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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기록되진 않았지만 보스라 칭해지는 (그들은 보스이지만 결코 리더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람들에게는 참모들이 있었다. 그들이 모시던 보스들이 성공하지못한 것은 그들 자신이 유능한 참모가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참모와 2인자는 다르다.
참모가 꼭 2인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2인자를 원하는 참모라면 진정한 참모가 아니다.
또한 대부분의 참모는 자신이 보스를 선택하지만 대부분 아니 거의 2인자의 전부는 보스가 정해준다. 2인자는 자기의지와는 상관없기에 대부분 2인자로 끝나거나 그냥 2인자일뿐이다. 그 보스가 그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결코 자기를 능가하는 2인자를 원하는 보스는 없다.
참모는 자신이 보스를 선택한다.
자신이 선택하였기에 보스와 대등한 관계를 가진다. 보스가 정해준 2인자와의 커다란 차이점이다. '보스와 참모는 역할과 기능만 다른 파트너 관계'이다. 대부분의 우리가 알고있는 유능한 참모는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하여 보스를 찾고 선택한다. 그래서 '유능한 참모는 보스를 추종하지 않는다.'
또한 참모가 보스를 선택할때도 공통점들이 있다.
자기와 잘 맞고, 자기의 조언을 받아들일 수 있는 보스를 선택했다. 즉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다.
참모에게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번째,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주력하라.
두번째, 자신의 판단에 충실해야 한다.
주관과 객관은 상호 침투해야하지만, 결론적으로 주관의 객관화가 인생이다. 지더라도 결과를 흔쾌히 수용할 생각을 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주관에 충실해야 한다.
세번째, 자리를 탐해서는 안된다.
자리는 음식과 같다.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배가 커진다. 한 번 배가 커지면 계속 많이 먹어야 한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따라서 바른 자세로 천천히, 그리고 적당히 먹어야 한다. 자리나 벼슬이나 직책도 과욕은 좋지 않다.
네번째, 권력을 즐기지 말아야 한다.
무엇인가 이루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다. 중독되면 끊기 어렵다.
다섯번째,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일찍 핀 꽃은 일찍 시들기 마련이다. 물론 피어야 할 때는 피어야 한다. 일찍 시들기 두려워 일찍 피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한동안 피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낙담하거나 서두르지 말라는 것이다. 꽃은 언젠가 핀다.
첫번째,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주력하라.
두번째, 자신의 판단에 충실해야 한다.
주관과 객관은 상호 침투해야하지만, 결론적으로 주관의 객관화가 인생이다. 지더라도 결과를 흔쾌히 수용할 생각을 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주관에 충실해야 한다.
세번째, 자리를 탐해서는 안된다.
자리는 음식과 같다.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배가 커진다. 한 번 배가 커지면 계속 많이 먹어야 한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따라서 바른 자세로 천천히, 그리고 적당히 먹어야 한다. 자리나 벼슬이나 직책도 과욕은 좋지 않다.
네번째, 권력을 즐기지 말아야 한다.
무엇인가 이루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다. 중독되면 끊기 어렵다.
다섯번째,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일찍 핀 꽃은 일찍 시들기 마련이다. 물론 피어야 할 때는 피어야 한다. 일찍 시들기 두려워 일찍 피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한동안 피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낙담하거나 서두르지 말라는 것이다. 꽃은 언젠가 핀다.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 깃들고, 지혜로운 신하는 주인을 가려 섬긴다.
양금택목이서(良禽擇木而棲) 현신택주이사(賢臣擇主而事)
양금택목이서(良禽擇木而棲) 현신택주이사(賢臣擇主而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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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거론하는 참모들의 공통점은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자신이 보스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선택을 돌아보며 '조직 속의 99%는 다 참모다. 네 안에 잠자고 있는 참모 마인드를 깨우라'는 책의 내용을 곱씹어 보는 것이 저자가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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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정서를 잘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도 유능한 참모의 조건이다. 아무리 당도가 높은 설탕이라도 녹지 않으면 누구도 그 단맛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불신의 싹은 일단 트기만 하면 순식간에 아름드리 나무가 된다. 일단 싹이 트면 이미 늦다. 아예 씨앗을 뿌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우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모든 일에 대해 숨김없이 (윌슨에게) 알렸다. 사전에 알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주위의 이간을 이겨내는 방부제였다.
권력은 나눌 수 있어도 사랑은 나눌 수 없다. 대중의 사랑은 보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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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다.
최영이 아닌 이성계를 선택하다.
"그렇다면 그대의 죄목을 알겠노라. 그 힘이 부족함을 헤아리지 않고 큰 소리를 좋아하고, 그 시기의 불가함을 알지 못하고 바른 말을 좋아하며, 지금 세상에 나서 옛 사람을 사모하고, 아래에 처하여 위를 거스른것이 죄를 얻은 원인이다."
귀양을 가 있는 정도전에게 한 촌부가 한 말이다.
아마도 이 날 촌부에게 들은 교훈이 되어 훗날 자신이 쓴 <조성경국전>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을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 .... 민심을 얻으면 민은 군주에게 복종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민은 군주를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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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와 잘 맞는, 자기의 조언을 받아들일 역량이 있는 보스를 선택해서 섬기라.
메세지는 구도가 단순해야 하고, 이해가 명쾌해야 하며, 감정이 끓어오르게 해야 한다. (한명회가 수양대군의 귀에 들어가라고 권남을 채근하는 메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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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욱은 그의 나이 29살에 조조를 찾아갔다.
그는 함께할 보스를 스스로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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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자를 만든 참모들 이철희 지음/위즈덤하우스 |
덧붙임_
위즈덤하우스, 2003년 11월 초판 7쇄
덧붙임_둘
이 시대의 책사는 누구인가 : 제왕들의 책사
뛰어난 주군에게는 참모가 있다 : 조선의 킹메이커
1인자는 너무 위험하고 부담스러워… 2인자의 전성시대!
덧붙임_셋
조선왕조 창업의 숙명적 맞수 - 정도전과 하륜
[역사인물 재조명 (신동아 97. 11)]
[역사인물 재조명 (신동아 97. 11)]
- 金 九 鎭 홍익대 교수·동양사
태조 이성계를 도왔던 정도전. 태종 이방원을 도왔던 하륜. 이 두 사람은 고려시대 유학자 이색의 문하생이면서도 끝내 목숨까지 빼앗는 정적이 되었다. 이들의 출신 배경과 학문,그리고 개혁정책을 재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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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정도전(鄭道傳)은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장량(張良)을 등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한나라를 세울 때에 일등공신 장량이 유방을 만나서 항우(項羽)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고사를 인용하여, 나라를 창업할 때에는 임금이 신하를 발탁해서 쓸 수도 있으나, 신하가 오히려 임금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아서 같이 나라를 세울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정도전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세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만약 정도전이란 인물이 없었다면, 이성계는 결코 조선 왕조를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정도전은 공민왕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자기의 힘으로 쓰러져가는 고려왕조를 일으켜 세우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러나 공민왕이 돌아간 뒤에 자기의 주장을 펴다가, 도리어 실권자 이인임(李仁任) 등의 미움을 사서 9년 동안 전라도 나주와 경상도 영주·단양 등지에서 유배, 혹은 유랑생활을 했다.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초라한 초가에서 살기도 하고, 가난한 농부에게서 밥을 얻어 먹기도 하고, 손수 쟁기를 잡고 밭을 갈기도 했다.
