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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향기로운 시와 소설

《위대한 개츠비》 어느 번역본을 읽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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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려 한다. 새로 구매하여야 하는데 번역본이 너무 많아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어렵다. 몇 가지로 축약되는데 어느 것이 좋을까?

첫 번째는 문학동네의 책은 김영하 번역이라 가장 마음이 간다. 양장본과 반양장이 있다. 하단에 김영하의 역자 후기를 옮겨놓았다.

두 번째는 펭귄 클래식이다. 새로이 번역되었고 민음사나 문예출판사에 물려서 호감이 간다. 알라딘에서 1월 50% 행사하는 것도 한몫했다.

세 번째는 민음사 판이다. 구관이 명관이라 기존 민음사 다른 책과 구색을 갖추어 책장을 장식하려면 민음사가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선택하기 어렵다. 번역본을 다 읽을 생각이 없기에 한 권은 선택해 읽고 싶다.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

덧_
한 달에 한 권 정도는 고전을 읽으려 한다. 그다음으로 짜라투스트라를 읽으려 하는데 번역본이 너무 많아 선택이 더 어렵다.

덧붙임_2013.05.13
김영하가 '창조'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 (반양장)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문학동네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토니 태너 서문, 이만식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민음사



표적을 빗나간 화살들이 끝내 명중한 곳에 대하여
- 역자후기를 겸하여

1. 입이 험한 고등학생들

이 소설을 처음 잡은 것은 꽤 오래 전이었다. 그러나 끝을 내는 데는 늘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인물들이 선명하게 잡히지 않으면 앞으로 잘 나아가질 못한다. 그간에 나온 번역본 몇 종을 접했지만 똑같은 문제를 겪으면서 결국은 포기하고 펭귄 출판사에서 낸 포켓판 페이퍼백을 구했다. 피츠제럴드의 문장이 녹록하지 않아 읽는 데 애를 먹기는 했지만 번역본에서 겪은 문제는 없었다.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그것은 이전의 번역자들이 번역을 잘 못해서가 아니라, 한국말에 내재된 말의 위계 때문인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이전의 번역본들에서는 어김없이 개츠비와 닉이 존댓말을 하고, 데이지와 개츠비도 존댓말을 하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그것은 어쩌면 20세기 중반의 우리 말글살이에는 적합했을 지도 모른다. 그때에는 20대 초반의 대학생들도 서로 높임말을 쓰면서 존대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비가 선비를 대하듯 했던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로 넘어온 지금, 고작해야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일 이 인물들이 서로에게 말을 높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시내의 대형서점에서 두 고등학생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영미 번역 소설의 서가 근처에 있던 이들은 <위대한 개츠비>를 집어들고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욕에 가까웠다. 이거 읽어봤냐, 읽어봤다, 어땠냐, 너무 재미없더라는 얘기를 그 또래 특유의 거친 부사를 섞어(예를 들어 ‘졸라’) 떠들고 있었다. 책을 팔아 밥을 먹고 사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어디선가 내 책이 당하고 있을 수난이 떠올라, 동병상련의 심정이 들었다. 동시에, 그런 비난은 터무니없다는 반감이 들었다.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인들이 즐겨 주장하는 것처럼, '지금까지 영어로 씌어진 최고의 소설'은 아닐 지도 모른다. 상투적인 로맨스 소설의 얼개를 가지고 있으며 작가와 동시대에 어울려 자웅을 겨루던 모더니즘 소설의 대가들이 도달한 지점에는 못 미치는 소설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고등학생들이 말하는 것처럼 '졸라 재미없는' 소설은 결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선량한’ 독자를 절망에 빠트리는, 플롯도 캐릭터도 없는 오리무중의 문예 소설도 아니고, 정처없이 이름 모를 도시를 떠도는 주인공의 상념을 하염없이 좇는 관념소설도 아니다. 이 소설은 능란하게 짜여진 플롯에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들이 대결하는 흥미진진한 로맨스이다. 문체는 절제돼 있지만 유머도 잃지 않는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이 죄없는 확신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변호를 기꺼이 맡겠다고 결심했다. 법정에 출석하여 원고인 고등학생들에게 재판에 참석할 수 없는 피츠제럴드를 대신하여 '졸라 재미없는 소설'이라는 원고의 터무니없는 논고에 항변하고, 동시에 이 모든 것은 원고인 고등학생 독자의 악의나 무지 때문이 아니라 1920년대와 2000년대라는 80년의 격차, 한국어와 영어의 어쩔 수 없는 다름 때문이라고 변론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변론은 결국 새로운 번역으로 제시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내친 김에 바로 번역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번역의 속도는 언제나 창작의 속도보다 느렸다. 