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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새로 나온 책

2012년 12월 4주 새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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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강국인 미국 사람은 유독 '영웅 만들기'에 적극적이다. 보통 사람일지라도 어떤 극적인 한 순간을 거치면 일약 영웅으로 떠받들어 진다. '하룻밤 자고 나니 세상이 달라지는 사람'을 끝없이 만들어 내고 환호한다. 그들에게 영웅이 되는 일은 국익을 위해 소신을 지킨 정치인, 올림픽 4관왕, 미모의 영화배우, 전장의 이등병은 물론 자기를 헌신하는 소방대원, 철로의 아이를 구한 대학생, 목숨을 걸고 강도를 제압한 시민에게까지 기회 또한 균등하다. 그리고 은근히 그러한 자기들을 과시하고, 자부심을 갖는다.

그런데 우리는 영웅 만들기에 참 인색하다. 사돈이 논을 사면 배 아파한다. 개인의 경쟁력은 대단한데 넷만 보이면 사색당파로 갈린다. 그래서 우리는 영웅이 나올 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에게 '이순신 장군' 빼고는 진정 영웅이 없더란 말인가. 우리 스스로 그렇게 치부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영웅'이 나왔나 보다. 30년 넘게 기자로 일할 때부터 우리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창년조씨중앙화수회' 조강환 회장의 신서 <세계사에 빛나는 한국인 영웅>을 읽으면 그런 말이 전혀 터무니 없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일제가 조선을 의도적으로 깔보기 위해 세뇌정책으로 들고 나온 것 중 하나가 한반도의 모양이 대륙에 간당간당 붙어사는 연약한 토끼라는 것이었다. 생각 있는 조선 학자가 앞 발톱을 높이 치켜들고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로 이를 대체했다. 그런데 반도의 사람은 역사학자의 모양새 해석으로만 그친 종이호랑이가 아니라 실제로 대륙을 호령했던 실존의 호랑이였다.

고려의 개혁과 부흥을 주도했던 글로벌 군주 충선왕은 세계 제국 원나라 쿠빌라이의 외손자였다. 기황후는 고려 행주 사람 기자오의 막내딸로 원나라에 궁녀로 끌려가 끝내는 원나라를 떡 주무르듯이 통치했다. 고구려 후손으로 북위의 황후가 된 고영과 북연의 황제가 된 고운, 임진왜란 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왔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10전 10승의 조선 출신 명나라 대장군 이성량의 아들이었다.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7대조 역시 신라사람 김함보였다.

흔히 알려진 우리의 영웅 광개토대왕, 정복자 고선지, 해상왕 장보고,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를 당연히 포함해 제왕, 무인, 문화, 종교의 33인 혜성들을 각각 8-10페이지에 걸쳐 '영웅'의 시각으로 새롭게 조명했다. 읽다가 유독 필이 꽂히는 영웅에 대해 더 탐독해 보고 싶을 것에 대비한 참고서적 정보제공에도 친절하다

영웅
조강환 지음/다할미디어

우리나라 위인은 이순신밖에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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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블랑쇼(1907~2003)는 사르트르, 카뮈와 동시대 프랑스 지식인이며 20세기 현대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 후기구조주의자에서 낭시, 라쿠, 아감벤 등 최근 유명세를 타는 사상가에게는 하나의 준거점이다.

<카오스의 글쓰기>는 블랑쇼 후기 사유를 집대성한 대표작으로 2009년 <기다림 망각>을 시작으로 블랑쇼의 대표저서를 묶은 '블랑쇼 선집' 8번째 책이다. 국내에서는 이번에 처음 번역됐다. 역자인 박준상 숭실대 교수는 "삶의 직접적인 문제들을 시적, 문학적으로 쓰는 독특한 저자"라며 "이 책은 후기 사유를 단상형식으로 그렸다"고 소개했다.

제목이 이 책의 주제를 집약하고 있다. 블랑쇼가 말하는 카오스는 '실재'(Real)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실재'는 정신분석학자 라캉이 제시한 용어인데,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레오가 빨간 약을 먹고 살게 된 '실재의 사막'처럼 체험이나 상상을 통해 재구성되지 않은 진짜 현실을 일컫는다. 블랑쇼 저작에 자주 등장하는 '중성적인 것' '바깥' '끝나지 않는 것' '침묵' 등도 이 개념의 연장선에 있다. 그 실재를 발견하는 순간은 바로 타자와 소통하는 언어, 글쓰기를 통해 구현된다는 것이 블랑쇼의 주장이다.