이처럼 어려운 생활을 할 때에 아내 최씨와 정도전이 주고받은 편지가 『삼봉집(三峰集)』의 「가난(家難)」에 실려 있다. 이 편지를 보면, 당시 정도전의 생활이 얼마나 어렵고, 또 터무니 없는 구설수에 올랐는지를 알 수 있다. 아내 최씨는 이렇게 불평했다.
『당신은 평상시에 부지런히 글을 읽느라고 아침에 밥이 끓는지 저녁에 죽이 끓는지를 알지도 못하시니,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곳간이 텅 비어서 한 톨의 식량도 없었습니다. 방 안에 가득한 아이들이 춥다고 보채고 배고프다고 울었으나, 제가 끼니를 도맡아서 그때 그때 꾸려나가면서도, 오직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여 뒷날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하시면, 처자(妻子)들을 남이 우러러 보도록 만들고, 가문의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나라의 법을 어겨서 이름이 욕되고 행적이 깎이어, 몸은 남쪽 지방에 귀양가서 지독한 풍토병을 앓으시고, 형제들은 쓰러져 가문(家門)이 여지없이 망하니,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것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현인(賢人), 군자(君子)라는 것이 진실로 이러한 것입니까?』
정도전이 아내에게 답장을 쓰기를,
『당 신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나에게 친구들이 있어서 그 정의가 형제보다 나았으나, 내가 패망한 것을 보고서 그들은 뜬구름처럼 흩어져버렸습니다. 그들이 나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본래 권력으로 맺어진 것이지 은의로 맺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부부의 도리는 한번 맺어지면 일생토록 변하지 않는 것이니, 당신이 나를 원망하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이지, 미워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은데, 이러한 이치는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천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당신이 집안을 걱정하는 것과 내가 나라를 근심하는 것이 어찌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각기 자기가 맡은 직분을 다할 뿐입니다. 사 람의 성공과 실패, 이익과 손해, 영예와 치욕, 그리고 잘하고 못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지,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닌데, 그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이 편지를 보면, 당시 정도전이 얼마나 가난에 쪼들리고, 또 홀로 낙담하고 절망했던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이성계 찾아간 정도전
그러나 나이 40대가 되자, 정도전은 가만히 앉아서 현실에 절망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 나갔다. 그가 42세가 되던 1383년(우왕 9년) 가을에 정도전은 함주(함흥)에 있던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의 군영(軍營)을 찾아갔다. 말하자면 자신의 힘만으로는 개혁에 한계성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당시 왜구를 소탕하여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이성계의 힘을 빌려서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성계의 군영으로 찾아간 정도전은 이성계 군영의 지휘 체계가 엄격하고, 군사 조직이 질서정연한 것을 보고, 매우 감탄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만한 군대를 가지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하니, 이성계는 『그게 무슨 말인가?』 하고 물었다. 정도전은 짐짓 핑계대기를 『이만한 군대라면 동남방의 근심거리인 왜구를 물리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그는 군영 앞에 서 있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를 보고, 이성계에게 시를 한 수 지어서 바치겠다고 청했다. 그는 즉석에서 나무를 하얗게 깎아서 그 위에 시를 썼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滄茫歲月一株松]
몇 만겹 푸른 산 속에 자랐도다. [生長靑山幾萬重]
잘 있다가 다음해에 서로 만나 볼 수 있을는지? [好在他年相見否]
인간세상 굽어보다가 곧 큰 발자취를 남기리니[人間俯仰便陳踵]』
이 시는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여 읊은 것이다. 앞으로 때가 되면, 이성계는 천명(天命)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하며, 또 자기와 손을 잡고 큰 일을 하여 인간 세상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길 것이라고 은근히 부추기고 있다.
1383년(우왕 9년) 8월에 정도전은 「변방을 편안하게 하는 방책(安邊之策)」이라 하여 국방에 관한 문제를 이성계에게 건의했다고 하는데, 정도전이 함주의 군영을 찾아갔던 까닭은 이러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이성계에게 진언(進言)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때 이성계는 정도전이 제시한 계책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 같다. 그 이듬해인 1384년(우왕 10년) 여름에 정도전은 이성계의 막료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정도전은 이성계와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맺게 되었으며, 이 때부터 정도전은 이성계를 섬겨서 그가 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충성을 다했다.
당시 정도전은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막강한 군사의 힘이라는 보호막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모시고 큰 일을 도모할 사람으로서 이성계라는 인물을 선택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왕조의 창업을 위하여 한쪽은 지략으로써, 한쪽은 군사의 힘으로써 서로 협력했던 것이다.
풍수지리 밝았던 하륜
하륜(河倫)은 1365년(공민왕 14년) 겨우 19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했다. 그러나 1368년(공민왕 17년)에 감찰 규정(監察糾正)이 되어, 당시의 집권자 신돈(辛旽)의 문객(門客)을 규탄하다가 신돈의 미움을 받아 파직됐다. 이때 그의 외삼촌 강회백(姜淮伯)이 위로하기를, 『너는 장래에 재상이 될 만한 인물이니, 결코 시골에 묻혀서 살지는 않을 것이다』고 했다.
그가 42세가 되던 1388년(우왕 14년)에 최영(崔塋)이 철령위(鐵嶺衛) 문제로 군사를 일으켜 명(明)나라 요동(遼東)을 정벌하려고 했다. 하륜은 이를 반대하다가 양주(襄州)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에 의한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이 성공하자 그는 곧 귀양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우왕(禑王)이 폐위되고 그의 아들 창왕(昌王)이 옹립된 직후인 1388년(창왕 1년) 여흥(여주)에 유폐되었던 우왕은 김저(金佇) 일파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암살하려고 계획했다. 이 사건이 발각되자 하륜은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권근(權近) 등과 같이 우왕을 지지하는 유학자 일파로 간주되어 또 유배를 당했다.
이처럼 하륜은 고려 말엽의 유학자로서 이색 정몽주(鄭夢周) 정도전 등과 함께 친명파(親明派)에 속했으나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 일파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가 46세가 되던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었는데 이때부터 정도전이 권력을 잡고 전성기를 누렸으나 하륜은 언제나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서 지방의 관찰사와 부사 같은 한직에 머물렀다. 그는 조선왕조를 세우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정도전 남은(南誾) 등의 개국공신파에게 견제당하여, 중앙정계에서 자기의 역량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현실의 어려움을 타파하기 위하여 하륜은 풍수지리학을 통해서 여러번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하륜은 이색의 문생(門生)으로서 정도전과 함께 정통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으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과 관상학(觀相學) 등의 잡설(雜說)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불교와 도참설(圖讖說)을 배척하고 정통 유학의 이론만을 고집하던 정도전과 다른 점이었다. 당시 정통 유학자들은 이러한 잡설을 배격했다. 그러나 하륜은 이러한 잡설에까지 정통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사상은 고루한 유학자와는 달리 현실성과 다양성을 지녔다고 할 수도 있다.