내가 최종 결정권자인 내 소설은 누구의 재가도 필요 없이 그저 내 상상력의 속도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데 반해, 번역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인 작가의 의도를 가늠하고, 문맥을 살피고, 사전을 뒤지며, 그러고서도 못내 미심쩍어 다시 앞뒤를 살피는 일을 반복하는 과정이었다. 창작이 전차부대라면 번역은 지뢰제거반이었다. 전진한다고 전진이 아니며 제거했다고 제거가 아니다. 다시 돌아가는 길에도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뇌관을 제거한 후에도 다른 뇌관이 남아있을 것을 염려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번역은 한쪽으로 치워두고 내 소설의 창작에만 마음을 쓰게 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그 고등학생들(이제는 아마 사회인이 되었을)에게 좀더 신선하고 재미있는 번역으로 이 소설을 읽혀야한다는 부채감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결국은 피츠제럴드가 이 소설을 착상하고 쓰기 시작한 이 뉴욕, 소설의 중요한 배경인 이 번잡한 도시에 와서야 번역을 마치게 되었다. 소설의 배경에서 그 소설을 번역한다는 것에는 유리한 점이 많다. 뉴욕은 어떤 면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를 테면 이런 피츠제럴드의 이런 묘사는 지금의 뉴욕에 적용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뉴욕이라는 도시, 밤이면 역동적이고 모험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남자와 여자, 자동차들이 쉴새없이 몰려들며 눈을 어지럽히는 이 도시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나는 5번가를 걸어올라가거나 군중 속에서 신비로운 여자 하나를 찾아내 아무도 모르게,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그 여자의 삶으로 들어가는 나만의 공상을 즐겼다. 상상 속에서 나는 그녀들의 집까지 뒤쫓아가고, 그러면 그녀들은 어두운 거리의 코너에서 몸을 돌려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는 문을 열고 따뜻한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는 것이었다. 대도시의 찬란한 어스름 속에서 나는 간혹 저주 받은 외로움을 느끼고 그것을 타인들 - 해질 무렵, 거리를 서성이며 혼자 식사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는, 그러면서 자기 인생의 가장 쓰라린 한 순간을 그대로 낭비하고 있는 젊고 가난한 점원들 - 에게서도 발견하였던 것이다. (페이지 ??)
서울의 골방에서 머릿속으로 그려내야 했던 풍경이 여기서는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었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두고 뷰캐넌과 격돌하던 5번가의 플라자 호텔은 지금도 건재하다. 변한 것이 있다면 중앙집중식 냉난방 시스템이 설비되었다는 것, 그래서 더위에 지친 데이지가 창문을 부술 도끼를 프런트에 주문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역시 최근에 새롭게 단장하긴 했지만 여전히 34번가의 펜실베니아 역에서는 롱아일랜드로 떠나는 기차가 출발하고 도착한다. 이 소설이 뉴욕에서 시작해 로마에서 끝났다면 이 번역은 서울의 입이 험한 고등학생들로부터 시작해 뉴욕에서 끝났다고 말할 수 있다.

2.  1925

<위대한 개츠비>는 1925년에 출간되었다. 1925년이란 어떤 해인가. 우선은 코코 샤넬이 여성의 스커트 라인을 무릎까지 끌어올리기 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소설이 씌어지던 무렵의 미국 여성들은 대체로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여성의 사회 활동도 제한적이었다. 여성의 운명은 누구와 결혼하느냐에 따라 좌우되었고 상류층 여성일수록 직업을 가진 사람이 드물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조던 베이커 같은 여자는 드문 예외라고 할 수 있었다. 미혼인 여성이 사교계의 총아인 데이지와 가깝게 지내려면 골프 챔피언 정도는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 시대의 미국 여성들은 참정권은 획득하였으나 정계에 진출하는 일은 드물었다. 정치와 경제는 사실상 남자들의 영역이었다. 제이 개츠비와 톰 뷰캐넌 같은 남자들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움직였고 그들은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에 뛰어들어 미국의 이익을 챙겼다. 이 소설은 제 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참사가 끝난 직후, 살아남은 자들이 '안도의 열광'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흥청대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어쨌든 전쟁은 끝났고 세계 질서는 어설프게나마 재편되었다. 독일 처리 문제는 여전히 골치 아픈 문제로 남아 있었지만 적어도 그게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더 끔찍한 재앙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예견한 사람은 경제학자 케인즈 정도 밖에는 없었다.

