한 글”이다.

정희진은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낸 《페미니즘의 도전》의 저자이다.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 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알게 되는 것은, 무지 때문에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 쉬운 글은 아니나 ‘소용 있는 글이다.’ 페미니즘에 관한 책이지만 인간에 관해서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소수자이며,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을 말하는 책이라고 ‘여성’만을 말하지 않는다. 저자는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또한 “소수자(여성, 장애인, 동성애자……)라는 사회적 위치와 삶의 경험은, 주류의 시각에서 보면 열등함의 근원이고 극복되어야 할 장애이다. 그러나 반대로 억압받는 자의 시각에서 기존 사회를 보면, 이들의 타자성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과 지성을 가능하게 하는 자원이 된다.”

폭력은 원래 이유가 없다. 권력 행동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폭력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 사랑과 폭력은 원래 같은 의미지만, 특히 상대방의 상태와는 무관하다는 점에서 더욱 비슷하다. 사랑이나 폭력은 모두 자기 확신 행위이지 상대방의 매력이나 잘못과는 무관하다.

“폭력의 반대말은 비폭력이 아니라 권력이다.”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과 맥을 같이 한다. 권력은 “같은 이야기인데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대접”받게한다. “어떤 이의 생각은 ‘독창적’이라고 평가받고, 어떤 사람의 생각은 ‘편협하다’고 비판받는다.” 나의 글은 어떠한가? “쉬운 글은 내용이 쉬워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여서 쉬운 것”이다. 다시 나의 글을 돌아보자.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지음/교양인


덧붙임_
저작권에는 자유롭지 않지만, 내용의 밑줄과 다시 읽어보기 위해 정희진의 글을 옮겨 적는다.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 _정희진

설 연휴에 문자로 “새해 복 많이…”라는 인사를 받고 복 받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각종 업체, 정치인, 사회단체가 집단 발송한 이 편지들의 운명은, 삭제. 그리고 이 노동에 동반되는 감정은 불쾌감이다(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지?). 소통되지 못하는 언어는 소음이다. 이런 상황에서 글자는 쓰레기(스팸)로 전락한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 등장하는 만주어는 중국에서도 동북부 오지의 노인 10여명만이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다(경향신문 인터넷판 2011년 9월6일자) . 어떤 언어는 ‘풍성’하지만 의사 전달에 도움이 안되고 어떤 언어는 극소수가 사용해 사라질 운명이지만 소중하다.

글쓰기가 생계수단이라고 말하기 민망하지만, 위 사례들은 내 직업병과 관련이 있다. 나는 여성이지만 소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유를 설명할 지면은 없고 결론만 말하자면, 소수자는 ‘아니지만’ 생각과 언어는 최대한 ‘중심’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필사적으로 주변성을 지향한다. 소수자의 관점은 사회적 자원이다. ‘주류’와 다른 시각은 상상력과 창의력의 원천이 된다. 이는 역설적으로 자본과 국가경쟁력이 절실히 찾는 것이기도 하다.

좋은 글은 가독성이 뛰어난 글이다. 그러나 ‘쉽게 읽힌다’는 말은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내 생각에 쉬운 글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익숙한 논리와 상투적 표현으로 쓰여져 아무 노동(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글이다. 익숙함은 사고를 고정시킨다. 쉬운 글은 실제로 쉬워서가 아니라 익숙하기 때문에 쉽게 느껴지는 것이다. 진부한 주장, 논리로 위장한 통념, 지당하신 말씀, 제목만 봐도 읽을 마음이 사라지는 글이 대표적이다.

또 하나, 진정 쉬운 글은 내용(콘텐츠)과 주장(정치학)이 있으면서도 문장이 좋아서 읽기 편한 글을 말한다. 하지만 새로운 내용과 기존 형식이 일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그런 글은 매우 드물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이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쉬운 글은 없다. 소용 있는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이 있을 뿐이다.

어려운 글은 내용이 어렵다기보다는 소통 방식에 문제가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어려운 글은 없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글, 개념어의 남발로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아무도 모르게 쓴 글, 즉 잘 쓰지 못한 글이 있을 뿐이다.

모든 사회적 관계는 언어에서 시작한다. 아래 사례를 보자. 맘대로 해고를 ‘노동시장 유연성’이라고 한다. 제주는 육지의 시각에서 보면 ‘변방’이지만, 태평양에서 보면 대한민국의 ‘관문’이다. 해남 주민들은 해남을 ‘땅끝 마을’이 아니라 땅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말한다. 장보기 같은 가사노동은 노동인가, 소비인가? 서구인이 말하는 지리상의 발견은 발견‘당한’ 현지인에겐 대량학살이었다. 강자의 언설은 보편성으로 인식되지만 약자의 주장은 ‘불평불만’으로 간주된다. 언어의 세계에 중립은 없다.

내가 생각하는 평화로운 사회는 ‘만주어’가 소멸되지 않는, 다양한 시각의 언어가 검열없이 들리는 세상이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의 언어는 드러나기가 쉽지 않아 생소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폭력으로 가정이 깨져서 문제가 아니라 웬만한 폭력으로도 가정이 안 깨지는 게 더 큰 문제가 아닐까요?” 이렇게 반문하면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기존의 사고방식과 다르기 때문에 어렵게 들리는 것이다.

나는 주식이나 자동차 분야를 잘 모른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글을 읽을 때 무지한 내가 문제지 ‘어렵게’ 쓴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 여성(학)의 글일 경우 사람들은 모르면서도 무턱대고 비난하거나 거리낌 없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쓰라”고 요구한다. 이는 품성이나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관계의 단면을 보여준다. 같은 이야기인데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대접을 받는다. 어떤 이의 생각은 ‘독창적’이라고 평가받고, 어떤 사람의 생각은 ‘편협하다’고 비판받는다.

‘근친강간(가족 내 성폭력)’이라고 써서 원고를 보내면 편집자가 오타인 줄 알고 ‘근친상간’으로 바꾸어, 나도 모르게 활자화되는 경우를 수없이 겪었다. 내가 장애인의 ‘상대어’를 비장애인이라고 쓰면 ‘정상인’이나 ‘일반인’으로 고친 후, “이 표현이 더 자연스럽다”고 오히려 나를 설득한다. 성 판매 여성 혹은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가리켜 불가피하게 ‘창녀’라고 표현할 때가 있는데, 작은따옴표를 삭제해 버린다. 사소한 문제 같지만 섹슈얼리티에 대해 논의할 기회 자체를 차단하는 행위다. 여성과 성에 대한 기존의 의미가 고수되는 것이다.

쉬운 글을 선호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쉬운 글은 내용이 쉬워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여서 쉬운 것이다. 쉬운 글은 지구를 망가뜨리고(종이 낭비), 약자의 목소리를 억압하며, 새로운 사유의 등장을 가로막아 사이비 지식을 양산한다. 쉬운 글이 두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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