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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향기로운 시와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한병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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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고 한 20년 후 (지금쯤이다) 속편이 나왔으면 어떨까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문열과 일면식도 없기에 전달할 수도 전달할 생각도 없는 술자리 안줏거리에 불과한 생각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한병태에게"는 개인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가 (발표 기준으로) 15년이 지난 시점에 한병태 또는 그의 자식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게 편지를 보냈다. 자신의 작품을 빌어 자신의 변명이나 생각을 전하고 있다. "너는 무죄한 현실의 표상이 아니라 정리되어야 할 일부가 되었다. 내가 새삼스레 네게 이런 편지를 내는 것도 바로 그런 시대가 주는 압박 때문일는지 모른다."

길지 않은 이 단문을 여러 번 읽었다. 그의 변명(이라기보다는 생각과 회한)을 옹호하거나 동조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진보와 발전을 지향하고 있다고 우기는 편에 손을 들어 주었다"는 당시 작가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이 꼭 이 땅에서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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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4월 이른바 '호원 선언'이 있던 달에 나는 아프게 너를 낳아 세상으로 내보냈다. 나를 아프게 하였던 것은 이쪽저쪽에 아울러 얽힌 내 사적인 은원恩怨의 사슬이었다.

이념과 현실, 역사주의와 허무주의 그 어느 쪽에도 확신을 갖지 못한 어설픈 지식인의 자화상이 바로 너였다. 너를 떠나보낸 뒤에도 한동안 나는 가슴깨나 졸이고 애도 많이 태웠다. 역시 이쪽저쪽 어디에도 달갑지 않은 네 성격과 행태 때문이었다.

가당찮게도 나는 그런 너의 성공을 내 세상 읽기가 온당했음을 보증하는 것으로 믿었다. 네가 지녔던 만큼의 비관과 낙관을, 가장 근접하게 세계와 인생을 이해하는 길로 여겼다. 하지만 나만의 환상이었다.

(...)

나는 네게 용서를 빌고 싶다. 그러나 반드시 그게 너를 끝까지 투사로 남겨 주지 못한 죄를 빌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여 나는 이제 갈수록 사족처럼 느껴지는 그 작품을 후회한다.

(...)

나는 세 가지 결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첫번째는 통속적인 리얼리즘의 공식을 따르는 것이었다. 성년의 엄석대도 역시 반성하고 있고, 다시 만난 너는 또 자발적인 복종에 빠져드는 걸말이었다. 다음은 성년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되기는 하지만 너는 끝내 엄석대가 번성하고 있는지 아닌지 모르게 만드는 형태였다. (나머지 한 가지는 우리가 책에서 알고 있는 "나는 엄석대에게 수갑을 잘못 채웠다"고 말한 결론이다.)

그런데 무슨 허영이었을까. 나는 권선징악이라는 낡은 투의 결말을 두려워하지 않고 엄석대에게 수갑을 채웠다. 그전까지의 나와는 어울리지 않게도 역사는 언제나 진보와 발전을 지향하고 있다고 우기는 편에 손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우리들 현실의 엄석대가 수갑을 차는 과정을 지텨보면서 나는 그때 최악의 선택을 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지금의 정치적 진행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역사의 진보라는 게 얼마나 자가당착이고 비정하며 소모작인가 하는 것뿐이다.

그 논리라는 것도 태반은 새 주인의 눈치에 충실한 지조 없는 개들의 드높은 짖어 댐일 뿐이다. 내가 엄석대에게 소갑을 채우고자 한 수갑은 결코 그런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도 작은 위로는 있다. 그래도 너희 반의 역사를 빌어 우리 역사를 대충은 맞춘 셈이니, 특히 너로 하여금 엄석대가 수갑을 차는 데 박수를 보내게 하지는 않았으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문열 외 지음/문학사상사


신들메를 고쳐매며
이문열 지음/문이당


덧붙임_
이문열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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