화자인 닉 캐러웨이와 주인공인 제이 개츠비 역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으로 설정돼 있다. 그리고 이 세계대전은 개츠비와 데이지를 만나게도 했지만 동시에 갈라놓기도 했다. 이 소설에서 전쟁이란 신분을 뛰어넘는 낭만적 사랑의 배경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것은 작가인 F. 스콧 피츠제럴드의 태생적 낭만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당시의 독자 모두가 너무나도 그 전쟁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므로 굳이 그 의미를 소설에 적어넣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소설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씌어졌다는 것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최초로 유럽 강대국들의 운명을 결정한 직후라는 뜻이고, 그럼에도 아직은 세계 초강대국으로 완전히 등극하기 이전이다. 이 소설이 발표된 이후 여러 평자들이 개츠비라는 인물이 미국이라는 신생 제국을 인격화하고 있다고 본 것은 의미심장하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개츠비는 화려한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거듭하여 상상하다가 마침내는 그것을 현실이라 믿게 되는 인물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상류층 여성인 데이지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실현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젊은 나이에 엄청난 부자가 된다. 그러나 그의 부는 의심과 질시의 대상일 뿐이며 윤색된 과거는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현재, 나아가 미래까지 모두 자신의 꿈에 맞게 바꿔버리겠다는 그의 무모한 낙관주의는 바로 1925년 당시 신생 강대국인 미국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유서 깊은 유럽의 제국들로부터 견제받으면서, 예의도 모르는 상것들이라는 천대를 받으면서도, 국제 무대에 등장해 서서히 힘을 키워가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여전히 자기확신이 부족한 상태였다. 이 불안한 승리, 아슬아슬한 성공이 언제 사라질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바다 건너 이스트에그의 녹색 불빛을 바라보는 개츠비처럼 미국인들은 낙관을 잃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미국인들이 최고의 소설로 <위대한 개츠비>를 꼽는 이유일 것이다.

이 시기, 1차대전의 종전에서 시작하여 대공황의 발발까지로 이어지는 시기를 흔히 재즈 시대라 부른다. 아직 마일지 데이비스가 '혼자 듣는 음악'으로 재즈를 새롭게 정의하기 전의 재즈라 할 수 있다. 주로 흑인 연주자들로 구성된 빅밴드가 무대에서 요란하게 흥청흥청 연주를 하면 성장을 한 백인들이 리듬에 맞춰 춤을 추었다. 쿵짝쿵짝, 요란하고 흥겨운 음률 속에는 비관과 우수가 끼어들 틈이 없다. 1차 세계대전 처리에서 비롯된 세계 경제 시스템의 대붕괴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뉴욕 주식 시장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벼락 부자들을 양산하고 있었다. 새로 뽑은 번쩍거리는 자동차들을 타고 뉴욕 시내를 질주하는 신흥 부자, 흔히 뉴머니라 불리는 이들은 뉴잉글랜드에 자리잡은 유서깊은 가문의 올드머니들의 경멸의 대상이었다. 거칠게 분류하자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개츠비는 뉴머니를 대표하는 인물이고 폴로용 말떼를 거느리고 동부에 나타난 톰 뷰캐넌은 올드머니에 가까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개츠비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를 알게 된 데이지는, 그가 결코 자신들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남편인 톰에게로 돌아선다.

