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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이하《삼국지연의》)의 저자로 여겨지는 나관중은 《삼국지평화》를 비롯한 민중속에서 자라나 전해 내려오는 방대한 삼국지 설화를 수집하고 《정사 삼국지》같은 전통적인 역사 자료와 대조하여 지나치게 황당무계한 요소를 빼버리고 문장을 다듬어 정리하고 집대성했다.
그렇다면 나관중은 《삼국지연의》의 저자인가? 알 수 없다. 그저 그렇다고 알려졌을 뿐이다. 먼저 나관중이란 인물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실존했던 인물인지 저작자들의 대표적인 필명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나관중이 생존한 인물이었다면 여러 자료로 미루어보아 불우한(아니면 가난한) 지식인(?사대부)일 거로 추측할 수 있다. 지체 놓은 유복한 지식인이라면 당시 민중 예술에 관심을 둘 리가 없고, 어느 정도의 지식이 없다면 전통적인 역사 자료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나관중 또는 그 조상에 해당하는 인물은 산서 태원에서 동평을 거쳐 항주로 이주했다. 그들은 당시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주한 북객의 전형적인 유형이었다. 더욱이 사람이 이동하는 경로는 동시에 물건이 이동하는 경로이고, 그에 따라서 예능 · 연극 등의 문화가 전파하는 경로이기도 했다. 원래는 북방의 것인 《삼국지》 이야기도 많은 다른 이야기와 함께 이 경로를 통해 남방으로 흘러가서 거기서 새롭게 전개되어 형성되었다. 《삼국지연의》도 이렇게 성립했다고 볼 수 있다.
잡극이나 소설 작자도 떠돌이 지식인 가운데 하나였다. 잡극 작자 가운데 하급 관리나 의사 · 상인 · 점쟁이 · 배우가 있는 것도 그 직업들이 서로 친연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당시 이러한 지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각각 독자적인 길드 조직이 있었던 것 같다. 잡극이나 소설 작자의 길드는 서회書會라 하고, 그 구성원은 서회 선생 또는 재인才人이라고 불렸다.
나관중이 서회의 일원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호해산인湖海散人이라는 그의 호는 떠돌이 문인에 딱 어울린다. 호해란 강호江湖와 같이 원래는 세속을 떠나 피해 숨어 사는 지역을 의미했다. 한마디로 세속의 여러 가지 속박이 없는 자유로운 세상을 상징한다. 시인 육구몽陸龜蒙은 자신을 강호산인이라 칭하고 "산인散人이란 자는 산탄散誕의 사람이다. 마음을 흩고, 뜻을 흩고, 형체를 흩고, 정신을 흩는다. 얽매이거나 제약받지 않고 시대의 괴민怪民이 되었다"고 말하여, 비세속적 자유인임을 밝혔다.
그런데 송나라 이후에 와서 강호 또는 호해는 예능인 · 무술가 · 직공 등이 떠돌아다녀야 할 대상으로서의 사회를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출세出世(세속을 나가다)에서 입세入世(세속으로 들어가다)로의 전환이야말로 중국 근세 지식인상을 특징짓는 최대 사건이다. 《삼국지연의》의 편자 <호해산인>은 그렇게 탄생했다.
나관중의 이름을 사칭하였던 진짜 편찬자는 명나라 때 출판업자에게 고용된 직업 문사가 분명하다. 그들은 말하자면 원나라 때 서희 선생의 후예였다. 그들에게 나관중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그 직업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이었다. 《삼국지연의》 형성 단계에서 이미 나관중이라는 이름이 이용되었다고 가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원나라 말에서 명나라에 걸쳐 나관중으로 대표되는 떠돌이 직업 문사 집단 속에서 《삼국지연의》를 비롯한 몇몇 소설이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나관중이 전해오는 수많은 이야기와 정사를 합쳐 《삼국지연의》의 골격을 만들고 그 골격에 따라 여러 정리자의 노력으로 바뀌어 오늘날의 《삼국지연의》가 탄생하였다. 즉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집대성 한 이후에도 시대적, 공간적 여건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가 더해지고 삭제되어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다. 이는 나관중이 정리하여 골격을 만든 《삼국지연의》 또한 오랜 세월 거쳐 서서히 형성된 것이지, 결코 특정한 개인(나관중)에 의해서 창작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관중은 저자라기보다는 수많은 정리자의 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옳다.
