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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인간이 되기 위한 인문

책만 보는 바보가 일러주는 사람답게 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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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는 아홉 가지의 올바른 몸가짐으로 “발은 무겁게, 손은 공손하게, 눈은 바르게, 입은 신중하게, 머리는 똑바르게, 서 있을 때는 의젓하게, 목소리는 조용하게, 숨소리는 고르게, 낯빛은 단정하게”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모범이 되는 사람으로 “조광조의 공명하고 정직한 점, 이황의 침착하고 근신한 점, 율곡 이이의 자세하고 온화한 점, 조헌의 근면하고 정확한 점”을 들었다.

<사소절士小節>(<사람답게 사는 즐거움>, 솔출판사, 1996, 김성동 편역)은 이덕무가 35살 때 지었다. '어린이의 예절(童規)', '여성의 예절(婦儀)', 선비의 예절(士典)'의 3편 9백 24장으로 된 이 책은 선비와 부녀자와 아이가 나날의 삶에서 배우고 지켜야 할 예의범절과 올바르게 닦아 나가야 할 삶의 자세와 몸가짐을 조목조목 적어놓은 일종의 수신 교과서이다. 개인의 저술이었지만 방각본坊刻本으로 널리 퍼져 읽혔으니, 영정조 이후 조선의 도덕 교과서였던 셈이다.

아래의 글은 지금은 절판인 <사람답게 사는 즐거움>을 엮은 김성동의 후기를 정리한 것이다. 루소와 비교하여 이덕무를 설명하고 있다. 조선 후기 최고의 도덕교과서 였음에도 현대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조선 시대의 것은 시대에 맞지 않고 동시대의 유럽의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지. '사람답게 사는 길'이라는 김성동의 후기 제목처럼 예나 지금이나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은 그리 다르지 않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알려주는 것은 나뿐이 아니라 우리 자식에게도 필요하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무관(懋官)이다. 그리고 호는 형암(炯庵) ·아정(雅亭) ·청장관(靑莊館)이다. 정종(定宗)의 별자(別子) 무림군(茂林君)의 후손으로 통덕랑(通德郞) 성호(聖浩)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얼(庶孼) 출신으로 빈한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박람강기(博覽强記)하고 시문에 능하여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성대중(成大中) 등과 사귀고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냈으며 이것이 청나라에까지 전해져서 이른바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1778년(정조 2) 사은겸진주사(謝恩兼陳奏使) 심염조(沈念祖)의 서장관으로 청의 연경(燕京)에 갔다. 이때 기균(紀均)·당악우(唐樂宇)·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엄성(嚴誠)·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이헌교(李憲喬)·채증원(蔡曾源)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했다. 돌아올 때 그곳의 산천·도리(道理)·궁실·누대(樓臺)·초목·충어(蟲魚)·조수(鳥獸)에 이르는 기록과 함께 많은 고증학 관계 서적을 가지고 왔는데, 이것은 그의 북학론 발전에 큰 보탬이 되었다. 1779년에 정조(正祖)가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여기에 서얼 출신의 우수한 학자들을 검서관(檢書官)으로 등용할 때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수위(首位)로 뽑혔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규장각에서 《국조보감(國朝寶鑑)》 《대전통편(大典通編)》 《무예도보(武藝圖譜)》 《규장전운(奎章全韻)》 《송사전(宋史筌)》 등 여러 서적의 편찬 교감에 참여하였으며, 많은 시편(詩篇)도 남겼다. 서울 지도인 <성시전도(城市全圖)>를 보고 읊은 백운시(百韻詩)가 정조로부터 ‘아(雅)’라는 평가를 받아 호를 아정(雅亭)이라 새로이 칭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검서를 겸한 채 외직에도 나가서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등을 거쳤으며 1791년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가 되었다가 《홍문관지(弘文館志)》를 교감한 공로로 적성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었다.

1793년 병들어 돌아가자, 3년 뒤 그의 재주를 아끼던 정조가 내탕전(內帑錢) 오백 냥을 하사하여 문집 《아정유고(雅亭遺稿)》 8권 4책을 간행하게 하였다. 문자학(文字學)인 소학(小學), 박물학(博物學)인 명물(名物)에 정통하고, 전장(典章) ·풍토(風土) ·금석(金石) ·서화(書畵)에 두루 통달하여, 박학(博學)적 학풍으로 유명하였다. 따라서 북학을 고창하지는 않았으나 명(明)과 청(淸)나라의 학문을 깊이 이해하고 고염무(顧炎武) 이래 청조 고증학의 성과를 수용하여 실질적으로는 북학을 함으로써 후배들의 청조 고증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그의 공적을 기념하여 장례비와 유고집인 《아정유고 (雅亭遺稿)》의 간행비를 내렸다.

그의 저서로는 이만운(李萬運)의 책을 보완한 역사서 《기년아람(紀年兒覽)》, 사(士)의 윤리와 행실을 밝힌 《사소절(士小節)》, 고금의 시화(詩話)를 수록한 《청비록(淸脾錄)》, 명나라 유민(遺民)의 인물지인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등 십여 종이 있고, 이들은 《아정유고》 등 문집과 함께 아들 광규(光葵)에 의해 망라되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71권 33책으로 편찬되었다.

무위당 장일순무위당 장일순의 표지화.