개츠비와 같은 신흥 부자들은 석유와 도박, 주식 투기와 밀주로 돈을 벌었다. 때는 또한 금주법의 시대였다. 청교도적 윤리에 기반한 금욕주의는 술의 판매를 금하는 금주법 시대를 열었다. 금주법은 1920년대 초반부터 발효되어 대공황으로 경제가 붕괴되면서 사실상 끝이 났다. 그러나 개츠비가 이 소설을 구상하고 집필하는 1920년대 초반에는 금주법이 엄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갈피갈피마다 진한 술냄새가 진동을 한다. 진탕 마셔대고 술주정을 벌이는 파티가 날마다 계속되고 톰은 어디를 가든 술을 챙겨 간다. 개츠비는 밀주업자라는 소문에 시달리고 캐나다로부터 몰래 파이프라인을 통해 술을 들여온다는 황당무계한 루머까지 나돈다. 결국 금주법이라는 무리한 법은 이 소설에서 보듯 유명무실했으며 범죄 조직등을 배불리는 수단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000년대의 한국에 사는 우리는 이 소설이 금주법의 시대에 씌어졌다는 것을 유념해둘 필요가 있다. 당시의 독자들은 지금의 우리와는 사뭇 다르게 소설 속의 파티 장면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도덕과 법이 무너지고 노골적으로 돈과 출세를 좇는 세태에 충격을 받는 한편으로, 그 속에서 벌어지는 터무니없이 무모한, 그렇기에 더욱 순수한 개츠비의 사랑이야말로 진흙 속에 핀 연꽃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피츠제럴드는 딸이 태어나자 맨해튼을 떠나 뉴욕 근교인 롱아일랜드의 그레이트넥(Great Neck)으로 이사를 간다. 소설의 제목이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로 정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개츠비가 위대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그레이트넥에 살고 있었고 주인공 개츠비 역시 그곳의 주민으로 상정했기 때문에 작가 머릿속 무의식의 교량이 둘을 연결했을 것이다. 이 그레이트넥은 소설 속의 웨스트에그이며 뉴머니들이 몰려드는 작은 반도로 묘사된다. 그 건너편의 이스트에그는 올드머니들의 저택이 즐비한 곳이다. 자연스럽게도, 개츠비는 웨스트에그에, 뷰캐넌 부부는 이스트에그에 산다. 뉴머니 개츠비는 이스트에그의 불빛을 선망하며 바라보지만 올드머니 뷰캐넌은 개츠비가 아무리 환하게 불을 밝혀도(“"무슨 세계박람회라도 하는 것 같은데."(Page ??)) 그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뉴욕은 선망의 도시다. 브루클린에서는 이스트강 너머의 맨해튼을 바라보고 샌트럴파크의 잔디밭에서는 어퍼이스트의 최고급 펜트하우스를 우러른다. 5번가의 쇼윈도에는 세계 최고의 상품들이 즐비하고 레스토랑에서는 유명인사들과 우연히 마주친다. 개츠비는 데이지의 삶을 선망하고 데이지는 개츠비가 데려온 영화계의 스타들을 선망한다. 어찌할 수 없는 선망, 그리고 그것에 대한 터무니없을 정도의 가혹한 대가. 이것은 훗날 많은 소설들이 그대로 답습하게 될 테마다.

3. 무가치함의 위대함 혹은 위대한 무가치

이 소설에 대해서는, 역자로서가 아니라 작가로서 할 말이 많다. 파면 팔수록 재미있는 데가 많은 소설이다. 그러나 독자들의 즐거움을 방해할 수 있으니 구구절절 밝히지는 않으려 한다. 단지 데이지에 대해서만은 한 마디 하고 갈까 한다.  개츠비가 자기 인생을 걸고 사랑하는 이 여성은, 실은 그런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우리의 주인공 '위대한' 개츠비가 인생을 걸고 사랑하는 여자가 실은 그럴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여자라는 아이러니는, 사실 받아들이기 쉬운 것은 아니다. 그 결과 이전의 몇몇 번역본에는 데이지의 철없음, 무지, 방종과 나약함이 순화(혹은 미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데이지라는 인물은 종잡을 수가 없는 모호한 존재로 보이게 된다. 데이지라는 캐릭터는 그런 희미한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쉽게 사랑에 빠지고 허영에 사로잡혀 있으며 무책임하다. 화려한 것을 추종하고 모든 것이 자기 노력과는 상관없이 저절로 이루어지길 바라며, 자신의 무책임이 심각한 결과로 돌아올 때에는 그 처리를 남에게 맡기고 달아난다.

그녀를 자기 저택으로 초대한 개츠비는 영국제 셔츠로 가득한 옷장을 열고 그 셔츠들을 하나하나 꺼내 산처럼 쌓는다. 그러자 데이지는 그 셔츠 더미에 얼굴에 묻고 울음을 터트린다.
"너무, 너무 아름다운 셔츠들이야." 그녀가 흐느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얼굴을 파묻은 양팔에 잠겼다. "너무 슬퍼. 한번도 이렇게,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은 본 적이 없거든."
요컨대 데이지는 인간 개츠비가 아니라 영국제 셔츠를 사랑하는 여자다. 개츠비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사랑할 가치가 없는 여자를 지독하게 사랑한다는 것, 아니, 그 여자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한다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위대한 개츠비>는 상투적 로맨스의 무덤에서 부활해 하늘로 승천한다. 개츠비의 '위대함'은 그가 인류에 공헌했다거나, 뭔가 엄청난 업적을 쌓았기 때문에 붙은 수식이 아니다. 그는 무가치한 존재를 무모하게 사랑하고 그러면서도 의연하게 그것의 실패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여전히 자신의 상상 속에 머문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위대하다. 따라서 그 위대함에는 씁쓸한 아이러니가 있으며 불가피한 자조의 기운이 스며 있다.