1393년(태조 2년) 3월에 나라에서 계룡산(鷄龍山)으로 천도(遷都)하려고 하자, 하륜은 계룡산의 형세를 비운(悲運)이 닥쳐올 흉한 땅이라고 주장하여 천도 계획을 중지시켰다. 이리하여 하륜은 풍수학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로 인정을 받아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하륜은 다시 한양(漢陽)의 무악(毋岳)이 지리설에 맞는 길지(吉地)라고 추천하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했으나, 실권자 정도전과 조준(趙浚) 등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무악(毋岳)은 지금 서울의 신촌 일대를 말한다. 하륜은 끝까지 무악이 가장 좋은 명당이라고 주장했으나,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려 인종(仁宗) 때에 묘청(妙淸)이 서경(西京, 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다가 김부식(金富軾) 등 유학자들의 반대로 좌절된 것과 같았다. 중 묘청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으나 당시의 하륜은 그러한 힘도 없었다. 아마 이러한 좌절이 그로 하여금 정안대군(靖安大君) 이방원(李芳遠)에게 접근하게 만들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방원 만남 간청한 하륜
하륜과 이방원의 만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하륜은 사람의 관상을 잘 보았기 때문에, 처음에 이방원을 보고서 장차 크게 될 인물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방원의 장인 민제(閔霽)를 만나서 간청하기를 『내가 사람의 관상을 많이 보았으나 공의 둘째 사위만한 인물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한번 그를 만나보기를 원합니다』고 했다. 민제는 사위 이방원에게 권유하기를
『하륜이라는 사람이 대군을 꼭 한번 뵙고자 하니, 한번 그를 만나보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이리하여 이방원과 하륜의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하륜이 이방원을 만나보기 위해서 꾸며낸 계략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당시 여러 왕자 가운데 가장 야망이 크고, 머리가 뛰어났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도전과 하륜은 이렇듯 출세의 기회를 포착하는 데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또 두 사람에게는 남들보다 뛰어난 아이디어도 있었다.
만약 하륜의 지모(智謀)가 없었더라면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륜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지휘한 인물이다.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정도전과 남은 일당을 불의에 습격하여 죽이고, 세자 이방번과 이방석을 제거했다. 또 제2차 왕자의 난에서도 박포(朴苞) 일당을 죽이고,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부자를 유배시켰다. 이방원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준비 작업이 그의 손에 의하여 추진되었던 것이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속설(俗說)에도 하륜은 살꽂이(箭串) 다리에서 태종 이방원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제1, 2차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 가서 머물던 태조 이성계가 무학(無學) 대사 등의 간곡한 건의에 따라 서울로 돌아오던 날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살꽂이 다리까지 마중을 나가서 부왕을 맞이했다. 이때 하륜이 태종에게 건의하기를 『태상왕(太上王, 태조 이성계)의 노기가 아직 풀리지 아니했을 터이니, 막사 차일(遮日, 천막)의 중간 지주(支柱)를 아주 굵은 나무로 만들도록 하소서』라고 했다.
태종 이방원은 하륜의 말대로 아름드리 큰 나무로 차일 지주를 세웠다. 태조 이성계가 아들 태종을 보자마자 노기충천하여 활을 잡고 마중 나오는 아들을 향하여 화살을 쏘았다. 태종은 황급히 차일의 지주 뒤로 몸을 피하여 그 위기를 넘기고, 날아온 화살은 차일의 지주에 꽂혔다. 이것을 본 태조는 크게 웃으면서 『모두가 하늘의 뜻이다』 하고 단념했다. 지금 남아 있는「살꽂이」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정몽주와 절친했던 정도전
고려 말에 태어난 정몽주(1337∼1392년) 정도전(1342∼1398년) 하륜(1347∼1416년) 세 사람의 출생연도를 보면 나이가 각기 5년씩 차이가 난다.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에 정도전보다 5년 선배였던 정몽주는 정도전을 항상 동생처럼 이끌어 주고, 성리학의 심오한 세계를 깨우쳐 주었다.
하륜도 이색의 문생(門生)이었는데, 정몽주와는 10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으므로정몽주를 무척 어려워 했다. 하륜은 원래 정도전과는 친숙하지 않았던 것 같고 오히려 권근(1352∼1409년)과 가까이 지냈는데, 하륜은 권근보다 나이가 다섯살 위였다. 정몽주가 1392년에 비명에 죽고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정도전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되었으며,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도전이 비명 횡사하자 하륜의 전성시대가 오게 되었다.
정도전은 자가 종지(宗之)이고 본관이 경상도 봉화(奉化)인데, 아버지 정운경(鄭云敬)과 어머니 우씨(禹氏)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연도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나, 태조 5년(1396년)에 그의 나이 55세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출생연도는 1342년이 틀림없다. 당시 본가는 영주(榮州)에 있었지만 그는 외가가 있던 단양(丹陽) 삼봉(三峰)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서 그의 호가 삼봉이 됐으며, 그의 유저로서 『삼봉집(三峰集)』이 남아 있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은 고려 말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3품의 형부상서·밀직제학(密直提學) 등의 벼슬을 지냈다. 정운경은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과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유명한 유학자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서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그 문하의 젊은 유학자들과 교우할 수가 있었다.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머리가 명석했다고 한다.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이숭인(李崇仁) 이존오(李存吾)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박의중(朴宜中) 윤소종(尹紹宗) 등과 친구가 되어 쉬지 않고 유학을 공부하여 높은 학식을 쌓아나갔다. 당시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의 위치를 보면 경학에서는 정몽주 권근 등과 비길 만큼 심오한 경지에 도달했으며, 문장에서는 이숭인 등과 앞뒤를 다툴 만큼 내용이 호방하고 글이 유려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문장이 제일이라고 추켜올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숭인과의 경쟁 의식이 조선왕조가 건국된 뒤에 그를 참혹하게 죽이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1362년(공민왕 11년) 10월, 약관 2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1363년(공민왕 12년)에 충주사록(忠州司錄)에 임명되고, 1364년(공민왕 13년)에 전교주부(典校主簿)에 제수되고, 1365년(공민왕 14년)에 통례문(通禮門) 지후(祗侯)에 전보되었다.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1366년(공민왕 15년)에 부친상과 모친상을 연달아 당하여 고향 영주에 내려가서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부모의 무덤을 지켰다.
그후 그의 나이 29세가 되던 1370년(공민왕 19년) 여름에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에 임명되어 비로소 마음에 맞는 벼슬을 얻게 되었다. 그때 이색이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겸임하고, 김구용 정몽주 박상충(朴尙衷) 박의중 이숭인 등이 교관(敎官)을 맡았는데, 이들이 정도전을 추천하여 박사에 선임되었다고 한다. 정도전은 매일 명륜당(明倫堂)에 나가 앉아서 유생(儒生)들에게 경서를 강의하고 토론하여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리학의 심오한 원리를 스스로 깨닫게 했다. 이때부터 고려의 성리학이 비로소 크게 발전하게 됐다고 한다.
