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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술 사주는 읽고쓰기

글쓰기란 나무에 꽃이 피는 이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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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란 나무에 꽃이 피는 이치와 같다 - 다산 정약용

사람이 글을 쓰는 행위는 나무에 꽃이 피는 이치와 같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가장 먼저 뿌리를 북돋우고 줄기를 바로잡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이어 진액이 오르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면 꽃을 피울 수 있게 된다. 나무는 애써 가꾸지 않고서 갑작스레 꽃을 얻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나무의 뿌리를 북돋아 주듯 진실한 마음으로 온갖 정성을 쏟고, 줄기를 바로 잡듯 부지런히 실천하며 수행하고, 진액이 오르듯 독서에 힘쓰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듯 널리 보고 들으며 두루 돌아다녀야 한다. 그렇게 해서 깨달은 것을 헤아려 표현한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글이요,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 훌륭한 문장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장은 성급하게 마음먹는다고 해서 갑자기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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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읽고 적어 놓은 다산의 글이다. 원전이 무엇인지 어디서 본 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검색하니 그 글의 원전은 "다산시문집-양덕사람 변지의에게 주는 말"이다.

글쓰기에 대한 다른 글이 있어 옮겨 적는다. 원출처는 소창동사람들(소설창작동우회)에서 펴내는 소설동네 2009년 문집이다.

소설 쓰고, 소설 읽는 사람들에게만 국한 글은 아니다. 지금 2011년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가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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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최한기와 채제공의 '글쓰기' 생각 - 조중의 (20층 북카페)

 "글쓰기 혹은 문장이란 무엇인가?"

 다산 정약용과 혜강 최한기와 번암 채제공이 말하는 글쓰기의 기본을 접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소설공부를 하는 사람들조차도 글쓰기의 기본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송충이처럼 스멀스멀 등골을 올라온다.

첫째, 다산 정약용을 보자.

그는 '문장이란 결코 밖에서 구할 수 없고, 마음 깊은 곳에 쌓아둔 지식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다산이 지닌 문장에 대한 해석은 들여다 보면 가슴이 뜨끔해진다. 낯이 붉어진다. 다산의 문장에 대한 준엄함과 치열함에 기가 죽는다. 그래서 부끄럽다.

다산은 글쓰기의 요체를 '마음속에 가득 쌓인 지식이 가만있지 못하고 터져 나오게 되는 것'에서 찾았다. 마음 밖으로 터져 나올 만큼 안이 꽉 차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세상을 향한 분노든, 사랑이든, 열정이든, 무엇이든지 풍선처럼 곧 터져 버릴 만큼 꽉 차 올라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득 차올라 폭발한 만큼 팽팽해져 있는가? 터지기는 커녕 홀쭉하게 꺼진 풍선 신세는 아닌가? 그런데도 거들먹거리며 글을 쓴다고 말하지는 않는가? 절실하지 않으면 쓰지 않아야 옳다. 절실해지도록 고뇌하고 공부하고 생각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산은 가득 차 터질만해졌을 때 글로 써 밖으로 드러내면, 거대한 바닷물이 소용돌이치고, 눈부신 태양이 찬연하게 빛나는 듯하다고 했다. 또한 이런 글이야 말로 가깝게는 사람들이 감동하고, 멀게는 하늘과 땅이 움직이며 귀신이 탄복한다고 말했다.

다산의 말처럼 독자가 감동하는 것은 물론 하늘과 땅이 움직이고 귀신이 탄복할 정도의 글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산은 이것을 가리켜 '문장'이라고 했다. (다산시문집 오학론 3편)

이렇듯 '문장'이란 결코 밖에서 구할 수 없다. 문장은 마음 깊은 곳에 쌓아둔 지식 혹은 열정,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는 1800년대 초기 이 땅을 치열하게 살다간 다산의 말에 동감한다. 한편으로는 부끄러워 반성한다.

둘째, 혜강 최한기를 보자.

