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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향기로운 시와 소설

사랑과 배리(背理) - 기독교적 비극성(基督教的 悲劇性) : 이문열 《사람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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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사람의 아들》 초판본에 실린 곽광수의 해설이다. 40년 이란 시간이 거슬러 보면 지금의 문체와 많은 차이가 난다. 중편소설에 해설을 덧붙여 출간했다. 소설보다 해설이 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지금은 개작하여 장편이지만 이 해설은 중편에 대한 해설이다. 이문열이 장편으로 개작한 이유이기도 한 점을 말히도 한다.

해설의 제목이기도 한 '背理'를 알아야 이 글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배리(背理)
도리에 어긋나는 일. 사리에 어긋남.

부주의에서 생기는 추리의 착오. 반리(反理). 역리(逆理).

 

《사람의 아들》 - 주책(이週의 冊)

 

 

사람의 아들 - 주책(이週의 冊)

《사람의 아들》 - 주책(이週의 冊) 1979년 오늘의 작가상 3회 수상작. 1979년 발표 당시에는 중편소설이었으나 1987년 장편으로 개작하였으며, 이후 1993년과 2004년(은경축(銀慶祝)판) 그리고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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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배리(背理) - 기독교적 비극성(基督教的 悲劇性)
李文烈의 「사람의 아들」

—郭光秀

금세기 前半의 구라파 문학을 살펴볼 때에 거기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사실의 하나는, 기독교 문학의 본격적인 부활과 비중이다. 이것은 주로 가톨릭 작가들의 활동으로 나타난 사실인데 전통적으로 가톨릭교의 지반이 강한 프랑스의 경우 우리는 금방 프랑좌 모리아크와 죠르쥬 베르나노스, 쥘리에 그린을 기억할 수 있고, 영국 작가인 그레이엄 그린과 독일 작가인 슈테판 안드레스도 떠오른다.

이와같은 기독교 문학의 부활은 물론 시대의 정신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금세기 전반의 구라파의 정신적 상황은 어느 實存哲學者가 말한 ‘삶의 비극적 감성’이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구라파인들은 스페인 내란과 兩次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前世紀 末이 그들에게 물려주었던 地上樂園의 꿈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목격한다. 그 지상낙원의 꿈은 데카르트 이래 連綿히 이어져 내려온 합리주의 思想이 전세기 말에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태어나게 한 科學萬能主義가 가꾸어 놓은 것이었다. 이와같은 사태의 추이는, 칸트가 믿었던 인간 행동의 至高한 統御原理로서의 이성의 破産과, 프로이트와 융에 의해 이루어진 深層心理의 발견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들이 버린 후,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면서는 것이다. 그들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주리라고 기대되었던 합리주의의 神話가 사라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합리주의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는 게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일체의 삶의 據點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그 이전에이미, 그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지탱하고 있었던 신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인간의 삶과 세계를 설명할 일체의 절대적인 원리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이끌어 오는 한 중요한 결과는, 인간의 행동에 指標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지만, 그 대신 그 의미를 가능케 했던 삶의 원리에서 이끌어지는 행동의 規範에서도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인간의 상황을 체계적으로 묘사하려고 한 실존철학에서는 그것을 인간의 삶의 無償性이라든가 인간의 근원적인 자유라고 표현한다.

佛文學史的으로 볼 때, 이와같은 인간의 근원적인 자유의 발견은 20년대의 지드세대에서 30년대의 말르로 세대로 넘어가면서 이루어진다. 엄격한 淸敎徒 집안에서 자라난 지드가 머리 속에 그리고 그리워한 자유는 당연히 관능적이고 自足的인 것이었다. 지드는 아직 자기가 애써 획득한 자유가 베풀어주는 즐거움 밖에 몰랐고, 그것이 그 이면에 숨기고 있는 삶의 허공을 몰랐다. 어쨌든 자유의 획득의 공적은지드에게 돌아간다.그런데 지드가 획득한 자유를 물려받은 말로 세대는 규범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힘드는 노력을 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자유의 즐거움도 맛보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에게 자유가 이미 무상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러나 그것은 전통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이 허물어진 폐허 가운데서, 삶의 허공 가운데서였다. 이러한 상황의 논리적인 귀결은 당연히 행동일 수 밖에 없다. 행동은 人間條件으로서 주어져 있는 무상성을 채우면서 동시에, 그 무상성과 표리를 이루는 자유를 행사하는 유일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말로는 동양으로 떠나고, 셍 텍쥐페리는 비행기를 탄다….