헤겔은 인간 정신(진리)이 미리 주어지고 완성된 선험적 구조가 아니라 자연(정)과 개인(반)의 투쟁 속에 지양되는 것(합)이라고 봤다. 변증법에서 인간 정신이 지양되며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하는 바로 그 순간이'실재의 순간'이다. '정신은 단 한 번에 또는 미리 완성되어 진리의 실체적 토대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으며, 시간성에 따라, 헤겔의 표현대로 '역사성'에 따라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담론, 즉 언어야말로 미리 주어진 단일한 형식의 세계, 즉 자연을 '살해하는' 동시에 새로운 공간으로 인간을 끊임없이 이주시킨다.

이 책은 이런 근현대 사상의 흐름 안에서 정신분석학자 세르주 르크레르의 저작 <사람들은 한 어린아이를 살해한다>와 나르시시즘의 어원이 된 그리스의 나르시스 신화를 재해석한다. 르크레르의 저서 속 '한 어린아이'는 '존재와 우리 삶이 어떤 언어, 담론으로 수렴되거나 종속되지 않고, 어떤 언어, 담론을 통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요컨대 이 어린아이는 자연 상태로서의 존재, 언어를 통해 사회화되지 않은 존재다. 인간정신은 개인 안에 숨어있는 저 길들여지지 않은 어린아이를 끊임없이 살해하며, 지양된다. 아이는 끊임없이 죽으면서 또 죽지 않는다.

저자는 우물에 비친 나르시스를 이 어린아이에 비유한다. 나르시스가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듯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르시스가 우물 속 자신에게 외치는 메아리가 침묵으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어린아이의 죽음, 실재의 순간 역시 침묵으로만 드러난다.

블랑쇼는 '타자성의 철학'을 설파한 철학자 레비나스와 만난 뒤 쓴 이 책에서 이런 실재의 순간은 타자와의 매개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한다. '삶 자체가 흔들리고 위태로워지고 나아가 파탄에 이를 때, 그 어린아이가 이제 '나'를 대신해 '말하기' 시작한다.'

책은 동시대의 저작을 재해석하는 일기식의 단문으로 이어진다. 블랑쇼 특유의 시적이고 감각적인 문장, 문학과 철학의 경계에 선 자유분방한 글쓰기는 기승전결의 논리구조 없이 이 책을 한 권의 시집처럼 읽도록 만든다. 문장이 눈부시다.

카오스의 글쓰기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그린비

진짜 현실은 소통의 글쓰기로 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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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사의 흥미로운 지식을 모아 <세상의 모든 지식>을 펴냈던 저자가 이번에는 한국사의 뒷이야기를 모았다. 출판사 대표이자 독서광인 저자는 "세상에 절대 진리는 없다"며 우리가 진리로 믿는 구성된 현실 뒤의 숨겨진 반전에 주목한다. 모내기 농법 도입의 정치경제학적 배경,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화성성역의궤의 비밀, 교사로 기억되는 알렌의 사업가적 면모,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한글 간소화 정책을 밀어붙였던 이유, 희대의 살인마로 기록됐던 '무등산 타잔' 박흥숙의 최후 진술 등 당연시 여겼던 한국사를 새롭게 돌아보게 하는 다채로운 내용을 담았다. 에피소드별로 삽입된 관련 기록사진이나 당시 저작물 등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출판사 대표이자 열혈 독서광이기도 한 저자 김흥식이 벼려낸 아주 특별한 지식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으로 많은 독자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던 저자가 새롭게 선보이는 『세상의 모든 지식―한국편』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인이 『성찰하는 삶』을 살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지식을 담았다. 특히 왜곡된 사실이 참으로 둔갑해온 역사, 지성의 탈을 쓴 독선과 야만의 폭력 등 우리 지성의 한계를 깨주는 흥미롭고 재미있는 지식이 가득하다. 깊고 넓은 지식을 다루는 저자의 날카롭지만 따뜻한 해석이 돋보이며, 무엇보다도 재치 있는 글쓰기로 인해 무척 재미있다!