정도전과 정몽주의 절친한 교우관계를 나타내는 일화가 하나 있다.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맹자(孟子)』 한권을 선물로 주었는데, 정도전은 매일 그 『맹자』를 한장씩, 혹은 반장씩 읽고 철저히 연구하여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평상시에 정도전은 정몽주를 존경하고 그의 학풍을 추종했다. 후일 정몽주가 죽은 후에, 정도전은 그의 유학 체계를 조선왕조에 계승시키려고 노력했으며, 가끔씩 자기만이 정몽주의 심오한 유학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 말의 혼란기에 나라와 백성을 구원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서로 의견을 달리하면서 정도전과 정몽주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정몽주는 유학의 보수파로서 정통 본류를 형성하여 고려왕조를 지키려고 애썼고, 정도전은 유학의 좌파로서 개혁을 추진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또 정도전의 혈통 문제를 시비하는 과정에 우현보(禹玄寶)와 이숭인 김진양 등과도 사이가 극도로 나빠졌다. 당시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젊은 유학자들은 대개 고려 말엽 권문세가의 자제들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그의 어머니 우씨(禹氏)가 우현보의 집안이었는데 그 혈통에 천인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을 우현보의 세 아들 우홍수(禹洪壽) 등이 세상에 퍼뜨렸다. 집안 혈통이 미천하다고 하여 정도전은 동문수학하던 젊은 유학자들로부터 멸시와 냉대를 받았다. 정도전이 새로운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사헌부의 관리들은 임명장에 서경(署經, 서명)하기를 거부하고 정도전을 괴롭혔다. 이러한 시비로 말미암아 정도전은 이색 문하의 다정했던 친구들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그 결과 고민을 거듭하던 정도전은 신흥 군벌인 이성계의 군영을 찾아가서 그의 막료로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친명(親明) 주장하다 유배 당해
고려 말에 정도전의 일관된 주장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친명정책(親明政策)을 고수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왕 창왕의 왕위계승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색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젊은 유학자들은 몽고의 원(元)나라를 배척하고 중국의 명(明)나라와 가까이 하는 공민왕(恭愍王)의 배원정책과 친명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공민왕이 죽고 난 다음 정권을 잡은 이인임 경복흥(慶復興) 등이 친원정책을 취하자 정몽주를 비롯한 젊은 신진 유학자들은 이에 반대했다. 1375년(우왕 1년)에 몽고 본토로 쫓겨간 북원(北元)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인하여 정도전은 배원정책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다가 친원파 이인임 등의 미움을 사서 전라도 나주군 회진현(會津縣)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귀양갔다. 이때 정도전의 나이 34세였다. 그는 이곳에서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는데, 소박한 농민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농촌의 비참한 생활을 체험했다. 거평의 사람들은 매일같이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정도전을 위로했고, 그가 거처할 초가를 짓는 일도 도와주었다. 정도전은 그 농민들의 온정에 감격했을 뿐만 아니라, 뜻밖에도 농민들이 유식한 데 놀랐다고 회고했다.
그가 36세 되던 1377년(우왕 3년)에 귀양지가 고향땅으로 옮겨져서 영주와 단양의 삼봉 사이를 오가면서 4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뒤에 거주지 제한이 풀려서 서울 삼각산 아래 초가를 짓고 「삼봉재(三峰齎)」라고 이름하고 제자들을 가르쳤고, 또 다시 부평의 남촌(南村)으로 거처를 옮겨 후학을 가르쳤다. 이처럼 정도전은 친명정책을 주장하다가 친원파의 미움을 사서 9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30대를 보내고 40대를 맞았다.
1388년(우왕 14년)에 위화도 회군에 성공하여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축출하고 최영 등의 친원파를 숙청하게 되자 정도전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위화도 회군에는 정도전이 직접 관여한 것 같지는 않다.
우왕을 몰아내고 창왕을 세울 때에 정도전과 윤소종은 창왕을 세우는 것을 반대하고, 왕씨 중에서 다른 사람을 골라서 왕으로 세울 것을 주장했다. 그들이 신돈의 피를 받았고, 고려 왕씨의 혈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 때에 좌군 도통사(左軍都統使)로서 이성계에게 협력한 조민수(曺敏修)가 창왕을 세울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리하여 당시 명망이 높은 대유학자 이색에게 그 의견을 물었는데, 이색은 그의 제자 정도전과 윤소종의 주장을 묵살하고 『마땅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판정했다. 목은(牧隱) 이색 같은 사람이 『우왕 창왕이 공민왕의 후손이다』라고 단정한 것을 보면 정도전과 윤소종이 『그들은 왕씨가 아니고 신씨이다』라고 주장한 것은 날조된 논리임에 틀림없다.
고려말 위기 모면한 정도전
그러나 1388년(창왕 1년) 11월에 정도전의 주장에 의하여 이성계 심덕부(沈德符) 지용기(池湧奇) 정몽주 등이 흥국사(興國寺)에 모여서 의논하기를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므로 마땅히 가짜 왕씨를 폐지하고 진짜 왕씨를 임금으로 세워야 한다』 하고 창왕을 강화도로 추방하고 공양왕(恭讓王)을 맞아들였다. 이리하여 정도전의 계획대로 고려의 왕실이 혈통문제로 말미암아 점차 권위를 잃어가고, 그대신 새로운 왕조의 창업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도전의 주장은 나중에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할 때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씨왕조 건국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우왕과 창왕을 신씨(辛氏)로 몰아붙여서 세가(世家)의 고려 제왕(諸王)에서 제외하여 열전(列傳)에 편입했던 것이다.
1392년(공양왕 4년) 3월에 이성계가 해주(海州)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중상을 입었다. 이성계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정몽주 김진양(金震陽) 등 유학자들은 『이성계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 오른팔인 조준과 정도전 등을 제거한 다음이라야 이성계 제거를 도모할 수가 있다』 하고, 대사헌 강회백(姜淮伯) 등에게 정도전 등을 처형하도록 상소하게 했다.
간관(諫官) 김진양도 공양왕에게 아뢰기를 『옛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풀을 뽑을 때에는 뿌리까지 뽑지 않으면 결국 다시 싹이 나오며, 악(惡)을 없앨 때에는 그 근본을 없애지 않으면 그 악은 더 자란다」고 했습니다. 조준과 정도전은 악의 뿌리이고, 남은과 윤소종 등은 악의 뿌리를 북돋워서 덩굴로 자라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라면서, 정도전 남은 조준 윤소종 등을 처형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공양왕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먼저 남은 등을 심문한 다음에 조준과 정도전이 관련이 있으면 그때에 가서 그들을 아울러 심문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이리하여 정도전은 위기를 모면하여 보주(예천)에 귀양가는 데에 그쳤다. 정몽주 등이 이성계 일파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다. 그 직후 정몽주는 이방원 일파에 의해 선죽교(善竹橋)에서 살해 당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1392년 7월에 정도전 남은 조준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마침내 조선왕조를 건국하게 되었다. 이때에 그의 나이가 51세였다. 정도전은 1등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서 봉화백(奉化伯)에 봉해졌다. 그는 개국공신 중 태조 이성계로부터 가장 높은 신임을 받았던 사람으로서,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도평의사사 판사(都評議使司 判事) 호조(戶曹)판사 등의 문관직과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 節制使)와 같은 무관직을 아울러 맡아서 실권을 잡았다.
조선 도읍 정한 정도전
1394년(태조 3년) 10월에 서울을 한양으로 옮길 때에 정도전은 하륜의 주장을 물리치고 도성이 들어설 자리를 오늘날 서울의 4대문 안으로 정했다. 그 다음해 10월에 새 서울 한양의 궁궐과 종묘가 완성되자, 정도전이 새로 지은 궁전과 누각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도 사용되는 경복궁(景福宮) 사정전(思政殿) 근정전(勤政殿) 등의 이름은 그 당시에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또 도성(都城)이 완성되자 동서남북의 크고 작은 성문 이름도 모두 정도전이 지었는데,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북대문은 숙청문(肅淸門)이라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도성 안 5부(部) 49방(坊)의 이름도 모두 그가 지었다. 이처럼 조선왕조 창업 당시에 크고 작은 일들은 모두 정도전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
1393년(태조 2년) 7월에 정도전은 동북면 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가 되어 동북면(함경도) 일대에 살던 토착 여진족을 조선의 편호(編戶)로 편입시켜 우리 백성으로 동화시켰으며, 1397년(태조 6년) 12월에 동북면 도선무사(東北面都宣撫使)로 나가서 동북 지방의 성보(城堡)를 수축하고 주군(州郡)의 경계를 정했다.
