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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새로 나온 책

2013년 5월 5주 새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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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역사가 200년밖에 안 된 발명품이다. 행복이 애초 인간의 본성과는 무관한 '텅 빈 개념'이라는 이 책의 주장은 사뭇 충격적이다. 그렇다면 아침 방송에 단골로 등장하는 행복 전도사들과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베스트셀러는 다 뭐란 말인가. 저자는 "행복은 좀처럼 얻기 어렵고 지속하기도 매우 힘들다"면서 "우리는 너나없이 '행복 스트레스'에 갇혀 있다"고 썼다. 이 책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행복, 그 강박관념에 대한 탐구다.

플라톤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것에 빠져 있을 때 이데아를 내세우며 정의를 주장했고, 니체는 서양 사회가 신(神) 중심의 사고에 갇혀 있을 때 신의 죽음을 선언했다. 저자 탁석산은 철학자로서 이 시대의 화두이자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행복에 대해 의심하고 회의한다. 행복에 대한 스캔들을 들추는 셈이니 이만큼 강력한 소재도 드물다.

영어 'happiness'의 본뜻은 '행운'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영국 철학자이자 법학자 제러미 벤담이 1789년 저서에서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주장하면서 행복을 쾌락과 같은 의미로 처음 사용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바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아시아에서 행복은 1860년대 이후, 일본에서 처음 쓰였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고 번역하면서 '행(幸)'과 '복(福)'을 합성해 빚어진 일이다. 일본어에 'happiness'나 불어의 'bonheur'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1886년 10월 4일자 한성주보(漢城週報)에 '행복'이란 낱말이 처음 등장했다.

300년 전에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신의 은총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현대인은 누구나 노력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쉽게 믿는다. "이제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은 인간"(알랭 드 보통)이다. 행복은 그렇게 신을 대체하며 '세속종교'가 되었다.

저자는 "지금 행복과 불행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것은 개인주의"라고 진단한다. 신과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개인은 고독해졌다. 반면, 모두가 평등한 민주주의 시대는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렀다. 행복하고자 하는 마음과 실제로 행복하지 않은 현실 사이의 괴리를 행복이라는 추상명사가 메워주는 셈이다. 고립에서 벗어나려고 카카오톡과 페이스북을 하지만 외롭다는 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행복은 삶을 왜곡한다. 영국 문화사학자 리처드 스코시는 "자기 계발서의 연간 매출액은 10억달러이며 항우울제 시장이 170억달러에 육박할 만큼 행복은 유망 성장산업"이라고 말했다. 행복은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는 감기약이나 소화제 취급을 받고 있다. 이 책은 "역설적이지만 방송과 책으로 나오는 '행복 상인' '범람하는 멘토'는 행복 스트레스의 방증"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개인과 사회의 이분법으로는 행복을 찾기 어렵다"면서 대안으로 '3분의 1 원칙'을 내놓는다. "행복의 구성단위는 개인(나), 이웃(가까운 사람), 사회(어려운 사람)다. 어떤 일이 좋은 일이 되려면 자신, 가까운 사람, 어려운 사람이 골고루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의 마음 닦기를 강조하는 숱한 자기 계발서와 달리 이 책은 개인에게는 수행을, 가까운 사람에게는 예의를, 사회에는 평등과 공동의 부(富)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행복은 어떻게 현대의 신화가 되었나'라는 부제를 달았다. 행복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행복이라는 거짓말'에 속아본 독자일수록 책장이 빨리 넘어간다. "행복과 불행은 한 묶음이다. 불행이 없다면 행복도 없다. 행복이라는 개념에서 떠나면 불행에서도 동시에 떠날 수 있다"는 말에 수긍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타인의 인정을 받을 만한 업적이나 성취를 행복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수록 행복감을 느끼기 어려워진다"(서은국 연세대 교수)는 진단도 참고할 만하다. '행복하세요'라는 말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알겠다. 대신 이렇게 말하자. '행운을 빕니다.'

행복 스트레스
탁석산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 그건 200년 된 착각
행복은 사회의 문제… 왜 마음의 문제로 축소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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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소설가를 체험하는 작가와 상상하는 작가의 두 부류로 나눌 때, 헤밍웨이(1899~1961)는 전자를 가장 적확하게 대표하는 작가다. 진실로 쓰기 위해 그는 전쟁의 포염도 마다지 않았고, 신문기자의 직을 빌어서나마 늘 사건의 현장에 있고자 했다. 그래서 이 투신의 작가는 대표작 <무기여 잘 있거라>의 주인공 프레데릭의 입을 빌어 '나는 생각하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다. 나는 먹고 마시고 캐더린과 자도록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모험에의 충동으로 평생을 일관했던 헤밍웨이가 스페인의 투우에 열광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1932년 출간된 <오후의 죽음>은 오로지 투우를 보고 싶어 스페인으로 간 헤밍웨이가 투우에 관해 쓴 논픽션 다큐멘터리 같은 책이다. 깨알 같은 정보와 묘사로 가득찬 투우 안내서ㆍ개론서이자 헤밍웨이의 사상을 담고 있는 철학 에세이인 동시에 글쓰기에 관한 그의 창작론이기도 하다.