모내기라는 혁명적인 농사기법을 둘러싼 정치경제학, 세계에서 유일하게 복제품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가능하게 한 《화성성역의궤》의 비밀, 세계 표준시를 둘러싼 제국주의의 힘의 논리, 독자적인 달력을 만들어 시간을 장악하고자 했던 세종의 또 하나의 업적, 이승만의 한글 간소화 정책에 스며 있는 독재자의 논리, 우리가 선교사로 기억하는 『알렌』의 사업가적 면모와 운산금광의 비극, 100년 전의 열광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판소리』 소멸의 불가사의, 아홉 번 장원급제를 했던 조선 최고의 천재 율곡 이이를 통해 본 『인간의 길』, 희대의 살인마로 기록된 『무등산 타잔』 박흥숙의 최후 진술, 망국의 왕자였던 의친왕과 영친왕이 선택했던 서로 다른 두 개의 길, 대표적인 사법살인의 희생양 조용수와 조봉암, 1931년 을밀대 고공 농성의 주인공 강주룡의 불꽃같은 삶… 등 우리가 미처 몰랐던 사실을 대하고 보면, 이러한 지식이 비단 과거 역사 속의 지식이 아니라 오늘날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울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리 후손들에게 어떤 삶과 세상을 물려주어야 할지 스스로 성찰해보는 소중한 경험을 제공해준다. 『진짜 앎』이란 바로 이런 성찰과 깨달음에 이르게 해주는 앎이 아닐까?

한국의 모든 지식
김흥식 지음/서해문집

당연시했던 한국사 뒷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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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세계문학'의 잣대가 된 유럽, 미국 소설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세계문학' 목록이 조선의 지식인사회에 퍼지고 이것이 해방 후 중역, 출판되면서 일반에 보급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책은 이렇게 서구 문학이 세계문학으로 '둔갑'하는 과정, 세계문학을 필독서로 읽었던 식민지 조선 지식인 사회를 흥미롭게 추적한다.

수많은 사람이 세계문학전집을 책장에 모셔둔다. 사들인 지 몇 해가 지나도록 한 번도 펼쳐보지 않고 말이다.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어떤 이유에서 이런 책을 읽어왔고, 소장하기 시작한 걸까. <속물 교양의 탄생>은 이른바 명작으로 불리는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계보학적 보고서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도덕의 근원을 파헤쳐 전통 도덕관념에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했다면, 지은이는 세계문학이 명작으로 둔갑해 필독서로 읽히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명작 이면에 숨은 속물적 욕망을 들춰낸다.

책이 주목하는 시기는 일제강점기다. 사람이 전집으로 유통되는 명작을 문명의 표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때다. ‘명작을 얼마만큼 소장하고 있는가’가 교양의 정도를 가늠하는 잣대로 등장하면서, 책을 읽었는지 아닌지 하는 실제적 독서행위가 아니라, 명작을 소장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해졌다. 호화 양장본과 유럽풍의 서재가 상류층의 계급적 기호로 떠오르고, 명작이 전시·과시용으로 소비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속물 교양’의 시대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지금도 필독서로 세계문학전집을 꼽고, 교양의 증서로 책장을 장식하는 가식은 계속된다. 이 책은 좋은 책이 자본주의적 관계 안에서 어떻게 왜곡되는지 그 과정을 쫓는다. 물론 그 과정에는 무엇이 명작이고, 명작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따라온다는 사실도 기억하기를.

속물 교양의 탄생
박숙자 지음/푸른역사

왜 식민지 조선 지식인은 세계문학 필독했나
먼지쌓인 ‘세계문학전집’ 뒤 ‘속물의 계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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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평가절하된 조선의 역사를 문화사적으로 재정립한 책.저자는 시대에 따라 전개되는 조선왕조의 역동적인 자기 극복 모습을 단계적으로 밝혀낸다.일제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사대주의론,당파성론,문화적 비독창성론 등의 허구성을 짚고 있다. "조선은 우리 역사상 가장 인간다운 삶을 성취한 시대였다.현대 물질주의 사회와 정반대의 가치를 추구한 사회였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일제에 의해 가장 심하게 평가 절하된 조선의 역사를 문화사적으로 재정립한 것이다. 사회와 학계에 만연한 식민사관을 ‘문화사관’으로 걷어내고 도덕과 자존, 평화를 지향하는 문치주의 전통을 찾아내어 조선시대가 지식에 기반을 둔 문화국가임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맑음의 정신으로 규정할 수 있는 조선시대 선비의 삶과 선비정신을 재조명했으며, 조선후기 문화 중심국으로서의 역사적 경험과 그 이론적 근거였던 조선중화사상을 통해 상호 투쟁하는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변방의식을 탈피하기 위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했다. 또한 조선말기 양반 사대부의 퇴조에 따라 새로운 사회 세력이자 문화집단으로 성장한 중인계층의 독특한 문화를 탐구하고, 소개했다.