고려 때에는 여진족이 동북면 일대에 내려와서 농경생활을 했다. 이성계는 함주(함흥)의 대토호로서 그 세력이 동북면 일대 여러 여진족을 통솔할 만큼 막강했다. 이성계는 길주(吉州) 출신인 여진족 대토호 이지란(李之蘭, 퉁두란)과 손을 잡고 동북면 일대 여러 여진족이 조선의 판도 안에 들어오게 했다. 이리하여 조선이 건국하자 정도전을 도안무사로 보내 토착 여진족을 조선의 호적에 올리고, 그들에게 농토를 주어 농사를 짓도록 생존권을 보장해 주었으며 우리나라 백성들과 여진족의 혼인을 장려했다.
4년 뒤에 정도전은 다시 도선무사로 나가서 동북면의 주(州) 군(郡) 현(縣)의 구획을 정하고 성(城)과 보(堡)를 쌓아 함경도 일대의 땅을 우리나라의 국토로 완전히 편입하는 작업을 했다. 후일 세종시대에 김종서(金宗瑞)가 개척한 6진(鎭)의 땅은 수복하지 못한 두만강 하류 일부 지역이었던 것이다.
1396년(태조 5년)부터 1398년(태조 7년) 정도전이 죽을 때까지 중국의 명(明)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조선에서 보낸 외교 문서를 트집삼아 정도전을 중국으로 압송하라고 강요했다. 이리하여 정도전의 입지가 정부 안에서 아주 어려워졌고, 이 틈을 타서 정적들은 그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일찍이 정도전은 사신으로 명나라에 세 번이나 갔다 온 적이 있었다. 1384년(우왕 10년) 여름에 정몽주가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갈 적에 정도전은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했는데, 당시 명나라 수도였던 남경(南京)에서 명 태조를 만나 우왕의 왕위 계승을 허락받고 공민왕의 시호를 받았다.
제1차 왕자의 난
1390년(공양왕 2년) 6월에 정도전은 「정당문학」으로서 성절사가 되어 명 태조를 만나서, 윤이(尹彛)·이초(李初)가 이성계를 명나라에 고발한 사건을 변명했다. 정도전은 명 태조에게 황제의 사신을 조선에 보내 이 사실을 직접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는 위화도 회군 직후였으므로 명 태조는 요동 정벌군을 돌이킨 이성계를 두둔했고 주원장은 정도전을 위로하기를 『윤이와 이초가 그대 나라의 국사를 어지럽히려고 하는 것을 알고 짐은 처음부터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벌써 그들의 죄를 다스렸으니 그대 나라에서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했다. 이리하여 윤이 ·이초의 무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또 조선이 건국한 직후인 1392년(태조 1년) 겨울에 정도전은 하정사(賀正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명 태조를 만나 하례를 드렸다. 이처럼 명 태조는 정도전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으므로 정도전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면 1396년에 명 태조 주원장이 조선에서 보낸 외교문서를 트집잡아 그 문서를 작성한 자로 정도전을 지목하여 명나라로 압송하도록 강요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첫째는 여진족의 송환 문제 등 양국의 다섯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조선이 명나라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며, 둘째는 조선왕조의 실권자인 정도전을 강제로 압송하여 그를 볼모로 잡아두고 조선을 협박하려는 야비한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으로 오가던 외교문서는 황제에게 보내는 표문(表文)과 황태자에게 보내는 전문(箋文)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그 표전문에 명나라를 모욕하는 내용과 경박한 문투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표전문 사건」이라고 부른다.
실제 문제의 표문을 지은 사람은 정탁(鄭擢)이었고, 교정한 사람은 정총(鄭摠)과 권근이었다. 그러므로 정도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나 명나라에서는 정도전을 「화(禍)의 근원」이라고까지 몰아붙이면서 중국으로 송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처럼 명 태조의 무리한 압력을 받은 태조 이성계는 『그가 나를 어린아이로 아는가?』 하고 크게 화를 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치욕을 참다 못하여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정벌할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정도전은 진도(陣圖)를 만들어 지휘관과 각 도의 군사를 훈련시키고 지방의 성보(城堡)를 축성하고 군량미를 저축했다. 그러나 요동을 정벌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한 일이었다. 일찍이 최영의 요동 출병에 반대하여 위화도 회군을 감행한 태조 이성계가 아니었던가. 그가 다시 요동을 정벌한다는 것은 조선왕조에 반대하던 절의파(節義派)를 설득하기에는 명분이 약했다. 항상 정도전의 독주에 반감을 가졌던 조준은 『새로 창업한 나라로서 명분이 없는 군사를 가볍게 일으키는 것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라며 반대했다. 이리하여 요동을 정벌하는 계획은 일단 중지되었다.
1397년(태조 6년)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총 김약항(金若恒) 노인도(盧仁度) 세 사람이 명 태조의 노여움을 사서 명나라에서 형벌을 받고 무참하게 죽은 사건까지 일어났다. 그해 3월에 예문관 학사 권근 등이 자진해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자기가 표전문을 지은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표전문 내용을 해명하는 한편, 여러 편의 시를 지어 명 태조의 환심을 사고 중국에 문명(文名)을 크게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양국 사이에 정도전의 송환 여부는 표전문 사건을 해결하는 중대한 문제로 남게 되었다. 정도전 반대파인 이방원 일파는 표전문 사건으로 양국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하륜은 정도전을 중국으로 송환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명나라와 악화된 관계를 우호적으로 개선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이방원 일파가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거사한 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었다. 제 일차 왕자의 난은 단순히 세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라기보다 는 대명관계를 개선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혁명파의 실권자기리 벌인 세력다툼이었다.
1398년(태조 7년) 8월에 이방원 일파의 하륜과 이숙번이 동원한 군사들의 갑작스런 습격을 받고, 정도전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자기 집에서 붙잡혀 무참히 죽었다. 그때 정도전의 나이 57세였다. 그와 함께 화를 당한 사람은 남은 심효생(沈孝生) 박위(朴威)등이었고, 정도전의 두 아들도 같이 참변을 당했다.
하륜은 고려대토호 출신
하 륜은 진주(晉州)출신으로서 자가 대림(大臨)이고 호가 호정(浩亭), 시호가 문충공(文忠公)이었다. 그는 1357년(충목왕 3년)에 아버지 하윤린(河允麟)과 어머니 강씨(姜氏) 사이에 태어났다. 하윤린은 진주 하씨로서 지숙주군사(知肅州郡事), 순흥부사(順興府使)를 지냈고, 종2품의 봉익대부(奉翊大夫)에까지 올랐다. 하륜의 외가는 진주 강씨로서 진주의 토착세력이었는데 그의 외삼촌 강회백은 고려 말에 대사헌을 지냈다. 하륜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진주의 대토호(大土豪)로서 고려 때에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벼슬한 사람도 있었다.
하륜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영민하여 10세에 서당에 나가서 글을 배우고, 14세에 이미 감시(監試)에 합격하여 정식으로 진주 향교에 입학했다. 그는 진주 향교에서 수학한지 5년만인 1365년(공민왕 14년)에 갓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때 과거의 좌주(座主)는 이색과 이인복(李仁復) 두사람이었다. 과거를 볼 때에 시험관을 좌주라고 하고 과거의 응시생을 문생(門生)이라 하여 평생토록 문생은 좌주를 스승으로 섬기소 좌주는 문생을 문하생으로 돌보았다. 하륜과 이색은 이러한 관계에 있었으므로 하륜은 이색의 문생으로 이색 문하의 젊은 유학자 정몽주 박상충 김구용 이숭인 박의중 등과 교유했다. 또 자기보다 5년 아래인 권근과도 깊은 교우 관계를 맺었고, 이색과 이인복 두사람을 평생토록 스승으로 섬겼다.
