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방은 왜 이렇게 높을까’ ‘문은 또 왜 이렇게 낮고 마당, 토방, 마루, 툇마루 간의 높이에 차이를 둔 이유는 뭘까’ ‘옛날 사람들은 우리보다 유난히 작거나 유연하거나 혹은 불편에 둔감해서일까?’
전통 한옥을 둘러본 사람이라면 으레 갖는 의문이다. 건축이 사람을 길들이는 방식은 다양하다. 적절한 높이, 거리, 방향, 행동 강제 장치, 시각적 통제 장치를 확보하거나 규모, 장식을 달리함으로써 영역 간의 차이를 분명히 한다.
조선시대 양반집은 길들이기의 전형이다. 신분 질서를 몸으로 익히도록 만들어졌다. 하인이 거주하는 행랑채 마당에서 양반의 공간인
사랑채를 바라보면 하인의 시선은 사랑채 누마루에 닿게 된다. 자연 지세나 인위적 방법으로 영역 간 높이차를 구현한 까닭이다.
하인이 고개를 들지 않는 이상 하인은 주인의 발 정도만 볼 수 있다. 주인은 하인의 모든 것을 내려다볼 수 있다.
공권력이 정점에 이르는 영역인 궁궐은 길들임의 건축적 장치가 총망라됐다. 특히 경복궁 서쪽에서 흘러들어와 남쪽 광화문으로 빠져나가는
금천(禁川)의 기능이 흥미롭다. 천을 건너기 전과 건넌 후의 영역이 다르다. 명백한 지위 구분이 이뤄진다. 금천이 경계로 가르고
있는 것은 왕의 공간과 신하들의 공간이다. 세자와 왕의 공간 사이에는 금천 같은 것이 없다. 금천으로 지위 고하를 구분한 장치가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수준에서 길들이기를 수행하는 것이다.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은 건축의 내부에
사람들을 교묘히 길들이려는 정치·사회학적 의도가 숨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건축은 오랜 세월 권력과 사회 지배 이념의
하녀로서 기능해왔다. ‘길들임’과 ‘길들여짐’이라는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조선시대의 양반집에서부터 궁궐과 도성, 현대 도시와 건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와 분석을 바탕으로 건축의 실체를 파헤친다.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 |
건물의 사람차별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
"개똥아, 내 발끝만 봐라" 사랑채의 정치학
건축은 사람을 길들이는 수단이지만, 길들임에서 깨어나게 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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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자본 창업 컨설팅 전문가인 '창업전략연구소' 이경희 소장에게 망하는 창업자의 망하는 이유 중 가장 공통적인 하나의 이유를 주문했더니 주저 없이 '준비'라고 답했다. 김연아 선수의 성공은 수천, 수만 번 넘어지는 과정의 준비를 통해 통달의 기술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동네 푸줏간을 내더라도 '상권, 사람, 상품, 유통, 전문식견, 자본 등'에 대한 포괄적인 준비 없이 그저 욕심만 내며 덤볐다간 망하기 십상이란다.
이런 충고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일 중 대표적인 것이 자신이 100% 알지 못하는 분야의 사업에 뛰어 드는 것'이라는 시중의 속설과도 맥락이 통한다. 특히 이 사람의 특징은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자만과 고집으로 주변인과 경험자들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는다. 물론 사업의 성공에 도움이 되는 교육이나 세미나도 돈 낭비, 시간 낭비일 뿐이라며 무시하기 일쑤다. 그리고 결국에는 망한다.
'주부의 가게 사이치'는 일본의 작은 온천 도시 변두리에 있는 80평 규모의 반찬 슈퍼마켓이다. 도시 인구가 5천 명이 채 안 되는데도 주변에 대형 할인점이 속속 들어서면서 경쟁은 날로 치열해져 간다. 그럼에도 사이치는 '줄 서서 먹을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다. 물론 사토 게이지 사장의 경영기법이 매우 기발하되 지극히 합리적인 탓이다. 그런 그도 처음에는 절망에 빠질 만큼 어려웠었다. 갖은 노력에 남다른 발상과 경영기법이 보태져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필자가 보는 사토의 비결은 '배짱, 절제, 메모, 인본주의'로 압축된다. 자신의 라이벌은 인근의 반찬가게가 아니라 '전국의 주부'다. 그녀보다 맛있게, 위생적으로, 싸게 반찬을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다. 직원의 친절 기준은 경쟁 가게가 아니라 주변의 모텔이다. 모델에 들른 고객이 자신의 가게에 오므로 모텔보다 더 친절하지 않으면 불친절한 가게가 되기 때문이다. 매출과 순수익보다 품질과 고객만족을 최우선으로 삼는 절제, 거기서 나오는 공존의 인간존중철학. 무엇보다 사토 사장의 압권은 '아날로그 수첩'으로 대변되는 메모의 습관이다. 사이치의 모든 경쟁력은 바로 꼼꼼한, 기술적(?) 메모에서 나온다. 과연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진수를 보는 듯하다.