당시의 경향에 따라 역사를 소설 형식으로 표현하는 연의를 많이 지었다. 특히, 그의 작품인 《삼국지연의》는 오랜 세월을 두고 세계 각국에서 널리 읽히고 있지만, 현재는 <삼국지연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전까지 민간의 구전으로 전하던 삼국시대의 이야기를 《삼국지통속연의》란 책으로 정리했다고 한다. 또한 《수호전》의 편저에도 관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관중 개인의 삶은 그리 좋은 생을 살지 못하였다. 나관중과 주서는 먼 친척 사이로서 명나라가 건국되자 같이 과거를 응시했으나 주서는 급제했지만, 나관중은 탈락했다. 나관중은 계속 과거에 응시했으나 끝내 탈락했다. 결국, 나관중은 과거를 포기하고 부친을 따라 산시(山西)성 태원(太原)에서 소금장사를 했으나 장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차집을 자주 드나들며 그곳에서 <삼국희곡(三國戲曲)>을 즐겨 들었다. 당시의 <삼국희곡>에서는 촉나라의 유비를 정통으로 내세웠으며 주유의 공로 역시 모두 제갈량에게 넘겨졌다. 나관중은 이를 토대로 삼국지연의를 기술하였으며 정사와는 다르게 독자연구를 반복하여 삼국지연의를 기술하였다.
또한, 나관중은 계속 원나라 말기의 혼란기의 반란군 지도자 장사성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 내려오며,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의 묘사는 주원장과 진우량의 전투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이 밖에 《수당지전》《잔당 오대지 연의》《송 태조 용호 풍운회》《평요전》 등의 희곡과 통속 소설이 전한다.
그렇다면 나관중은 《삼국지연의》의 저자인가? 알 수 없다. 그저 그렇다고 알려졌을 뿐이다. 먼저 나관중이란 인물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실존했던 인물인지 저작자들의 대표적인 필명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나관중이 생존한 인물이었다면 여러 자료로 미루어보아 불우한(아니면 가난한) 지식인(?사대부)일 거로 추측할 수 있다. 지체 놓은 유복한 지식인이라면 당시 민중 예술에 관심을 둘 리가 없고, 어느 정도의 지식이 없다면 전통적인 역사 자료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나관중 또는 그 조상에 해당하는 인물은 산서 태원에서 동평을 거쳐 항주로 이주했다. 그들은 당시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주한 북객의 전형적인 유형이었다. 더욱이 사람이 이동하는 경로는 동시에 물건이 이동하는 경로이고, 그에 따라서 예능 · 연극 등의 문화가 전파하는 경로이기도 했다. 원래는 북방의 것인 《삼국지》 이야기도 많은 다른 이야기와 함께 이 경로를 통해 남방으로 흘러가서 거기서 새롭게 전개되어 형성되었다. 《삼국지연의》도 이렇게 성립했다고 볼 수 있다.
잡극이나 소설 작자도 떠돌이 지식인 가운데 하나였다. 잡극 작자 가운데 하급 관리나 의사 · 상인 · 점쟁이 · 배우가 있는 것도 그 직업들이 서로 친연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당시 이러한 지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각각 독자적인 길드 조직이 있었던 것 같다. 잡극이나 소설 작자의 길드는 서회書會라 하고, 그 구성원은 서회 선생 또는 재인才人이라고 불렸다.
나관중이 서회의 일원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호해산인湖海散人이라는 그의 호는 떠돌이 문인에 딱 어울린다. 호해란 강호江湖와 같이 원래는 세속을 떠나 피해 숨어 사는 지역을 의미했다. 한마디로 세속의 여러 가지 속박이 없는 자유로운 세상을 상징한다. 시인 육구몽陸龜蒙은 자신을 강호산인이라 칭하고 "산인散人이란 자는 산탄散誕의 사람이다. 마음을 흩고, 뜻을 흩고, 형체를 흩고, 정신을 흩는다. 얽매이거나 제약받지 않고 시대의 괴민怪民이 되었다"고 말하여, 비세속적 자유인임을 밝혔다.