우리는 말로와 생텍쥐페리가 묘사한 비극적인 행동의 세계를 알고 있다. 그것이 비극이라는 것은 거기에서 전개되는 이 때문이 아니라, 그 참담성에도 불구하고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삶에는 의미가 없으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어떤 의미를 찾아 나서야 하는데, 그 앞길을 밝혀줄 아무런 불빛도 없는 암흑의 迷宮 속에서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맹목적으로 나아가야 할 때름이다…. 위에서 말한 ‘삶의 비극적 감성’이란 바로 이와같이 인간이 그를 도와줄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하고 암흑 가운데 버려진 채로 스스로의 삶을 엮어 가야한다는 사실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드의 관능적이고 즐거운 자유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있음을 알수 있다. 말르로 세대가 발견하고 사르트르 세대가 실존철학의 체계 가운데 묘사한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자유는 즐거운 것이기는 커녕 삶의 무상성을 업고 있는 우리를 아무런 무장 없이 대뜸 무질서한 삶 가운데 내던지는 그런 것이다.

바로 이와같은 금세기 전반의 비극적인 세계관, 인간관에 희한하게 맞아떨어진것이 신의 침묵과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는 비극적인 기독교 사상이다. 인간의 비극적인 자유라는 것을 두고 볼 때, 비기독교 문학에서 발견되는 지드 세대와 말로 세대 사이의 주이는, 기독교 문학에서 발견되는 도리아크 세대와 베르나노스세대 사이의 추이와 같다 (모리아크와 베르나노스는 각각 지드와 말로와 같이 20년대와 90년대에 속하는 소설가이다). 지드에게서 필경 구성, 도덕성의 그림자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면, 이와 비슷하게 모리아크의중심 주제는 기독교 도덕에 의한 善惡의 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심리적 갈등에 있나. 모리아크의 주인공들은 뽑을 지향하려고 하지만, 스스로도 알 수 없이 어쩔수 없이 산에 빠져든다. 이것은 모리아크의 쟝제니스트的인 인간관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어쨌든 쟝제니스트들이 인간의 자유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모리아크의 주인공들은 선악 사이에 끼여 스스로의 자유를 행사하지 못한다. 반면 베르나노스의 주인공들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스스로의 자유를 전적으로 행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악을 행할 때에나 선을 행할 때에나 그 행위에 대한 온전한 신념을 가지고 능동적이며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피동적으로 이끌려서 행동하지 않는다. 자유는 바로 베르나노스的인 세계의 주요한 支柱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그와같은 인간의 전적인 자유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이른바 신의 침묵이라고 하는 것이다. 신은 인간들에게 올바름과 의로움을 가르쳤으며 그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한 행복을 약속했지만, 기실 그 약속은 미지의 신비 속에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이 세계에는 불의와 부정이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는다. 이 세계의 부정과 불의에 신은 號하지 않고 눈감고 있으며, 그것은 한마디로 기독교적인 삶의 질서의 不在를 뜻한나. 이와같은 신의 침묵은 달리 말하자면, 신의 가르침의 無力과 따라서 인간 행동의 지표로서의 그것의 無能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도의 삶의 상황은 바로, 신을 버린 사람들이 그들의 합리주의적세계관의 붕괴 다음에 일체의 행동의 지표를 잃고 내던져진 삶의 상황과 다른 게 아니다. 신의 침묵이 불러일으키는 신에게 대한 회의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삶의 의미와 행동의 지표를 잃어버린 것처럼 여겨졌고, 그리하여 암흑 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르나노스의 주인공들은 그가 일렬히 살아갈 따름이지, 그들의 삶의 의미를 조명해줄 天上의 빛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삶의 비극적 감성’에 침윤된 금세기 전반의 구라파의 정신적 상황이 기독교 문학의 부활을 불러왔는지 이해하게 된다. 기실 기독교는 이 세계의 무질서, 이 세계의 背理와 인간의 자유를 표리의 관계에 놓음으로써 본질적으로 실존주의적이며 비극적인 것이다.