줄 서서 먹는 반찬가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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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도꼬마리'가 들어 있다. 갈고리 모양의 가시가 있어 잘 달라붙는 열매 말이다. 데이비드 오길비(Ogilvy·1911~1999)가 뽑아낸 광고 카피와 그의 철칙 가운데 몇몇 실한 놈들은 옷이 아니라 정신에 들러붙는다. 거추장스럽기는커녕 반가운 도꼬마리다. 짐짓 모른 척 기억에 담아두고 싶어진다.
1999년 뉴욕타임스는 오길비의 부음 기사를 1면에 실었다. 현재까지 이 신문 첫 페이지에 부음이 쓰인 광고인은 아직 없다. "시속 60마일로 달리는 신형 롤스로이스 안에서 가장 큰 소음은 시계 초침 소리입니다"라는 카피를 쓴 자동차 광고, 맥스웰하우스 분쇄 커피에 붙인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맛있다"…. 프랑스 경제지 '엑스팡시옹'은 산업혁명에 크게 이바지한 서른 명을 거명하면서 에디슨, 아인슈타인, 레닌, 마르크스 등에 이어 일곱째로 오길비의 이름을 올리고 '현대 광고의 교황'이라고 적었다.
오길비는 영국 옥스퍼드에서 낙제생이었다. 대학을 중퇴한 그는 프랑스 파리의 마제스틱 호텔 주방에서 실습생으로 일하며 세상을 배우기 시작했다. 출근 첫날 벽에 기대 감자 껍질을 벗기다 들었다는 호통. "똑바로 서. 네가 여기서 하는 일은 다 중요하다. 자부심을 가져라." 오길비는 주방 기구 세일즈맨으로도 능력을 발휘했다. 판매는 엄숙한 일이었다. 문틈에 발을 찔러 넣고 주부를 설득해야 했던 그는 나중에 "소비자는 멍청이가 아니다. 당신 아내이다. 그녀의 지적 능력을 무시하지 말라"는 명언을 남겼다.
1935년 광고계에 발을 들어놓은 건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형 덕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오길비는 초창기의 갤럽과 함께 영화 산업을 분석하며 관객이 누구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게 됐다. 영국 출신 오길비가 미국 소비자의 습성과 사고방식을 꿰뚫게 된 것이다. "미학과 광고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광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품이다. 표현 기법 따위는 무시해야 한다. 상품을 팔지 못한다면 나쁜 광고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광고는 라디오 방송과 잡지·신문을 통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신상품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경제가 가파르게 성장하던 1948년, 오길비는 뉴욕 매디슨가(街)에 터를 잡았다. "자신을 광고할 수 없다면 어떻게 남을 광고하겠소"라고 말했던 그는 화술이 좋았고 험담도 잘하는 괴짜였다. 하지만 직업 정신은 투철했다. 오길비는 미국 광고에 들씌워진 사기꾼·약장수의 이미지부터 몰아내야 했다.
역사에 남을 만한 '빅 아이디어' 1탄은 작은 셔츠 회사 광고에서 나왔다. '해서웨이 셔츠를 입은 사나이'다. 오길비는 촬영장 가는 길에 약국에서 재미 삼아 산 50센트짜리 검은 안대를 모델에게 씌웠고 반응이 좋았다. 대중은 멋진 사내가 왜 한쪽 눈을 잃었을까 궁금해하면서 그 광고를 소비했다. 안대를 한 개·소·아기가 등장하는 광고가 나올 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존재감이 미미했던 비누 도브도 그의 빅 아이디어 덕에 1등 브랜드로 도약했다. 처음에 "최초의 미용 비누로 산성도 알칼리성도 아닌 중성입니다"라고 전하자 주부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오길비는 비누 제조법을 꼼꼼히 연구하고 나서 이런 카피를 뽑아냈다. "도브는 4분의 1이 클렌징크림입니다. 세안하는 동안 피부에 크림을 바르세요." 클렌징크림을 플라스틱 도브 비누 틀에 붓는 모습을 보여준 TV 광고도 히트했다.
