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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술 사주는 읽고쓰기

우선 쓰기에 대한 인식부터 바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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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는 대체로 쓰기라고 하면, 시험을 보기 위한 글쓰기나 훌륭한 문장가가 되기 위한 글쓰기를 연상하는 경향이 있다. 쓰기가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며, 누구나 쓸 수 있다는 생각보다는 잘 쓰고 바르게 써야 한다는 의무감을 더 갖게 되었다.
이것이 문제이다. 시험뿐만 아니라 글을 써야 할 상황은 매우 다양하며 글의 유형도 다양하다. 다양한 유형의 글을 무시한 채 글쓰기에 공식이 있다고 믿게 된다면, 그 자체가 우리의 쓰기 욕구를 억압하는 메커니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거창하게 시나 소설이라는 특정 문학 장르를 고집하지 말자. 이 점에서 최근 문학 교육은 '창작과 감상'이라는 말 대신에 '생산과 수용'이라는 용어를 즐겨 쓴다. 그만한 이유는 있다. 창작이나 감상은 왠지 전문가의 몫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생산과 수용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거창하게 소설을 창작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삶과 관련된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자. 쓰기가 훨씬 수월해 질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매일같이 이야기를 경험하고 만들어가고 있으니까.

시험 준비를 위한 쓰기도 마찬가지다. 시험 준비를 위한 쓰기를 배운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의 삶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쓰기를 하자. 어느 한 분야, 어떤 특정한 목적만을 고집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쓰기에 젖어들도록 해보자.



이 모든 것은 교과서에 있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글씨를 쓰는 연습을 하고, 받아쓰는 연습을 한다. 그 자체가 쓰기 공부의 시작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문장을 바르게 쓰고, 문단을 구성하며, 글을 조직하는 연습을 해 왔다. 다만 그러한 과정이 교과서 학습의 한 부분일 뿐, 일상의 삶에 배어들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 못한 탓에 글을 쓰는 일을 특별한 일로 간주하는 풍토가 생겨났다. 논술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별도의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자. 단지 글쓰기에 꼭 필요한 지식을 알고, 쓰기에 필요한 기술과 능력을 갖출 수 있으면 된다. 이 모든 것들도 또한 교육 과정과 교과서에 들어 있다.


덧_
허재영의 <나는 국어의 정석이다> 참조
재미(?)있는 책이다. 오래전 (그래 봐야 작년이다) 통독을 하고 옆에 두고 가끔 펼쳐보는데 그때마다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인다. 책에 있는 글을 약간 수정하고 순서를 바꿔 글쓰기에 대해 정리했다.
글쓰기에 대한 부담감을 떨치는 것이 우선이다. 나 먼저. 이미 우리는 충분히 배워왔고 본능적으로 글쓰기에 재능을 타고났다. 다만 그걸 모르고 있을 뿐이다.
 

덧_둘
조동일의 <세 가지 글쓰기>는 논술 광풍과는 달리 한때 유행하던 문학적 글쓰기의 폐단에 관해 서술한 글이다.




나는 국어의 정석이다
허재영 지음/행성B잎새



어떻게 쓸 것인가

연애편지적 글쓰기 : 당신도 글을 잘 쓸 수 있다
쓰는 동안 당신은 행복하고 특별합니다
어떻게 읽고 어떻게 쓸 것인가
음란서생에서 배우는 글쓰기 : 진맛을 가진 글쓰기
'목적'에 맞는 글쓰기 : 돈이 되는 글쓰기
문제는 창조적 사고다 : 허병두의 즐거운 글쓰기 교실 2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될 수 없다. : 인디라이터
헤밍웨이가 말하는 "최고의 글쓰기 룰" : 문장은 짧고 힘차게
감전 시켜라 : 워딩파워 세미나를 보고
무조건 써라 : 당신의 책을 가져라
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이유 하나를 만들어라 : 내 인생의 첫 책쓰기
글쟁이는 분석가적 자질이 필요하다 : 비즈니스 글쓰기의 기술
따로 또 같이 - 영화와 글쓰기 : 영화관에서 글쓰기
다시 문제는 상상력이다 : 20대, 컨셉력에 목숨 걸어라
작가는 아무나 하나. 우리는 아무나가 아니다 : 작가사냥
글쓰기란 나무에 꽃이 피는 이치와 같다
노신이 말하는 글을 쓰는 이유
매력있는 포스트 제목을 작성하는 10가지 법칙
기사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
좋은 문장을 쓰는 방법
재미있는 이야기를 충족하기 위한 다섯 가지 요건
인용도 실력이다
약장수가 약을 팔려면 먼저 사람을 모아야 한다 : 당신도 글을 잘 쓸 수 있다
당신의 인생에 집필을 더하라
글쓰기 욕구는 본능이다 : 나는 국어의 정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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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글쓰기

오랫동안 글쓰기를 문학창작이라 하고, 문학창작의 방향을 잘못 잡아 많은 폐단을 자아냈다. 문학하는 것은 말을 잘 다루는 별난 활동이라 하고, 그런 소질이 있는 사람을 가려내려고 했다. 내용은 없고 수식만 있는 미문을 쓰라고 했다. 이태준의 <문장강화文章講話>같은 그릇된 교본이 유행해서, 이치는 따지지 않고 감각을 추구하는 일본풍의 미문을 쓰도록 유도한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국어공부의 바른길이 아니다. 그 때문에 글쓰기가 망쳐지고, 문학창작도 그릇되었다.