이 세계의 배리를 설명하는 기독교 신화는 물론, 인간의 원죄가 그 주제가 되어있는 에덴 동산의 善惡果 신화이다. 그런데 이 신화에서 본질적인 점은, 신이 선악과를 집어 놓은 의도가 기실 인간을 시험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대한 전의 가장 큰 사랑을 나타내려는 데 있었다는 사실이다 —신은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 주려고 한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의 자유와 더불어 이 세계에는 악이 허용되었고 이 세계의 배리가 나타난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신의 사랑, 인간의 자유, 악(세계의 배리), 그 셋이 모두 표리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필경 같은 이야기이지만, 융과 같은 학자는 신학자 게오르크 쾨프겐과 더불어 신에 의한 악의 허용은 더 직접적으로 신의 자유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 “신은 악마를 자유롭게 자기 옆에 허용하며, 그의 왕국을 영원히 잔존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지는 이와같은 신화 구조로 하여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다. 기술 기독교 밖에서 기독교를 바라보며 그것을 단순히, 이 세계의 배리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이 꾸민 신화라고 생각해 본다면, 全知全能하고 至善한 唯一神을 중심으로 하여 언제까지고 허용되는 이 세계의 배리를 收斂할 신화를 구상한다고 할 때, 기독교 신화보다 더 설득력 있는 것을 만들기는 힘들지 모른다. 그리하여 진정한 기독교도라면, 사랑과 背理, 自由와 不義 사이의 그 비극을 적극적으로, 참되게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상은 금세기 전반에 큰 비중으로서 나타난 비극적인 기독교 문학, 한결 유행하는 말로는 기독교적 실존주의 문학에 대한 다소 긴 소개이지만, 그것은 「사람의 아들」을 이해하기 위한 예비지식이 된다. 「사람의 아들」은 작가가 ‘우리의 새로운 神을 확연하게 제시하려고’ 했다는 창작 의도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위에서 설명된 기독교의 본질적인 비극성을 표현하기에 성공한 작품이다.

이 소설이 플롯의 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오늘의 作家賞〉 수상 이유에 지적된 바이지만, 그 난점을 작가가 어쩔 수 없이 수용했다고 보는 것이 이 작품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작품의 핵심적인 부분이며 동시에 작가 李文烈을 경이의 눈으로 발견케 한것이 주인공 민요섭이 써 놓은 아하스 페르츠 일대기임은, 두 말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아하스 페르츠는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外徑으로 전해져 오는 기독교전설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靴工으로서,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는 도중에 어느 집 문앞에서 쓰러졌을 때에 바로 그 집의 주인이었다는데, 거기서 잠깐 쉬게 해달라는 예수의 청을 거절하여, 예수의 저주를 받고 예수 再臨때까지 죽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다는 악마적인 인물이다. 작가의 의도는 이 전설上의 인물을, 이 세계의 배리에 괴로와하며 그것에 눈감고 있는 신의 침묵을 고발하는, 反神的이며 의로운 감동적인 인물로 살려내려는 데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의도를 그는 엄청난 대담성으로써 성공시켰다.

작가가 이 작품의 제목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해놓은 데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는 사실이지만, 그는 아하스 페르츠를 신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아들인, — 아하스 페르츠 스스로의 말대로 그런 ‘거짓 인자(人子)’인 예수에게 온전하고 참된 ‘사람의 아들’로서 대립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의 대담성은 그 두 사람의 아들을 대립시킴에 있어서, 우선, 그 둘을 같은 날에 태어난 것으로 하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까지 전설에 나오는, 골고다로의 도상에서의 그 둘의 만남을 포함하여 일곱번이나 그 둘을 정면으로 대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그의 대담성은 단순히 그 둘을 대결시켰다는 것뿐만 아니다. 그 대결들이 신약 성경의 잘 알려져 있는 몇 장면에서 이루어지며 또 그 중 두번은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사탄이나 악귀와의 예수의 만남을 바로 아하스 페르츠와의 만남으로 해놓았다는 것에서도, 그 점에서 더욱, 나타난다.

첫째번 대결은 광야에서 사십일간 금식기도를 한 예수와 그때에 그를 시험하러 온 사탄의 만남이 바로 그것으로 되어 있다. 둘째번 대결은, 가파르나움에서 예수가 복음서 저자들에 의하면 두번째의 기적을 행하여 귀신들린 자를 고치는데 그 귀신들린 자와 예수의 만남이 그것으로 되어 있다. 세번째 대결은 끝난 뒤 쉬고 있는 예수를 아하스 페르츠가 찾아가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네째번 대결은 예수가 간음한 여자를 두고 죄없는 자만이 돌로 치라는 말을 한 후 모두가 흩어진 다음 아하스 페르츠가 그를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다섯번째 대결은 최후의 만찬 후 예수가 올리브산에서 홀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에 아하스 페르츠가 그를 찾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여섯번째 대결은 바로 골고다로의 도상에서의 만남이고, 마지막으로 일곱번째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내 신이여, 내 신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비통한 외침과 더불어 숨을 거두기 전에 아하스 페르츠가 그 십자가 앞에서 그를 만나는 것으로 해놓았다. 