하 륜의 『호정집(浩亭集)』을 보면, 『이숭인이 이색 정몽주 두 선생과 이집(李集)을 초대하여 조그만 술자리를 베풀고 그 앞에 화분에 심은 매화를 갖다 놓고 매화에 대한 시(詩)의 연구(聯句)를 지었는데, 나도 또한 그 말석에 앉아서 그분들이 지은 훌륭한 문장의 시구를 듣게 되었다. (중략) 얼마 안가서 이집이 병으로 돌아갔고 그뒤에 10여년 사이에 정몽주, 이숭인 이 연달아 세상을 떠났고, 이색 선생 또한 새상을 떠나갔으므로 나만 홀로 남게 되었다. 지금 와서 그들과 같이 교우하던 즐거운 때를 생각하면 아득하기가 마치 꿈속의 일과 같다. 아아! 이 슬픔을 어찌 이길 수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 글로 미루어 보면, 후일 발간된 이색 정몽주 이집 김구용의 유고집에 하륜이 서문을 쓸 정도로 가까이 지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색의 유학 사상은 정몽주 이숭인 등이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키다가 죽음으로써 단절된 것이 아니라, 정도전 하륜 권근 등에 의하여 조선왕조의 정통 유학으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계룡산 도읍 반대한 하륜
좌 주 이인복은 하륜의 사람됨을 보고 그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과 혼인케 해 조카 사위로 삼았다. 하륜의 처가는 성주 이씨로서 이인복의 조부는 이조년(李兆年)이었다. 이조년의 손자 중에 이인임과 같은 권신(權臣)이 나오면서 성주 이씨는 고려 말에 극성기를 맞이했다.
하룬의 나이 21세가 되던 1367년(공민왕 16년)에 처음으로 춘추관에 임명되었고, 1369년 (공민왕 18년)에 감찰 규정이 되었다. 25세가 되던 1371년 (공민왕 20년)에 지영주군사(知榮州郡事)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안렴사 김주(金湊)가 그의 치적을 제일 높이 평가하여 보고한 결과, 1372년(공민왕 21년)에 중앙에 소환되어 고공 좌랑(考功佐郞)에 임명되었다.
그뒤에 그의 나이 29세가 되던 1375년(우왕 1년)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고, 1377년(우왕 3년)에 전법 총랑(典法摠郞)이 되었다. 그의 나이 33세가 되던 1379년(우왕 5년)에 3품의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드디어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그 뒤에 36세가 되던 1382년(우왕 8년)에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1384년 (우왕 10년)에 밀직제학이 되었다.
하륜의 나이 42세가 되던 1388년(우왕 14년) 최영이 요동정벌을 단행할 때에 하륜은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양주로 쫓겨났다. 이리하여 4년동안 양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성공한 후 소환되어, 45세가 되던 1391년(공양왕 3년)에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조선 개국 후인 1393년(태조 2년)에 경기좌도 관찰사(京畿左道 觀察使)로 전임되고, 51세가 되던 1397년 (태조 6년)에 계림부사(鷄林府使)가 되고, 1398년 (태조 7년)에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로 임용되었다.
이처럼 하륜은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날 때까지 거의 중앙정계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지방 수령관으로 떠돌아다녔다.
1393 년(태조 2년) 12월에 하륜이 반대하지 않았다면 충청도 계룡산이 새로운 도읍지로 결정될 뻔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無學) 대사를 데리고 계룡산의 지세를 직접 살펴본 다음에 이곳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하고, 그 터를 닦는 공사가 이미 시작되었다. 그로나 하륜은 태조에게 상언(上言)하기를 『도읍지는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두어야 하는데 계룡산이란 땅은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어서, 동북면, 서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교통이 매우 불편할 것입니다. 또 신이 일찍이 아버지를 장사시키면서 풍수학에 대한 여러 서적들을 대강 읽어보았는데, 지금 계룡산의 지세를 본다면 산은 서북쪽으로 내려오고, 물은 동남쪽으로 흘러가니, 물이 장생(長生)하는 방향을 깨뜨리고 있으므로 앞으로 쇠퇴하여 패망할 땅이니, 도읍지를 건설할 땅으로는 결코 적당하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태조는 마음이 개운치 않아 권중화(權仲和) 정도전 등을 불러서 이것을 다시 조사해서 보고하게 했다. 그 결과 하륜의 주장대로 계룡산은 길지가 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계룡산으로 천도하려는 당초의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뒤에 조선이 서울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 적에 한양을 넓은 땅 가운데 하륜은 무악(毋岳, 신촌일대)이 길지라고 주장하여 이곳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으나, 정도전은 무악이 너무 비좁다고 반대하고, 오늘날의 서울의 4대문 안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다. 이때 하륜은 주장하기를 『한양의 무악은 지리설에도 맞는 길지이니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이 제일 좋습니다』하고 무악을 명당이라고 고집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에서 권중화 조준을 보내 그 지세를 조사하게 했는데,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한양의 무악이 비록 명당이라고 하더라도 그 땅은 좁아서 도읍을 옮길 수 업습니다』라고 반대하였다.
이방원 배경으로 중앙정계 진출
태 조 이성계는 직접 한양을 돌아보고 정도전이 주장한 땅을 새 도읍지로 정했다. 원래 이곳은 고려 숙종(肅宗)때에 남경이었는데, 고려 때에 만들어 놓은 터가 너무 좁았기 때문에 그 남쪽으로 터를 더 넓혀서 잡았던 것이다. 한양 천도를 계기로 하륜은 정도전과 한 차례 충돌했으나 여지없이 패배하였다. 하륜은 정도전 남은 일당과 대적하기 위해서 정안군 이방원을 찾아가서 그의 참모가 되었던 것 같다.
하륜은 이방원의 배경 아래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도전 일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1396년(태조 5년) 12월에 예문 춘추관 학사가 되고, 1398년(태조 7년) 9월에 정당 문학에 임명되었다. 그 사이에 박자안(朴子安) 사건에 연루돼 수원에 유배당했으나, 이방원이 구원하여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1396 년에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표전문 사건이 발생하여 양국 사이가 극도로 나빠지자,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을 명나라로 압송할지 여부를 묻기 위하여 비밀히 중긴들을 모아놓고 그 의견을 물었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말이 없었는데, 정도전 일파는 주장하기를 『정도전을 곡 보낼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때에 하륜이 홀로 주장하기를 『지금 나라가 건국 초창기를 당하여 여러 가지 제도가 아직 정비되지 못했는데 중국으로부터 이와 같은 문책을 받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니 그들의 요구에 따라서 정도전을 압송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고 양국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려면 정도전 한 사람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주장은 정도전 일파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던 이방원 일파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었다. 이방원의 입장에서 보면 양국의 비꼬인 외교관계를 한시 빨리 풀기 위해서 당사잔인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실제로는 세자 이방석의 후견인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을 명나라로 보내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도전- 남은 일파와 이방원-하륜 일파가 다시 한번 팽팽히 대립하게 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하륜에게 극도의 원한을 품게 되었다.