오길비는 압축된 문체를 사랑했다. 형용사와 부사를 빼고 명사와 동사만 남겨 간결하고 명료한 글을 쓰려고 애썼다. 그리고 나태를 혐오했다. 직원들 책상에 "눈을 높여 신(神)과 경쟁하시오" 같은 메모를 붙이며 독려했다. 카피가 마음에 안 들면 럼주를 마시고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들었다. 광고업은 전통적으로 작가들의 수입원이었다. '악마의 시'로 이름난 살만 루슈디도 한때 오길비앤드매더사(社)의 카피라이터로 일했다.
오길비의 광고 철학은 '말하는 내용이 기법보다 중요하다' '브랜드 이미지를 잊지 말라' '광고에서 재미는 금기(禁忌)다' '상품을 팔지 못하는 광고는 아무리 창의적이어도 쓸모없다' 등으로 요약된다. 1963년 오길비앤드매더에 입사해 그를 지켜본 저자는 "오길비는 오만함이 없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기비판적일 수 있었다"고 썼다.
이 전기는 빽빽한 일화로 속을 채웠다. 인생의 굽이마다 이야기꾼 오길비의 철칙이 만져진다. 하지만 책의 구성은 헐겁고 산만하다. 골동품을 잘 그러모아 놓고 진열에 실패한 꼴이다. 오길비가 1991년 미국 광고인협회 연설에서 "매출을 올리는 광고를 만들기 위해 성전(聖戰)을 벌여 왔다"면서 들려준 구호보다 그를 더 잘 설명해주는 말도 없다. "무조건 팔아라(We Sell. Or Else)."
무조건 팔아라 |
상품 못 파는 광고는 창의적이라도 쓰레기
"어설픈 창의보다 명쾌한 설득" 광고 천재 오길비
문장 하나로 롤스로이스 품절시킨 남자
창의성보다 명쾌함으로 승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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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규정한 시간의 심리학은 단순명쾌하다. 새로운 환경에 놓이면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몰입하면 빨리 흐르고, 몰입하지 않으면 천천히 흐른다.
결론은 간단하다. '그때 거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충실할 때 풍부하게 느끼면서 살 수 있다는 것. '정말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에 투자하느라 헛된 욕심을 갖지 말고 현재에서 성취감을 찾으라'(262쪽)고 조언한다. 아침 샤워를 할 때 그날 일정을 생각하지 말고 샤워에만 집중해 온기와 상쾌함을 느껴보는 것도 작은 실천이다.
당신이 지금 40대라면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고 느낄 나이다. 50대가 되면 더 빠르게 느껴진다. 물론 시간의 물리적 흐름은 언제나 일정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점점 더 빠르게 흐른다는 느낌은 강해진다. 유년기의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차를 타고 할머니집에 갈 때마다 “아직도 멀었느냐?”고 걸핏하면 묻는다. 예컨대 당신이 20대였을 때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고향에 가면서 느꼈던 지루함은 30대가 되면서 점차 줄어든다. 그러다가 40대가 되면서부터는 그야말로 ‘후딱 지나가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감각적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시간의 흐름은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 스티브 메일리는 현재 영국 맨체스터 대학 심리학과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한때 록그룹 연주자로 활동하던 때의 경험을 책머리에서 털어놓고 있다. 그는 15년 전 독일로 공연을 갔다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져 아예 살림을 차렸던 모양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불과 한두 해 지난 시절이었다. 처음 몇 달간은 꿈속에 사는 것처럼 행복했다고 한다. 왜 아니 그랬겠는가.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노상 함께 있었을 뿐 아니라, 과거의 동독 지역은 저자에게 낯선 땅이어서 신선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길게 느껴졌을 수밖에. 저자는 8개월 후 맨체스터 공항으로 돌아왔을 때 느낀 당혹감을 이렇게 털어놓는다. “여길 떠난 지 고작 8개월밖에 되지 않았다니! 내겐 마치 8년처럼 긴 시간이었는데.” 하지만 모든 것은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였다. “가게도 전부 그대로였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도 다 그대로였다. 친구들도 여전히 똑같은 일을 하면서 똑같은 집에 살고 있었다.”