그 대결 장면들을 이루고 있는 극적 대화의 긴장은 이 작품의 성공적인 요소의 하나인데, 거기에서 아하스 페르츠는 ‘육신을 가진 인간의 참다운 비참’을 없애기위해 인간들에게 죄지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도록 ‘고통스러운 자유를 회수’하라고 말하고, 아니면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누려야’하므로 ‘그 무슨 이유로도 저들의 향유를 빼앗거나 금지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인간의 자유와 신의 사랑보다는 인간의 비참을 만드는 세계의 배리와 신의 침묵을 더욱 두드러지게보는 이와같은 아하스 페르츠의 모습이야말로, 서양 문학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이래 카뮈에게 이르기까지 여러 反神的인 작가들의 의로운 인물들을 한 동아리로 묶게 하는 것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그보다 더 성공적인 요소는 아하스 페르츠의 일대기를 지배하고 있는 신화적인 서술 분위기이다. 기실 그것이 없었다면, 두 사람의 아들이 주고 받는 思辨的인 대화는 삭막함을 면치 못했을 것이고, 신에게 대한 아하스 페르츠의 詩難이 그 비장성을 지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일대기의 서술 문체는 구도적 열정과, 말씀의 허무맹랑함에 대한 의분, 그리고 신에게 대한 은밀하고 경멸에찬 아이러니를 동시에 함축하기에 성공하고 있다. 민요섭을 따르는 조동은 그의 이 글을 그들의 새로운 종교, — ‘인간의 이성과 지혜를 신뢰하는 신’을 섬기는 그들의 새로운 종교의 경전으로 만들 생각을 하는데, 과연 이 글의 신화적인 서술분위기는 거기에 합당할 만하다. 동방박사 세사람의 무분별한 거동으로 예수의 탄생이 때이르게 알려진 것을 비아냥거리며 민요섭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것도 모르고 한결같이 그들 사람에게 은근한 감탄과 찬사를 보내고 있는 여러 복음서 저자들은 그 단순함으로 축복받으라, 그들을 찬양하다 못해 그들이 모두 동방 어떤 나라의 왕들이었다는 속설(俗說)을 지어낸 이도, 또한 늙은 그들을 방문하기 위해 먼길을 걸은 토오마 종도(從徒)며 그들의 유해를 찾기 위해 그토록 힘쓴 성(聖) 헬레나, 그것을 쾰른의 대성당으로 옮기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은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싸도. Santa Simpricitas(神聖한 단순). 

참된 사람의 아들인 아하스 페르츠가 예수에게 대립된다면, 이 아하스 페르츠의 일대기는 참되게 인간적인 종교의 경전으로서, 예수의 일대기인 기독교의 경전 — 신약 성경에 대립될 것이다. 문학적 전통이 주는 무게를 아직 많이 가지고 있지 못한 우리말을 가지고 奧義롭고 神聖스런 문체에 이 정도로 이르기에 성공한 것은 주목되어 좋을 만하다.  

민요섭의 아하스 페르츠의 일대기에 대한 이상의 모든 언급은 「사람의 아들」의 성공이 정녕 이 소설의 이 부분에 대부분 힘입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게 할 만하다. 그러므로 정작 이 소설의 주인공인 민요섭의 이야기는 심하게 말하면, 필요없이 덧붙여진 부분인 듯한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 만약 이 부분의 주된 존재 이유가 독자들의 흥미를 촉발하기 위한 탐정소설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놓는 데에만 있다면, 이 부분으로 하여 이 작품이 잃는 것이 너무 많을 것이다. 柳宗鎬 교수는 李文烈의 최근작 장편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에서 李文烈의 지금까지 나온 전체 작품 세계를 이야기하면서, 「사람의 아들」을 두고 “이 모든 소홀치 않은 문학적 미덕을 고루 받아들이면서도 일변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슬아슬한 이중구조에 적지 않은 불안감을 안 가질 수가 없다. 격자소설의 구조를 지닌 이 작품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우리들의 현장 부분에서 문체는 느슨하고 단조해지며 때로는 맥없어지기조차 한다. 추리적 요소가 독자들에게 궁금증을 일으키는 그만큼 고전 세계를 다룰 때의 의젓한 기품은 사라져 있다”고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기실 민요섭이 직접 소설 가운데 나타나는 것은 소설 전체를 통해 단 한번 밖에 없다. 민요섭의 살해 사건을 맡은 남경호 형사가 사건 현장에서 그의 시체를 검증할 때에만 그를 독자들이 목격하게 되어 있고, 그는 소설 전체를 통해 과거 속에 묻혀 숨어 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남 형사가 찾아간 知悉者들이 들려주는 그대로 알려질 뿐, 작가가 그 내용을 재구성해 주는 형식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즉 이 점 역시 민요섭의 이를테면 非實體性으로 하여 그에 관한 이야기의 無用性에 기여하는 듯하다.