1차대전 참전으로 부상을 입었던 헤밍웨이를 스페인-주로 마드리드-의 투우장으로 홀린 것은 죽음을 관찰하려는 욕구였다. 책에서 그는 고백한다. "전쟁이 끝난 뒤인지라 삶과 죽음, 다시 말하면 격렬한 죽음을 볼 수 있는 곳은 오로지 투우장뿐이었고, 나는 그것을 잘 살필 수 있는 스페인에 몹시 가고 싶었다. 나는 글을 쓰는 법을 배우려고 하였고, 그것을 가장 단순한 사물로부터 시작하려고 했다. 그리고 모든 사물 중에서 가장 단순하고 가장 기본적인 것의 하나는 격렬한 죽음이다."죽음은 도처에 편재했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감지 않고' 살펴볼 수 있는 죽음은 투우 외엔 없었다. 헤밍웨이에게 투우란 죽음을 탐구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죽음에 최대한 가까이 가보는 것, 즉 '죽음을 다루는 예술'이었다.

그러므로 헤밍웨이에게 투우는 글쓰기의 메타포가 된다. 물레타(붉은 천)를 휘두르며 소의 뿔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자발적으로 척살의 위험을 빚어내는 마타도르(투우사)는 절박한 위험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위엄을 유지하며 진실에 육박할 수 있을까 되묻는 거울 이미지인 것이다.

1960년대 헤밍웨이 전집에 묶였다가 종적을 감춘 책을 고 장왕록 서울대 영문과 교수의 번역본으로 새롭게 펴냈다.

오후의 죽음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장왕록 옮김/책미래

"격렬한 죽음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 헤밍웨이의 투우장 철학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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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에 몰린 것 같은 북한이 중국에 특사를 보내 이미 시효가 지났다고 여겨진 ‘6자회담’을 부활시키려 한다. 몇 달간 핵무기와 미사일로 긴장 국면을 만들다가 남한이 아닌 중국, 미국과 관계를 회복하려는 전술은 어디에서 나올까.

하버드대 협상연구소의 대니얼 샤피로와 로저 피셔가 쓴《원하는 것이 있다면 감정을 흔들어라》는 북한의 협상 전략을 분석한 책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테러리스트에 가까운 협상 전략을 구사하는북한이 혹시 상대의 마음을 잡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까지 들게 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북한의 협상 전략이 비록 ‘부정적인 감정’을 이용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상대의 마음을 흔드는 대표적인 사례처럼 보인다.

상대로부터 긍정적인 감정을 끌어내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끈 사례로는 캠프 데이비드 협상을 들 수 있다. 카터 전 미국 대통령(사진)은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평화 협상을 위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을 캠프 데이비드로 초대했다. 그러나 둘 간의 평화 협상은 13일 동안 제자리였다. 카터는 상대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이스라엘 총리의 손자들이 카터 대통령의 사인을 받고 싶어한다는 걸 알게 됐다. 카터는 즉시 자신의 사진에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쓴 후 친필 사인을 해서 베긴 총리에게 전달했다. 이른바 ‘세기의 협상’이라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된 배경에는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고 적국에 피해를 주어야 한다는 논리적 판단이 아니라 협상 당사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전략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북한은 남북, 북·미, 북·중 간의 수많은 협상에서 ‘벼랑끝 전술’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많이도 가져갔다. 거의 테러리스트 수준으로 상대방을 압박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 있는 것이다. 때론 이런 인식이 북한과의 협상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어차피 북한은 그런 식이라는 통념은 북한의 협상 형태를 무시하게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상대를 인정하라.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상대의 견해를 이해하고, 상대와 나의 생각, 느낌, 행동에서 장점을 찾아야 한다. 서로의 말과 행동을 통해 이해하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상대가 느끼는 주저함이나 거부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 책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말하는 메시지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상대의 감정을 움직이는 협상의 핵심은 간단하다. ‘상대에 대한 인정’ ‘친밀감의 강화’ ‘결정을 내릴 자율성의 존중’ ‘지위 경쟁의 금지’ ‘성취감을 주는 역할 수행’이다.

이런 원칙을 남북한의 협상에 적용해 보자. 남북한의 협상에서 서로 상대를 인정하고, 친밀감을 강화하려 노력하며, 협상 관계자들은 결정을 내릴 자율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가. 상대방의 지위를 충분히 인정하는가. 협상이 성취감을 주는 역할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다 보면 왜 남북 협상에 소모적이며 부정적인 감정만이 남는지 알 수 있다. 감정은 흔들었지만 서로 얻는 것이 없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감정을 흔들어라
다니엘 샤피로.로저 피셔 지음, 이진원 옮김/한국경제신문

카터가 친필사인 한 장으로 협상 성공 시킨 비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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