정도전 제거를 위한 하륜의 계획
이 처럼 나라가 곤란해지자 1396년 7월에 태조 이성계는 하륜을 계품사(啓稟使)로 임명하여 명나라로 가서 정도전이 중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입조할 수 없다고 변명하게 하였다. 계품사란 외교문제가 생겼을 때에 그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고 서로 오해를 풀도록 특별히 보내던 사신이었다. 이때에 표전문을 지은 정탁, 그리고 그것을 교정한 권근과 노인도 등을 같이 보냈는데 하륜으로 하여금 명 태조에게 전후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게 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의 반대파인 하륜을 계품사로 임명한 까닭은 무었인가? 중국은 조선의 사정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므로 하륜이 정도전의 정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므로 그가 가서 설명을 한다면 명 태조가 오해를 적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왕위에 오르는 사람은 중국의 허락을 반드시 받아야만 하였다. 이방원 일파가 중국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고 애쓴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당시 이방원 일파가 중국의 집권자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성계 일파는 중국 고나계를 원만하게 처리하지 못했던 결과 명나라의 고명(誥命, 왕위 즉위 승인장)과 옥새를 받지도 못하고 있던 차에 표전문 사건이 발생하여 최악의 관계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 하륜은 표전문 작성 경위를 해명하고 정도전의 입장을 변명하여 명태조의 양해를 얻어내고 그해 11월에 귀국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계비(繼妃) 강씨(姜氏) 소생의 제8왕자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정도전과 남은 등으로 하여금 보호하게 했다. 이에 대하여 한씨(韓氏) 소생의 여러 왕자가 불평을 품었는데, 특히 정안대군 이방원이 가장 심했다. 정도전과 알력이 심했던 하륜은 정안대군에게 먼저 군사를 일으켜서 그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느날 하륜이 이방원의 집으로 찾아가니 이방원이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세자문제를 해결할 방책을 물었다. 하륜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방법은 없고, 다만 선수를 쳐서 정도전 무리를 쳐없애는 것뿐입니다』하니 이방원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고 한다.
1398년(태조 7년) 7월에 하륜이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기에 앞서 송별연이 열렸는데 이방원도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연회석에서 여러번 술잔이 돌았는데 하륜은 술에 취한체 하면서 갑자기 술주정을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일부러 주안상을 뒤엎어 음식들이 이방원의 옷자락에 엎질러지게 하였다. 이방원이 화가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가자 하륜도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이방원의 집에 이르러 하륜은 이방원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나서 다급히 말하기를 『대군, 일이 급합니다. 장차 이 나라에서 오늘 밤 술상이 엎질러졌던 것과 같은 사건이 생길 것 입니다』하고 이방원에게 난을 일으키도록 재촉하였다.
그러자 이방원은 하륜을 안내하여 함께 밀실로 들어가서 난을 꾸미게 되었고 이것이 제 1차 왕자의 난이다. 그리고 하륜은 이방원에게 부탁하기를 『저는 왕명을 받고 곧 임지에 가야 할 몸입니다. 안산군수(安山郡守) 이숙번(李叔蕃)이 멀지 않아 정릉(貞陵)으로 이장할 때에 동원할 역군들을 거느리고 서울에 도착할 테니 그 사람을 불러서 큰일을 맡기십시오. 저는 이 길로 내려가서 진천(鎭川) 지방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일이 벌어지거든 곧 저를 불러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 직후 이방원은 거사를 준비했다. 이방원의 심복으로 군사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이숙번은 이때에 하륜이 소개했던 것이다. 그해 8월에 이숙번이 역군들을 거느리고 상경했다. 계획한대로 이숙번은 먼저 군기감(軍器監)을 점령, 무기를 탈취하여 역군들을 무장시킨 뒤 궁궐과 도성을 철통같이 포위했다. 남문(南門)밖에 지휘본부가 마련되었는데 그 중앙에는 이방원이 앉고 그 옆에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고 한다. 그날 연락을 받고 서을로 급히 돌아온 하륜이 그 자리에 앉아서 거사를 직접 지휘했다. 마침내 반란군은 정도전의 소재를 찾아내 포위했다. 담장을 넘어 옆집으로 도망치는 정도전을 잡아서 무참하게 살해했다. 이처럼 정도전, 남은 일파는 아무런 낌새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하륜 이숙번이 거느린 군사들의 습격을 받아 비명에 죽었다. 세자 이방석과 그의 형 이방번, 그리고 매형 이제(李濟)등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세자의 자리는 제 2왕자 영안대군(永安大君) 이방과(李芳果)에게 넘어갔다.
하륜의 개혁정책 추진
1400 년 (정종 2년) 1월에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하륜과 이숙번은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부자를 체포하고 박포(朴苞)일당을 소탕하였다. 하륜은 이방원의 위치가 불안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중신을 거느리고 정종에게 가서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강요했다. 정종은 어쩔 수 없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이방원을 세자로 삼았다가 그해 11월 왕위를 이방원에게 넘겨주었다. 이리하여 1401년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즉위했는데, 이 때에 하륜의 나이 55세였다.
그 이후 하륜은 태종의 가장 아끼는 신하로서 1416년(태종 16년) 11월에 70세의 나이로 공무를 수행하다가 정평(定平)에서 갑자기 병사할 때까지 태종 시대의 모든 제도를 개혁하고 기반을 다져나갔다.
하륜은 고려의 제도를 거의 모두 새로운 제도로 바꾸었다. 하륜이 보필하던 태종시대는 고려의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고 새로운 제도로 개혁한 시기였다. 이 시대야말로 조선왕조 5백년의 터전을 마련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먼 저 정치적 관제(官制)를 개혁하여 의정부(議政府)와 6조(六曹)를 만들고 6조에 사무를 분장했으며, 백관의 녹과(祿科)를 정하고 관등에 따라 관리들의 관복(冠服)을 제정하였다. 관리를 임용하는 전선법(銓選法)과 그 치적을 평가하여 승진, 또는 좌천시키는 고적 출척법(考積黜陟法)을 만들어 시행하고, 70세에 정년퇴직하는 70세 치사법(致仕法)을 만들어 스스로 실천하였다. 또 각 도 군, 현의 구획을 다시 정하고 고을 이름을 바꾸었는데 예를 들면 완주를 전주로, 계림을 경주로, 서북면을 평안도로, 동북면을 영안도(永安道)로 바꾸었다.
경제적으로 각 도의 전지를 다시 측량하여 조세와 공부(貢賦)를 상세히 정했다. 특히 종이 화폐인 저화(楮貨)를 통용시키려고 저화 통행법을 만들었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물물 교환하거나 포화(布貨: 삼베)를 사용했다. 사회적으로 여말선초에 많은 노비들이 해방되어 양인(良人) 신분을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노비에 대한 소송 사건이 상당히 많았는데,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을 두어서 그 신분을 가려내도록 하고 공사 노비의 신공(身貢)을 제정하였다. 이리하여 그 신분을 증명하는 호패(號牌)를 만들어 모든 사람에게 착용케 하고 승려들에게는 도첩(度牒)을 발급했다.
이처럼 조선조 5백년 동안의 기틀은 하륜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졌다. 태종시대 18년동안 숱하게 많은 공신들이 제거되어으나 그는 한번도 권력의 핵심에서 물러난 적이 없었다. 태종이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집안을 몰락시킬 적에 왕후의 동생 민무회(閔無悔)등을 감싸다가 같이 연루될 뻔했다. 또 오랫동안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가끔 뇌물 시비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몸가짐이 한결같이 성실하고 거짓이 없었으며, 친척에게는 어질게 대하고 친구들에게는 믿음성이 있었다. 인재를 천거할 때에는 사람의 조그만 장점이라도 반드시 취하고 작은 허물은 덮어주었다, 그러므로 대인 관계가 원만하여 오랫동안 정계에 있었으나 정적이 없었다. 도 태종도 말하기를, 『하륜이 나에게 공이 있기 때문에 가볍게 그를 버릴 수가 없다』라며 끝까지 감싸 주었다.