그러나 지나치지 말아야 할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요섭이 너무나도 생동하는 이미지로 독자들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그가 묘사해놓은 아하스 페르츠의 이미지를 통해서인데, 아하스 페르츠의 일대기가 민요섭의 구도의 정신적인 드라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은, 형사가 민요섭의 살해사건을 수사하여 해결하는 과정의 이야기(민요성에 관한 이야기)와 그 일대기가 부분 부분으로 엇걸리는 방식으로 소설이 구성되어 있으며 그 엇걸리는 양상이 우연적으로 되어 있지 않고 남 형사가 알아낸 민요섭의 행적의 한 부분과 그것을 알아내는 과정에서 발견된 그 일대기의 한 부분이 類推의 관계에 놓이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로써 명백하다. 이러한 구성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作爲的인 냄새를 풍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하여 비실체적인 민요섭이 아하스 페르츠의 이미지에 힘입어 생동하는 이미지로 상상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 말은 그 역시 아하스페르츠의 일대기에 대한 예찬을 계속하는 것인 것 같으나, 또한 이 소설 자체의 주인공과 그가 써 놓은 글의 주인공이 하나의 같은 운명의 궤적 가운데서 일치하는 하나의 같은 인물을 표상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 그것은 신의 침묵 가운데 이 세계의 악에 괴로하면서도 사랑과 배의 드라를 살아가는 참된기독교적 의인의 모습이다.

작가의 창작 의도로 보아 그의 주된 관심이 세계의 배리만을 보고 신의 침묵만을 느끼는 아하스 페르츠에 있었으리라는 것은 위에서 말했지만, 어느 순간 그는신에게 대한 저주에 찬 반항 가운데 방황하는 아하스 페르츠의 뒷모습으로 끝나는그의 일대기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  왜냐하면 그러한 아하스 페르츠의 모습에는 비극적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이다. 비극적 아름다움의 精粹는 순수한 눈물 즉 정화된 슬픔에 있다고 하겠는데, 아하스 페르츠에게는 배리의 슬픔만 있을 뿐, 그것을 정화할 신에의 사랑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은 바로, 이 글의 첫 부분에서 말한 사랑과 배리, 자유와 불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비극성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독교적인 비극적 아름다움의 原型이 골고다에서 그리스도가 못박혀 매달린 십자가에, ― 그의 ‘내 신이여, 내 신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그 비통하나 증오없는 외침에 있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리스도가 당한 배리보다 더 큰 사랑과 배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느낀 아쉬움을 아하스 페르츠 자신에게서 해결하기에는 즉 아하스 페르츠로 하여금 사랑을 가지게 하기에는 그의 전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을 것이다. 민요섭이 태어난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즉 민요섭의 역할은 아하스페르츠가 대변하는 배리에 그것의 변증법적인 대립항인 사랑을 덧붙이면서 비극적아름다움 가운데 아하스 페르츠와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되풀이하지만, 아하스 페르츠가 작가의 창작 의도上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그만큼,  민요섭의 탄생은 암암리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이 민요섭의 사랑에 의한 回心의 추이가 소홀히 다루어진, 아니 전혀 묘사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 것인지 모른다 ― 작가는 자기의 아쉬움을 暗默裡에 채우려고만 했지, 그러므로 그것을 치밀하게 수행하지는 못한 것이다 내가 위에서 이 소설의 ‘플롯의 난점’을 작가가 어쩔 수 없이 수용했다고 보는 것이 이 작품을 더 잘 이해하는 길이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말은 또한, 민요섭의 回心으로 끝을 맺음으로써 이 작품이 사랑과 배리의 기독교적 비극성에 다다르기는 하지만 그것이 만족할 만한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P.라게르크비스트의 「바라바」에서 작가는 바로 바라바의, 배리에 기인하는 반항과 사랑사이의 심리적 변증법에 조명을 주었기 때문에 작품 전체를 감동의 덩어리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사람의 아들」의 이러한 아쉬움은 안타까울 만하다.

그러나 아하스 페르츠의 반항만으로도 이 작품은 지금의 우리들에게 커다란 감동일 수 있다. 민요섭에 관한 이야기의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존재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 즉 작가는 아하스 페르츠의 형이상학적인 고뇌를 민요섭을 통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한결 가깝게 느끼게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 고뇌는 이하스 페르츠를 싣고 있는 저 西紀元年 가까이의 전설 속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들 주위에 많이 널려 있는 ‘육신을 가진 인간의 고통과 불행’이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그러한 고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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