이렇듯 시간의 속도는 달라진다. 나이가 들수록 빨리 흐르고, 새로운 경험을 하면 길게 늘어난다. 위급한 상황에 처했거나 환각상태에 있을 때, 혹은 완전히 몰입한 운동선수나 예술가들에게도 시간은 천천히 흘러간다. 심지어는 완전히 멈춰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왜 그럴까.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 집중한다. 저자는 “시간에 대한 다양한 인식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요인이 사람에 따라 다르게 작용하면서 나타난 결과”라고 말한다. 그는 그것을 “제2의 시간”이라고 명명하면서 “개개인이 시간의 흐름을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는 요인들은 외부 요소가 아닌 내면에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저자가 개념짓는 “제2의 시간”은 심리학적 시간이다. 책에 따르자면 그것은 다섯가지 법칙으로 작동한다. ① 나이가 들수록 빨리 흐른다. ② 새로운 경험과 환경에 놓이면 천천히 흐른다. ③ 몰입하면 빨리 흐른다. ④ 몰입하지 못하면 천천히 흐른다. ⑤ ‘의식하는 정신’ 또는 평소의 자아가 사라지면 시간은 천천히 흐르거나 아예 멈춘다.
저자는 시간의 흐름이 그처럼 달라지는 이유에 대해 심리학과 인류학, 때로는 철학과 문학 등을 오가며 밝히고 있다. 그 중의 하나. 나이가 들수록 시간의 흐름이 빨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19세기 철학자 폴 자네와 역시 비슷한 시기에 활약했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설명한다. 폴 자네가 1877년에 처음으로 제기했던 주장은 “나이가 들수록 일정 기간이 전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들면서 시간의 속도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그것을 이렇게 보완한다.
“한 사람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느끼는 일정 시간의 길이는 인생 자체의 총 길이에 따라 변한다. 10살 아이에게 1년은 살아온 삶의 10분의 1이고, 50세의 남자에게는 50분의 1이다. 만약 태어난 지 1개월밖에 안된 아이라면 일주일이 무려 살아온 삶의 4분의 1에 해당하므로 그 일주일이 영원히 계속되는 시간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의 흐름이 달리 느껴지는 이유를 밝히려는 것이 이 책의 의도로 보이진 않는다. 책의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시간의 주인으로 사는 법”이다. “당신은 왜 시간이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라”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의 변화”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시간은 우리의 인식에 따라 천천히 흐를 수도 있고 아예 초월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 대부분은 시간을 늘리기보다는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고 바라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밝힌 다섯가지 법칙 가운데 우리의 삶에서 요긴한 것으로 두번째 법칙(새로운 경험)과 다섯번째 법칙(자아 초월)의 실천을 권한다. 다시 말해 “현재의 상황에 익숙해져 무감각화 메커니즘이 작동하려 할 때마다 새로운 환경과 경험을 찾는 것”이 중요하며, “논리적이고 실용적인 사고가 필요할 때만 ‘자아’라는 외투를 꺼내 입고 그렇지 않을 때는 잠시 벗어두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두번째 말은 긴장을 벗어던지고 휴식을 취하라는 뜻으로 들린다. 우리의 ‘팽팽한 자아’는 언제나 미래를 걱정하기 때문에, 시간이 빨리 흘러가도록 재촉하는 감각적 촉매제로 작용한다는 얘기다.
어떤 독자는 말미로 갈수록 짙어지는 명상과 힐링(치유)의 냄새가 좀 불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당신의 태도 여하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그래서 “온전히 현재에 집중하는 삶이야말로 시간을 지배하는 방법”이라는 저자의 결론은 충분히 동의할 만하다. 학술적 저작과 논문들을 빈번히 인용하고 있지만 매우 대중적으로 쓰여진 책이어서 비교적 쉽게 읽힌다.
제2의 시간 |
때 밀 땐 때만 생각해라, 삶이 풍부해질 테니
시간에 속박되지 않고 주인으로 사는 법
시간의 속도는 왜 그때 그때 다를까 …시간의 주인으로 사는 법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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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제삿날. 제상 차리기가 한창인데 막내며느리가 제상 위의 배를 하나 치마폭에 감추다 큰동서에게 들켰다. 남편이 대신 형수에게 용서를 구하고 나서 아내에게 물었다. "왜?" "먹고 싶어서." 그러자 남편은 손수 배를 깎아줬다.