교육이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자주성과 창조성 그리고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를 가리켜 사람이라 부른다. 그런데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이러한 특성은 스스로 타고나거나 저절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드문 경우이고, 거지 반의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더욱 공고하여지게 마련이다. 자신이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는 깨달음을 가지고 세계를 고치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키워주는 교육이 중요하다.

교육 문제가 나올 때마다 이른바 배웠다는 사람들이 흔히 입에 올리는 것이 루소이다. 이십 년의 긴 사색 과정과 삼 년의 집필 과정을 거쳐 이루어놓은 그의 교육론인 <에밀>. 사람들은 그러나 서양 사람 루소가 지은 <에밀>이 있다는 것은 알아도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조선의 이덕무가 지은 <사소절>이 있다는 것은 모른다.

루소는 타락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두터운 장벽이 처져 있다고 보았다. 이 장벽을 꿰뚫고 사람답게 사는 길은 자연을 닮는 도리밖에 없다고 보았으므로, 자연으로 돌아가서 마침내는 '교육이 없는 교육'을 이루자는 것이 루소 교육론의 핵심이다.

루소의 <에밀>이 자코뱅당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프랑스혁명의 불씨가 되었을 때, 조선에서는 이덕무의 <사소절>을 읽고 있었다. 청소년들은 <동규>를 읽었고, 부녀자들은 <부의>를 읽었으며, 책권이나 읽는 어른들은 <사전>을 읽었다.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떠한 마음가짐과 몸가짐으로 책을 읽고 이웃과 화목하면서 어른을 공경하며 사물과 현상의 이치를 깨우쳐 진리로 사람다운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낮고 부드럽게, 때로는 엄한 아버지처럼 위엄 있게 들려주는 이덕무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루소와 이덕무는 여러 가지로 닮은 점이 많다.

루소는 평생 학교라고는 다녀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오로지 사색과 독서로 학문과 사상을 이루어낸 사람으로, 자기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겨야 할 정도로 평생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이다. 어머니는 출생과 동시에 죽었고 아버지는 열 살 때 행방불명되어 남의 집 머슴을 살며 젊은 시절을 보내었다.

이덕무 또한 맺힌 것이 많았던 사람이다. 왕족이 후예라지만 집안이 너무 빈한한데다 병약하여 서당 출입 한번 못한 채 순전한 독공부로 학문과 사상을 일구어낸 사람이다. 굶주림이야 책을 읽는 것으로 참아낼 수 있었지만 그를 정작 못 견디게 한 것은 서출庶出이라는 출신 성분이었다. 다행히 정조대왕 같은 영명하고 호학好學하는 군주를 만나 장년의 나이에 출륙出六(6품으로 승급하여 다른 직에 전임(轉任)되는 것)하였으나, 타고나기를 곧고 청렴결백한 그에게 철 따라 한 차례씩 받는 현감 녹봉인 쌀 한 섬 한 말에 콩 열 말로는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다. 더구나 이덕무는 녹봉 안에서만 살아내는 청백리였다. 세속의 영리와는 멀리 떨어져서 고고하게 살다 간 그의 관심은 오직 세상사의 이치를 두루 깨우쳐 사람사람이 모두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데에만 있었으니, 콩소매 속에 늘 염낭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꺼내 볼 수 있게 만든 소형책)과 행연行硯(주로 여행 중에 가지고 다니는 조그마한 벼루)을 넣고 다니면서 보고 듣거나 생각나는 것들을 그때그때 질서疾書(빨리 쓴다)하여 두었다가 책을 쓰는 데 참고로 하는 것이었다.

루소가 눈을 주었던 곳은 언제나 사회와 그 사회를 움직여 나가는 제도였다. 사람의 내적인 심성에 대하여서도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아니나,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하는 첫째의 것을 정치나 사회 제도의 잘못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루소는 어떤 일급 사회주의자에 못지 않는다.

이덕무가 관심을 두었던 것은 사람의 본성이었다. 사람들의 심성 속에 깃들여 있는 허위의식과 탐욕을 사람의 본성이 지니고 있는 부정적 일면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파스칼과 가깝고, 그럼에도 교육을 통하여 선성善性이 계발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는 맹자에 가깝다.

실사구시 하는 실학자답지 않게 체제와 사회적 모순에 눈길을 주지 않고 철저하게 내성적 태도만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은 수신 교과서라는 <사소절>의 제약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덕무의 교육 철학이 성리학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탓이다. 우주 철학이면서 동시에 윤리 철학이기도 한 성리학에서 문질빈빈文質彬彬(문과 질이 알맞게 섞여 조화를 이루는 일. 곧 겉모양의 아름다움과 속내의 미가 서로 잘 어울린 모양. 출전 論語(논어) 雍也篇(옹야편))하여 훌륭한 사람, 곧 완성된 인격체인 군자君子로 만드는 것이 그 교육 철학의 마지막 언덕이 된다. 군자가 되기 위한 교조적 덕목인 삼강오륜이 강조되는 것은 그러므로 또한 지극히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물질 중심으로만 치닫는 이 생명 파괴의 시대에 자라나는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이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어른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사는 삶이 사람다운 삶으로 될 수 있을 것인가.

덧붙임_
참조 : 사람답게 사는 길 - 김성동, <사람답게 사는 즐거움>
조그만 행실을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을 그르치게 된다



사람답게 사는 즐거움
이덕무/솔출판사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 지음, 권정원 옮김, 김영진 그림/미다스북스

양반가문의 쓴소리
조성기 지음/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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