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서양 문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나온 고민의 산물이 번역어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가. 메이지시대 번역가, "한국은 근대 문물을 받아들일 당시의 정세를 보면, 중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는 오랑캐라는 중화사상에 사로잡혀, 서구식 근대화에 대한 정체성을 찾기도 전에 일본이 청일전쟁 이후 동양사회의 강자로 등장하는 과정에서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일본 사상가의 '지난한 번역 과정과 번역 역사'와 '그들의 노력의 결실'을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번역 과정이 쉽지 않았다는 점은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는 '번역어의 성립'에서 볼 수 있다. 얼마 전 읽은 야나부 아키라의 《번역어의 성립》(마음산책)에서 이야기하는 번역어의 성립과정에 관해 몇 가지 예를 보여준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어느 시대나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번역어가 반드시 채택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freedom, liberty의 번역어로 여러 번역어가 난립하였는데 그 가운데 '자유自有'라고 하는 부적절한 어감을 가지고 있던 번역어가 승자가 되었다. 메이지 이전 일본에서 자유는 '제멋대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자유를 '남에게 구속받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自有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 하지만 자유가 선택되었다. 적당한 번역어를 찾는 것이 매우 어려운 여건에서 어느 정도의 오류는 어쩔 수 없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번역은 단순한 번역 이상이다. 메이지 초기의 번역이라고 하는 화두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서양 사회를 모범으로 하는 전재 중의 하나가 바로 서양문헌에 대한 번역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러한 번역이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자각하는 문화적 실천"이라 말한다. 이에 대한 저자의 의견이다. : "번역이 타자로서의 서양문명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일본 고유의 문화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종합 인격체로서, 자본주의 문명의 일본식 근대화를 완성한다고 생각했다. 즉, 번역 그 자체는 단지 서구자본주의 문명의 개념과 사상을 수용하는 지적인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자각하는 문화적 실천이라고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국의 서구문명 수용은 일본의 경험에 때문에 이미 걸러진, 일본에 의해 번역된 서구문명을 이식받은 것"이다. 당시 일본 지식인, 사상가의 고민이 배제되고 단순히 일본의 근대화 과정의 산물인 '번역어'를 비판 없이 수용한다.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성을 인정하더라도 진지한 고민의 부재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안타깝고 아쉬운 점이다. 저자의 "일본의 근대화와 그 번역의 문제는 단순히 타자의 문제점으로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근대 이후 동아시아 국가 간 사상의 연계를 풀어갈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점에 깊게 공감한다.
번역과 일본의 근대 |
덧붙임_
번역어는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