그는 천성이 중후하고 온화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위급한 일을 당해도 당황하는 빛이 없었다. 제 1,2차 왕자의 난을 치르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큰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특히 어려운 문제를 결단할 때에는 남이 자기를 헐뜯거나 비난한다고 하여 그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1396년부터 1398년 사이에 표전문 사건으로 정도전 일파와 다툴 때에도 정도전과 남은의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는 정도전을 압송해야 한다고 홀로 주쟝했다. 그는 소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정치가였다. 1398년부터 1416년까지 19년동안 중앙 정계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네 차례나 정승을 지냈으나 항상 다른 사람보다 앞서 훌륭한 정책을 거침없이 태종에게 제시했다. 조정에 물러 나와서도 그는 조정에서 논의된 비밀을 어느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않았다. 그는 집이나 옷이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싫어했다. 또 연회나 오락을 좋아하지 않고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라 죽자 태종은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철인(哲人)의 죽음은 나라의 불행이다. 이제부터 나라에서 큰일을 당하거나 어려운 문제를 결정할 적에 조금도 당황하는 빛이 없이 결단하여 나라를 편안한 반석 위에 둘 사람은 그대가 아니면 누가 있겠는가. 이것은 내가 몹시 애석히 여겨 마지않는 것이다.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 영구(靈柩) 앞에 치제(致祭)하니 영혼이 있다면 이 제사를 흠향하도록 하라』라고 했다.
왕권 중심과 재상 중심
정 도전과 하륜은 모두 조선왕조를 창업하는데 기여한 일등 공신들이었다.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왕조를 창업했고, 하륜은 태종 이방원을 도와서 조선왕조의 문물제도를 완성했다. 정도전과 하륜은 다같이 고려말 유명한 이색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정통 유학자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고려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고, 하륜은 피비린내나는 양차 왕자의 난을 주도하여 왕권의 안정을 가져왔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들은 우학자로서 보수파에 반대하는 개혁파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도 고려말 이색과 정몽주의 유학사상이 이 두 사람을 통하여 조선왕조로 제대로 전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도전과 하륜은 조선 개국공신 가운데에서 서로 비교해서 평가해야 그 비중을 제대로 알 수가 있다. 정도전은 조선이 건국된 이래에 태조시대 7년동안 정권을 담당했고, 하륜은 태종시대에 17년 중요한 관직을 역임하면서 태종의 개혁정치를 주도했다.
이와 같은 두 사람의 개혁정치는 그들의 사상에서 보면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심기리편(心氣理篇)』『경제문감(經濟文鑑)』『불씨잡변(佛氏雜辨)』등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민본사상에 입각해서 덕치를 베푸는 인정(仁政)을 주장했다. 민심은 천심인데 민심을 잃을 때는 혁명이 온다고 믿었다. 토지 사유를 억제하여 부자의 토지겸병을 막아서 가난한 농민을 보호하고, 부세는 1/10세를 표준으로 공정하게 부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도 전의 사상은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재상 중심제, 감찰제도 강화, 부국강병, 전제 개혁 등을 주장했다. 이처럼 그는 당시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적극적으로해결하려는 진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또 주자학의 무신론에 입각하여 불교를 철저히 배척했지만, 불교의 종교적 기능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세속화하는것을 방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고려의 역사를 최초로 정리하여 『고려사(高麗史)』를 편찮했으나 후일 몇차례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완전히 고쳐지고 말았다.
하 륜은 조준이 편찬한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수정 보완하여 『속육전(續六典)』을 완성했고 『경제육전(經濟六典)』의 내용을 충실히 보충하여 『원집상절(元集詳節)』과 『속집상절(續集祥節)』을 저술했다. 이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필요한 정치 경제 사회의 여러 가지 제도를 체계적으로 논한 것이다. 하륜은 정치적으로 최고의 통치자는 왕인 만큼 오아이 덕을 닦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재상은 시정(時政)의 잘잘못과 생민(生民)들의 이해관개를 왕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정도전의 재상 중심제와 다른 견해다. 이리하여 태종이 즉위한 직후인 1401년(태종 1년) 7월에 그는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여 민의(民意)를 상달할 수 있게 했다. 결국 정치는 민의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신문고 설치 주장
경 제적으로 그는 국가의 백년 대계를 위해서 현재는 어렵더라도 앞으로 나라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실례로 그라 적극적으로 추진한 저화(楮貨)와 운하를 들 수 있다. 1401년(태종 1년) 4월에 사섬서(司贍署)를 두고 저화라는 지폐를 만들어 사용하게 했으나 백성들은 이것을 사용하기 싫어했다. 그는 저화 통행법을 만들어 포전을 금지하고 저화를 강제로 사용하게 했다 . 그는 저화가 동전(銅錢)보다 훨씬 사용하기 편리한 화폐라 믿었다. 그러나 태종시대 이후 일반 민중은 저화를 위면하여 쓰지 않게 되었다.
또 충청도 지역에 운하를 파고 3남 지방에서 서울로 운송하는 물화를 바다로 통하지 않고 내지의 운하를 통해서 수송하려고 계획했다. 왜냐하면 물자를 운반하는 배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서 전복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1413년 (태종 13년)8월에 순제(蓴堤)에 제방을 쌓고 운하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여러 차례 현지 조사를 했으나 워낙 큰 공사여서 수만명의 인력을 동원해야 했으므로 결국 실행하지 못했다. 만약 이 운하가 만들어졌다면, 우리나라도 중국처럼 남북을 잇는 대운하가 만들어져 역사적으로 남북을 잇는 대운하가만들어져 역사적으로 남북 문화의 교류에 크게 이바지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1413년 7월에 그는 남대문 밖에서 용산강을 잇는 운하를 파자고 주장했다.
하륜은 역사에 많은 흥미를 갖고 『태조실록(太祖實錄)』『편년 삼국사(編年三國史)』『고려사(高麗史)』『동국사략(東國史略)』등을 편찬했다. 그는 단군(檀君)을 나라의 조상으로 높이고 기자(箕子)와 같이 나라에서 제사를 받들자고 주장했다. 그는 정도전이 편찬한 역사 기록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도전, 남은 일파의 치적을 깎아내리고, 이방원, 하륜 일파의 행위를 미화하고 합리화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밖에도 『사서절요(四書節要)』『동국략운(東國略韻)』『비록촬요(秘錄撮要)』등을 편찬했는데 그가 유학의 경전뿐만이 아니라 운학(韻學), 음양지리 등 다방면에 두루 정통했음을 알 수가 있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하륜은 경륜이 있는 정치가로 추앙받았으나 정도전은 나라에 반역한 역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오히려 정도전의 개혁사상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후세 사람들은 각자 그들이 처한 시대의 가치관에 따라 역사의 인물을 달리 평가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덧붙임_넷
평소 고민(이라기 보다는 궁금증에 가까운)중인 것이 있다.
삼국지중에서 누가 가장 뛰어난 책사일까? 공명일까? 여러가지를 따져 봐야겠지만 이 책에서도 말하듯이 순욱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이 책이 다시금 떠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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