시대에 따라 전개되는 조선왕조의 역동적인 자기 극복 모습을 단계적으로 밝혀냄으로써, 일제 식민사학의 정체성론, 사대주의론, 당파성론, 문화적 비독창성론 등의 허구성을 밝혔으며, 나아가 지식기반 문화대국 조선의 전통이 새로운 시대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했다.

한국의 대표적 역사학자인 정옥자 교수는 역사를 연구하는 목적이 우리의 뿌리를 밝히는 작업으로서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를 비춰 보는 거울로서 앞으로 다가오는 지식기반 사회에서 이 같은 역사적 경험이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 책은 다가오는 미래에 또 하나의 문화대국을 이룩해야 한다는 꿈을 담은 희망의 메시지다.

지식기반 문화대국 조선
정옥자 지음/돌베개

지식기반 문화대국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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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을 즈음해, 경주의 한 우체부는 토함산을 넘어 우편배달을 가다가 우연히 폐허 상태의 유적을 발견한다. 흙더미 속에 파묻혀 있었던 이 유적은 바로 오늘날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석굴암’이었다. 나비 표본을 찾아 캄보디아의 정글로 들어갔다가 ‘앙코르 와트’를 발견하게 됐다는 프랑스인 앙리 무오를 연상시킬 만큼 극적인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허구에 가깝다. 물론 석굴암은 조선시대에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13세기 <삼국유사>에 언급된 후 17세기에 몇몇 기행문과 시가 나오기까지 약 400년간 석굴암과 관련된 기록은 전무했다. 하지만 석굴암은 조성된 이래 항상 토함산에 있었고, 폐굴이 되었던 것도, 밀림에 묻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조선시대 적지 않은 선비들이 석굴암을 다녀갔다. 다만 ‘문화재’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석굴암이 지금처럼 조선을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관광명소로 자리잡게 된 것은 일제의 영향이 컸다. 일제는 1913년부터 3년간 석굴암을 완전 해체·복원하고,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다.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가 그랬듯, 석굴암도 제국주의의 ‘발견’에 의해 식민지를 ‘대표’하는 상징이 됐다. 1930년대에 들면 우리 스스로도 “영국이 인도를 버릴지언정 셰익스피어를 버리지 못하겠다고 했는데, 우리에게 무엇보다 귀중한 보물은 석굴암 불상”(우현 고유섭)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석굴암 ‘붐’이 일어난다.

석굴암을 불우한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대조되는 ‘과거의 영화’로 내세우고, 일본의 기술로 발견·수리·복원했다며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홍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일제는 서구에 맞서 자신들을 ‘동양’의 중심으로, 고대 인도와 중국에서 전해진 불교·유교·예술을 모두 소유하고 보존한 ‘아시아 문명의 보고’로 자리매김시키려 애썼다. 일본에서 꽃피운 문화의 중간과정인 ‘석굴암’의 훌륭함을 증명할수록 일본 문화 또한 훌륭해지는 것이다.

중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그리스-간다라-통일신라’의 불상 전파 경로는 이런 일본인들의 역사인식에서 나온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다. 일제는 ‘석굴암’의 본래 명칭이 ‘석불사’임을 알고도 ‘석굴’을 강조하면서 ‘대일본제국의 자랑’이라 홍보했다. 석굴암은 ‘인조 석굴’로서, 암벽을 파고들어간 인도 석굴의 양식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인도의 ‘석굴사원’과의 친연성을 강조한 것은, 일본이 불교미술의 정수를 계승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석굴암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다시 두 차례, 1960년대에 한 차례 보수·복원공사를 거친 것이다. 석굴암뿐만 아니라 일제가 보수·복원한 분황사 모전석탑이나 심지어 불국사까지도 실제 원형 그대로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내세우는 ‘한국의 미’가 사실상 일제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책이 제시하는 ‘지식의 고고학’을 따라가다 보면 과연 어디까지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인식인지, 씁쓸해진다.

나라의 정화 조선의 표상
강희정 지음/서강대학교출판부

제국주의가 발견해 식민지 상징이 된 ‘석굴암’…씁쓸한 지식의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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