데이지는 이후 등장하게 될 수많은 현대적 여성 캐릭터의 모델이다. 우리는 이런 여성들을 심지어 <쇼퍼홀릭> 같은 칙릿 소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뭔가를 원하고, 그러면서도 그 결과에는 무심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와 사랑에 빠지는 여자, 우리는 그런 여자들을 알고 있다. 고개만 옆으로 돌려도 '그녀'들이 우리 곁을 지나간다.

<위대한 개츠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앞에는 통속적 연애소설의 세계에 빠져 현실에서 허우적거리다 파멸해 버리는 보바리 부인이 버티고 서 있다. 개츠비는 비록 남자이지만 통속적이고 상투적인 거부의 이미지에 스스로를 복속시키고 그럼으로써 파국에 이른다는 점에서 보바리 부인과 같은 족속이다. 동시에,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애초에 설정한 자신의 환상 속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저 라만차의 방랑기사, 돈 키호테의 후예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데이지와 개츠비는 월츠를 추는 두 명의 댄서처럼 서로 떼어놓기 어려워진다. 데이지는 사랑 그 자체와 사랑에 빠지고 개츠비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4. 너무 늦은 성공

피츠제럴드는 1896년에 미국 중서부 미네소타 주의 생폴에서 태어났다. 소설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가 중서부의 삶에 대해서 말하는 장면은 그대로 피츠제럴드 자신의 육성일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
우리가 겨울 밤의 한복판을 질주할 때면, 진짜 눈(설), 바로 우리의 눈(설)이 우리 바로 옆에서 녹아번져가면서 창문 위에서 반짝거리는 순간, 그리하여 위스콘신 주의 작은 간이역들의 희미한 등불들을 지나갈 때면 날카롭고 거친 기운이 갑자기 공기 속으로 뒤섞여 들었다. …(중략)

거기가 바로 나의 중서부다. 밀밭도, 초원도, 사라진 스웨덴 이민자들의 마을도 아닌, 젊은 날의 가슴 떨리는 귀향 열차, 서리가 내리는 어둠 속 거리의 가로등, 썰매의 방울 소리, 그리고 불켜진 창문의 불빛으로 눈 위에 제 모습을 드러내는 성탄 축하 장식의 그림자들이다. 나는 그것의 일부다.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한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주인공 개츠비와 마찬가지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입대하여 미국 남부, 알라바마 주의 몽고메리에서 훈련을 받았다. 거기에서 알라바마 주 대법원 판사의 딸인 젤다라는 여성을 만난다. 중서부 출신의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집안의 아들인 피츠제럴드가 유서깊은 남부 명문가의 딸을 만난 것이다. 그들은 약혼을 하기는 했지만 자신을 ‘부양할’ 남자를 찾는 젤다에 뜻에 따라 파혼한다. 뉴욕으로 돌아온 피츠제럴드는 첫 소설 <천국의 이쪽>을 써서 일약 문학적 스타로 떠오른다. 둘은 이 책의 출간 직후에 결혼하고 뉴욕에 자리를 잡는다.