그는 글을 기운과 연결지어 설명했다. 그 결과 '글은 글쓴이의 얼굴'이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혜강은 평범한 말 속에도 기운이 일어서고, 꺽이고, 구부러지는 변화에 따라 말을 하다 보면, 여러 번 들어도 매번 새롭다고 했다. 또한 평범한 행동 속에도 기운이 이렇게 저렇게 변하는 양상에 따르다 보면 자주 보아도 즐거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르기를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은 기운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 말이라고 했다. 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보잘것 없는 행동은 대게 기운이 변화하는 양상을 몸소 경험하여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듯 기운을 거슬러 말하면 비루하고 천박한 말이 되고, 기운을 거슬러 행동하면 패악한 언행이 된다고 했다. 무서운 직관이다.

그러면서 기운과 글쓰기를 대비시켰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지은 책 가운데 눈을 뜨게 하고 마음을 밝혀주는 구절은, 결국 이 기운이 빛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운이란 신명이 아니겠는가? 일어서고 꺾이고 구부러지는 변화가 글 속에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글을 읽는 이들의 마음을 넓혀주고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문장은 이 기운의 활동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이와같은 문장, 그러니까 기운이 살아서 신명나는 문장은 진실로 얻어 읽어보기가 어렵다고까지 했다. 케케묵은 내용을 모으거나 화려한 문장을 늘어세워 모방하는 일은 문장의 기술에 관한 학습일 뿐, 기운의 변화를 따르는 일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글을 보면 지은 사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인정-말과 글로 기운을 보고 안다)
 
셋째 번암 채제공을 보자.

그는 '사람과 글은 하나'라고 했다.

세상 사람들은 문장이 옛날 같지 못하다고 우려한다면서, 그러면서도 사람이 옛날 같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번암은 '글이란 다름 아닌 사람의 말'이라고 했다. 그는 말이란 마음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사람이 옛날 같지 않은데 어떻게 마음에서 나와 말로 드러나는 글만 옛날보다 더 뛰어날 수 있겠느냐고 한탄했다.

문장을 공부하는 사람이 스스로 인성과 품격이 다른 사람만 못하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며, 마음을 표현한 글에 진실로 충실한다면, 자신의 글이 불후의 명작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참으로 글 쓰는 사람의 당당한 자세다. 불후의 명작이 되지 않을 수 있더라도 마음을 표현한 글에 진심으로 충실하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다는 논리다.

맹자는 '그 사람의 시를 외우고, 글을 읽고 나서도 그 사람을 알지 못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이것으로 본다면 사람과 글이란 하나며, 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번암집 -국포집에 붙여)

그러나 현실의 문학판은 사람 다르고 글 다르니, 번암 채제공의 호통이 들릴 듯 하다.

다시 다산, 정약용을 보자.

그는 '글을 쓰는 것은 나무에 꽃이 피는 것과 같다'고 했다.

다산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 보았다.

"변지의가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를 찾아 왔다. 내가 그 뜻을 물었더니, 문장공부를 하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때마침 이날 우리 아이들이 나무를 심었기에 그 나무를 가리켜 비유하면서 이렇게 말해 주었다.

사람이 글을 쓰는 것은 나무에 꽃이 피는 거와 같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가장 먼저 뿌리를 북돋우고 줄기를 바로잡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러고 나서 진액이 오르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 꽃을 피울 수 있게 된다. 나무를 애써 가꾸지 않고서 갑자기 꽃을 얻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나무의 뿌리를 북돋아주듯이 진실한 마음으로 온갖 정성을 쏟고, 줄기를 바로잡듯 부지런히 실천하며 수양하고, 진액이 오르듯 독서에 힘 쓰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듯 널리 보고 들으며 두루 돌아다녀야 한다. 그렇게 해서 깨달은 것을 헤아려 표현한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글이요 사람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 훌륭한 문장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문장이라 할 수 있다. 문장은 성급하게 마음먹는다고 해서 갑자기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다산시문집-양덕사람 변지의에게 주는 말)

다산과 혜강과 번암은 조선후기를 살다간 선인들이다. 200여 년 전 이 강산을 거닐며 호흡했던 이들의 글쓰기에 대한 정신이 이럴진대, 2009년을 숨 쉬는 우리는 더 진보적이어야하고 깨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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