문학창작과는 다른 논술을 글쓰기의 새로운 방안으로 삼은 것은 잘한 일이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증거를 대면서 이치를 따지고, 주장을 펴는 글을 쓰는 것이 마땅하다. 논술을 대학입시의 과목으로 택하고, 그 비중을 높인 것은 크게 환영할 만 하다. 그렇지만 지금 유행하고 있는 논술은 논리의 형식을 갖추는 술수를 터득하게 한다.

문법에 맞게 쓴다고 좋은 글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논리만 갖춘다고 논술을 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문법을 가르칠 때 특별한 내용이 없는 문장을 예증으로 들 듯이, 논리학 교육을 위해 동원되는 자료는 타당성이 공인된 진술이다. 그런 문장으로 그런 진술을 하면 죽은 글을 쓸 따름이다. 타당성을 스스로 입증하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주장을, 문법과 논리의 규칙을 휘어잡아 활용하면서 풀어내야 참다운 글을 쓸 수 있다.

논술문을 잘 쓰는 요령을 지도하고 익히는 동안에 창의력이 없어진다. 그저 모범문형을 외게 한다. 강의시간에 대학입시에서 논술이 채택된 것이 잘된 것이라고 하자 한 학생이 “선생님 몰라도 한참 모르십니다. 논술은 외는 것입니다.”고 말했다. 논술을 출제하고, 지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출제 방법을 바꾸느라 수고를 많이 하지만, 교수란 사람들 자신이 창의적인 글을 써서 자기주장을 펴지 않으면서 남들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

창의적인 사고력을 기른다고 표방하는 논술이, 남들이 하는 말을 따라가는 수입학문을 지속시키는 것에 기여한다. 신문 논설 수준의 글을 쓰게 해서 사고 수준을 낮추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 진리라고 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지금의 논술을 그대로 두어서는 글쓰기 때문에 글쓰기를 망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어,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창의적 사고는 자기 나름대로 체험하고, 상상하고, 주장하는 바가 있어야 가능하다. 지금까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을 자기 나름대로 말해야 살아있는 글을 쓸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길을 여는 글을 스스로 써서 모범을 보이는 교사가 학생들과 함께 쓴 글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토론하고 수정하는 훈련을 함께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안이다.

이제 문학창작과 논술문 쓰기에서 각기 보이는 두 가지 잘못을 다 넘어서는 길을 찾아야 한다. 창작이 논리이고, 논리가 창작이 되게 해야 한다. 스스로 체험해서 절실하게 깨달은 바를 글로 나타내서 신선한 충격을 주면서 생각을 바꾸어 놓아야 한다. 주관과 객관의 만남을 통해서 그 둘이 하나가 되는 결과를 제시해야하고, 철학 글쓰기와 문학 창작을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철학은 철학 존재의의에 관한 공연한 옹호론을, 개념규정을 연속시키면서 전개하는데 머무르고, 문학 창작은 사소한 관심사에 대한 피상적인 관찰을 특징으로 하는 잘못을 시정해야 마땅하다.

글쓰기의 방향을 바로잡기 위해서 지난 시기 명문의 유산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文章講話>의 저자는 문학사의 전개에 대해서 모르는 탓에 한문으로 쓴 글은 상투적인 표현의 본보기라고 매도했다. 오늘날 논술 출제와 지도에서 최고 역량을 보인다고 자부한 한국철학회의 석학들은 우리글의 전통을 되돌아볼 필요가 없다고 여길 만큼 유식해 유럽의 언어로 쓴 명문을 번안하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여겨진다. 그런 잘못을 시정하고, 우리가 물려 받은 글쓰기의 잠재적인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고전명문을 찾아보자.

이규보의 〈問造物〉, 김시습의 〈南炎浮洲志〉. 박지원의 〈虎叱〉같은 것들은 독자에게 계속 새로운 도전을 하는 명문의 좋은 본보기이다. 그런 글은 일반 독자는 물론이고 뜻하는 바를 다 알고 평가했다고 하는 연구자들도 우롱하고 있다. 논리와 체험, 사유와 형상, 주장과 호소가 하나가 되어 있다. 문학작품이면서 철학 논문이다. 그러면서 그 둘의 관습에서 모두 벗어난 자유로운 창조물이다. 우리 선조들이 그런 글을 많이 써서 방대한 유산을 남기는 것이 무엇보다도 자랑스럽다. 그런 글을 다시 쓰고 더 잘 써서, 세계의 학문과 문학을 새로운 차원으로 올려놓는데 힘쓰자.

우리 선인들의 글은 우리가 물려받은 글쓰기 능력을 확인하고, ‘쓰면서 읽기’를 위한 소재가 되는 두 가지 의의가 있어 우선적으로 돌아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근본이 다져지면, ‘쓰면서 읽기’를 위해서 필요한 본보기와 반론의 대상은 밖에서도 널리 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러 문명권의 고전을 찾아 읽으면서, 고전을 다시 창조하는 방안을 연구하는데 써야 한다. 내가 지금 세계문학사에 관한 광범위한 탐구를 하는 작업이 그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름을 날리는 글이라 해서 모두 명문인 것은 아니다. ‘빠지면서 읽기’는 거부하고 ‘따지면서 읽기’에 머물지 못하도록 하고, ‘쓰면서 읽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글이라야 명문이다. 이 글 또한 ‘쓰면서 읽기’를 하지 않을 수 없기를 바란다. 독자가 격분해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하기라도 했으면 하고, 그럴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을 갖춘다.

- 조동일, <이 땅에서 학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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