젤다와의 결혼 생활은 좋지 않았다. 독자들이 젤다를 데이지와 겹쳐서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데이지와 마찬가지로 젤다는 화려한 삶을 추구했다. 젤다를 ‘부양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었다. 그녀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아내로 문학판의 스타가 되어 사교계를 들락거리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좋아했다. 검소하고 비루한 삶은 사양이었다. 스콧과 젤다는 유럽을 떠도는 코스모폴리탄의 삶을 살았다. <위대한 개츠비>의 초고는 프렌치 리비에라에서 완성되었고 교정은 로마와 카프리섬에서 보았다. 편집자와 피츠제럴드는 전보와 우편으로 원고와 소식을 주고 받아야 했다. 이런 사치스런 생활에서 불어나는 빚을 감당하기 위해 피츠제럴드는 결혼 초기에는 광고회사에서 일했고 틈틈이 수많은 단편소설들을 썼다. 그 중의 하나가 최근에 영화로도 만들어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이다. 말년에는 헐리웃으로 가 영화 시나리오를 썼지만 성공시킨 작품은 거의 없었다. 스콧은 대학 시절부터 심각한 알코올 중독이었고 젤다는 정신병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은 끝까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더욱 심해졌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그의 세번째 장편소설이다. 착상에서 집필,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면서 3년이나 이 소설에 매달렸지만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평론가들의 리뷰는 이전 책들보다 좋았지만 책은 잘 팔리지 않았다. 데뷔작의 절반도 팔리지 않았고 이어 연극과 무성영화로도 제작됐지만 판매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이 책은 출간된 해인 1925년 말에는 거의 죽어버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후로부터 작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략 25,000부 정도가 팔린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 정도면 당시의 시대상을 감안한다해도 결코 많은 것이 아니고, 지금 누리고 있는 성가에 비춘다면 놀랄만큼 적은 부수다.

책이 출간되기 전, 편집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가 그때까지 영어로 씌어진 소설 중에서 최고라고 자부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자 크게 낙담했다. 그는 제목을 잘못 지었다고 후회하기도 했다(‘황금모자를 쓴 개츠비”나 “트리말키오” 등이 그가 마지막까지 고려한 대안이었다).

나는 <위대한 개츠비>의 실패가 젊은 작가 피츠제럴드의 기를 결정적으로 꺾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후로도 두 권의 장편을 썼지만 데뷔작의 성공은 재현하지 못했다. 1940년, 45세를 일기로 사망하던 무렵, 그는 몇 년째 헐리웃에 붙들려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빚더미에 신음하고 있었고 젤다는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었다. 술과 담배, 격심한 스트레스와 영화 제작업자들의 독촉에 시달리던 그에게 심장 발작이 찾아왔다. 젤다는 그로부터 8년 후, 노스 캐롤라이나의 정신병원에서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사망하던 무렵, 피츠제럴드는 거의 잊혀진 작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참전이라는 격랑을 거치면서 흥청거리던 재즈 시대의 이야기는 설 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위대한 개츠비>는 작가의 죽음과 더불어 부활한다. 그의 이름이 서서히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작가가 죽으면 단박에 대표작이 가려진다. 모호하던 작품 간의 우열도 홀연 분명해진다. 이에 따라 가장 많이 팔린 데뷔작 <천국의 이쪽> 대신 <위대한 개츠비>가 단연 피츠제럴드의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무엇보다 이디스 워튼이나 T. S. 엘리어트, J. D. 샐린저, 거트루드 스타인 같은 동료 작가들이 <위대한 개츠비>야말로 미국 문학의 걸작이라고 증언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주문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보급판 페이퍼백을 비롯해 여러 판본이 동료 작가들의 헌사를 달고 서점에 깔렸다. 진중문고(Armed Service Editions)판으로 만들어져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전선으로 보내진 부수만도 150,000부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현재까지 부동의 스테디셀러다. 미국의 그 어떤 서점에서도 <위대한 개츠비>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도 언제나 좋은 자리에서이다.

스티븐 킹은 자신의 창작론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농반진반으로 말했다. 그 두 가지는 “육체적인 건강을 유지하는 것과 결혼생활을 지속하는 것”이었다. 피츠제럴드는 그 모두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피츠제럴드는 스티븐 킹의 소설 대군에 홀로 필적할 단 한 권의 얇은 소설을 세상에 남겼다. 그것이 바로 <위대한 개츠비>이다.

만일 누군가 나에게 이 소설을 단 한 줄로 요약해달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표적을 빗나간 화살들이 끝내 명중한 자리들”이라고. 개츠비에게는 데이지라는 목표가 있었고, 데이지에게는 낭만적 사랑이라는 지향이 있었다. 지친 윌슨은 엉뚱한 사람에게 복수를 하고, 몸이 뜨거운 그의 아내는 달려오는 자동차를 잘못 보고 제 몸을 던진다. 작가인 피츠제럴드마저도 당대의 성공과 즉각적인 열광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 표적들을 향해 쏘아진 화살들은 모두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꽂혔다. 난데없는 곳으로 날아가 비로소 제대로 꽂히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이다.

2009년 9월

브루클린에서
김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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