그런데 송나라 이후에 와서 강호 또는 호해는 예능인 · 무술가 · 직공 등이 떠돌아다녀야 할 대상으로서의 사회를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출세出世(세속을 나가다)에서 입세入世(세속으로 들어가다)로의 전환이야말로 중국 근세 지식인상을 특징짓는 최대 사건이다. 《삼국지연의》의 편자 <호해산인>은 그렇게 탄생했다.
나관중의 이름을 사칭하였던 진짜 편찬자는 명나라 때 출판업자에게 고용된 직업 문사가 분명하다. 그들은 말하자면 원나라 때 서희 선생의 후예였다. 그들에게 나관중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그 직업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이었다. 《삼국지연의》 형성 단계에서 이미 나관중이라는 이름이 이용되었다고 가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원나라 말에서 명나라에 걸쳐 나관중으로 대표되는 떠돌이 직업 문사 집단 속에서 《삼국지연의》를 비롯한 몇몇 소설이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나관중이 전해오는 수많은 이야기와 정사를 합쳐 《삼국지연의》의 골격을 만들고 그 골격에 따라 여러 정리자의 노력으로 바뀌어 오늘날의 《삼국지연의》가 탄생하였다. 즉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집대성 한 이후에도 시대적, 공간적 여건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가 더해지고 삭제되어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다. 이는 나관중이 정리하여 골격을 만든 《삼국지연의》 또한 오랜 세월 거쳐 서서히 형성된 것이지, 결코 특정한 개인(나관중)에 의해서 창작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관중은 저자라기보다는 수많은 정리자의 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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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羅貫中, 1330년? ~ 1400년)은 《삼국지연의》를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중국 원말 명초의 인물로, 관중(貫中)은 자(字)이며 이름은 본(本)이다. 호는 호해산인(湖海散人). 산서성 에서 태어났다.당시의 경향에 따라 역사를 소설 형식으로 표현하는 연의를 많이 지었다. 특히, 그의 작품인 《삼국지연의》는 오랜 세월을 두고 세계 각국에서 널리 읽히고 있지만, 현재는 <삼국지연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전까지 민간의 구전으로 전하던 삼국시대의 이야기를 《삼국지통속연의》란 책으로 정리했다고 한다. 또한 《수호전》의 편저에도 관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관중 개인의 삶은 그리 좋은 생을 살지 못하였다. 나관중과 주서는 먼 친척 사이로서 명나라가 건국되자 같이 과거를 응시했으나 주서는 급제했지만, 나관중은 탈락했다. 나관중은 계속 과거에 응시했으나 끝내 탈락했다. 결국, 나관중은 과거를 포기하고 부친을 따라 산시(山西)성 태원(太原)에서 소금장사를 했으나 장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차집을 자주 드나들며 그곳에서 <삼국희곡(三國戲曲)>을 즐겨 들었다. 당시의 <삼국희곡>에서는 촉나라의 유비를 정통으로 내세웠으며 주유의 공로 역시 모두 제갈량에게 넘겨졌다. 나관중은 이를 토대로 삼국지연의를 기술하였으며 정사와는 다르게 독자연구를 반복하여 삼국지연의를 기술하였다.
또한, 나관중은 계속 원나라 말기의 혼란기의 반란군 지도자 장사성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 내려오며,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의 묘사는 주원장과 진우량의 전투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이 밖에 《수당지전》《잔당 오대지 연의》《송 태조 용호 풍운회》《평요전》 등의 희곡과 통속 소설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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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원말(元末) 명초(明初)의 뛰어난 통속문학가. 이름은 본(本, 일설에는 관貫), 호는 호해산인(湖海散人)이며, 관중은 자(字)이다. 출생지에 관해서는 샨시성(山西省) 타이위엔(太原) 출신이라는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 설이 있고,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 없다. 대표작은 진수(陳壽)의 《삼국지》를 바탕으로 민간의 삼국 설화와 원대(元代)의 삼국희(三國戱) 등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삼국에 관한 이야기를 한꺼번에 엮어펴낸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가 있다. 그밖에 나관중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소설로는 《수당양조지전(隋唐兩朝之傳)》 《잔당오대지전(殘唐五代之傳)》《평요전(平妖傳)》《수호전(水滸傳)》 등이 있고, 희곡으로는 <풍운회(風雲會)> <연환간(連環諫)> <비호자(蜚號子)> 등이 있지만 실제로 그가 지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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