요즘 웬만한 애처가 뺨칠 이 일화의 주인공 남편은 퇴계 이황(1501~1570)이다. 경북 안동 지방에서 전해오는 이 일화의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배 버전' 말고 '대추 버전'도 전해지는 걸 보면 퇴계의 인품에 대한 당시 안동 지방 사람들의 존경이 어느 정도였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안동 한국국학진흥원 김병일 원장이 쓴 '퇴계처럼'은 어려운 학문적 이론은 싹 걷어내고 쉬운 문체로 '인간 퇴계' '리더 퇴계'를 집중 조명한다.
퇴계는 자연인으로서는 불행했다. 아버지는 생후 7개월 만에 돌아가셨고, 집안은 가난했다. 아들 둘을 낳았으나 첫 부인은 둘째를 낳고 곧 세상을 떠났고, 삼년상을 치른 후 맞은 둘째 부인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다. 앞의 일화에 등장하는 권씨 부인이다. 문상(問喪) 가는 퇴계가 도포 자락이 헤졌다고 하자 부인 권씨는 붉은 천을 덧대 꿰맸다.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불호령 대신 태연히 그 도포 입고 문상 다녀온 이가 퇴계였다. 그라고 왜 불만이 없었겠는가.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제자에게 보낸 편지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두 번 장가를 들었지만 내내 불행했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해 결코 마음을 박하게 먹지 않고 노력해온 것이 거의 수십 년이다." 퇴계는 둘째 부인의 부모뿐 아니라 첫 부인의 부모까지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수신(修身)하고 제가(齊家)한 그는 요즘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었다. 중국의 여씨향약을 모델로 지역의 규율을 정한 '예안향약'을 가장 먼저 만들었을 뿐 아니라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세금을 내는 납세자였다. 둘째 아들이 결혼 직후 사망한 후에는 며느리를 개가(改嫁)하도록 했다.
늘그막 퇴계의 가장 큰 낙은 증손자를 본 것이었다. 1568년 만 67세 되던 해 증손자를 보자 퇴계는 "우리 집 경사 중에서 이보다 더할 경사는 없다"며 좋아했다. 그러나 손자며느리의 젖이 부족해 증손자는 영양실조 증세를 보였다. 손자는 막 아기를 낳은 여종을 보내달라고 했다. 퇴계는 "내 자식 살리자고 남의 자식 죽일 수 없다"고 했다. 여종을 유모로 보내면 그 자식이 젖을 굶게 된다며 보내지 않았다. 애지중지하던 증손자는 결국 두 돌을 갓 넘기고 죽었다. 손자가 원망했을 법도 하다. 그렇지만 퇴계는 편지를 보내 위로하면서도 "너라면 어떻게 처리했겠느냐?"라고 묻는다.
퇴계가 집안 자제와 제자들에게 강조한 말은 '일체경지(一切敬之)',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퇴계의 70평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퇴계처럼 |
사람을 섬겨라, 퇴계가 그랬듯…
퇴계는 영양실조 증손자에 乳母를 보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퇴계의 리더십은 모성애가 낳았다
"군자의 道는 부부에게서 시작된다"…퇴계 선생의 `섬김 리더십`
퇴계는 아내-며느리에게 어떻게 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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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1일 토요일. 낮 1시30분쯤 거리 쪽에서 군중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거리를 가득 메운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종로 광장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우리의 눈에 들어왔다. 이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3·1운동을 바라본 윤치호(1865~1945)의 심정이 담긴 일기다. 1세대 미국 유학생이자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독립협회 회장을 지낸 개화·자강운동의 핵심인물, YMCA의 지도자이자 기독교계 원로,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파의 ‘대부’가 된 그를 바라보는 심경은 복잡하다.
그는 1883년부터 1943년까지 60년 동안 방대한 분량의 일기를 남겼다. 대부분 영어로 쓰여졌으며, 특히 한일합방 이후(1919~43)의 일기는 당대를 이해하는 주요한 사료라 할 만하다. 그는 자본과 기술을 투자해 조선을 근대화시킨다는 일제의 선전이 허구이며 ‘일본의,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발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1차 대전 이후 세계 정세를 ‘정의’와 ‘인도’로 생각하며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 독립을 요구하자는 낭만적인 주장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시한 현실주의자였다. 당초 외교운동 차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을 반대한 것은 당연했다. 조선인의 ‘도덕적 독립’이 전제되지 않는 한 ‘정치적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그가 자주 썼던 말은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였다. 윤치호 일기를 발췌·번역해 정리한 책으로, 2001년 나온 초판을 개정해 내놓았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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