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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새로 나온 책

2014년 10월 2주 새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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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TV도 냉장도고 아닌 삼성 그 자체에 대한 '사용설명서'가 나왔다. '삼성사용설명서'? 무려 7가지 방식이다. 각 방식을 제안한 사람들은 국내 유명 경제학자들이다. 어느 하나의 '삼성사용설명서'를 택한다는 건 삼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삼성을 이해한다는 건 우리나라만 사용하는 '재벌'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그 단어가 내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궁극적으로 한국 경제정책의 문제로 이어진다.

장하준 교수는 "삼성이니 여기까지 왔다. 삼성을 잘 써먹자. 정부와 삼성은 조금씩 양보해라"는 주장으로 익히 알려졌다. 김상조 교수는 "무슨 소리, 삼성 즉 재벌로 집중된 대한민국 경제가 위험이고 성장을 가로막는다"며 개혁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의견을 중심에 놓더라도 여기서도 조금씩 스펙트럼이 나뉜다.

저자는 이처럼 '삼성사용설명서'를 쓴 경제학자 30여명을 '가장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나열한다. 그리고 이중 대표 7인을 선정해 그들의 주장을 풀어줬다.

저 자는 김성구 교수를 가장 왼쪽에, 김정호 교수를 가장 오른쪽에 뒀다. '김성구-김상봉-장하준-이병천-김상조-장하성-김정호' 식의 순서다. 저자 본인이 정한 '왼쪽부터 오른쪽' 순서를 정치적 좌·우편향으로 직접 이해해선 곤란하다. 물론 그런 좌우정치의 물적토대로 (재벌) 경제정책을 본다면 아주 틀리진 않겠지만 어쨌든 저자는 '국가와 사회의 시장개입 정도를 어느 정도 요구할거냐 또는 시장의 자유를 어느 수준까지 허용하느냐'의 척도로 이해해달라는 전제를 붙인다. 기업의 이익에 대한 배분, 국민경제에 대한 관점의 차이 등도 반영돼 있다.

그렇게 보니 좌우라고 해도 재벌에 대한 여러 시선은 일직선에 놓여있지 않다. 앞서 예로 든 장하준 교수와 김상조 교수는 주주를 중심으로 한 접근법에선 일맥상통하나 장하준 교수가 재벌시스템이 주주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김상조 교수는 소액주주(기관투자가 포함)의 역할을 더 강조하는 차이가 있다. 김상조 교수의 주장이 기업 총수의 전횡에 맞서야 하는 논리로 이어지는 이유다.

이병천 교수는 장하준 교수의 주주자본주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재벌시스템이 신자유주의와 결탁해 문제가 심각하다는 차이를 보인다. 이 교수는 재벌은 주주가치 따위엔 관심이 없다며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저 자가 가장 왼쪽에 둔 김성구 교수는 국가가 자본에 종속돼 있으니 재벌을 통제해야 사회개혁이 된다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그가 주장하는 재벌통제의 방법이 '재벌 해체'는 아니다. 독점화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경향이니 반독점행위를 근절하는 정부의 강력한 개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김상봉 교수는 '주식회의 주인은 누구여야 하느냐'는 다소 다른 차원의 접근법을 제시한다. 이사회가 주주를 대표할 수 없으니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자는 주장이다. 주주에겐 배당과 기업자산에 대한 잔여청구권을 주는 대신 경영권을 노동자에게 주자는 제안을 한다. 이론적으로 보면 삼성전자 노동자들이 투표로 이사회를 구성하고 이사회에서 대표이사를 선출하는 식.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주주며 경영권은 노동자들의 투표로 가능해진다.

장하성 교수는 김상봉 교수의 이 같은 접근법과 정반대다. 주주라면 무조건 의결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사촌지간인 장하준 교수와의 입장 차는 이미 잘 알려진 화젯거리다. 맨 오른쪽에 있는 김정호 교수는 '제발 그냥 내버려두자'는 접근법이다. 총수가 이 정도로 했으니 이만큼 성공했고 국가가 하지 못한 책임을 성공한 대기업에 전가하려 한다는 비난이다.

'나의 재벌개혁 유형'이 궁금한가. 완독 후 '7지 선다형' 중 하나를 택하는 방법이 있지만 '삼성매뉴얼'(www.samsungmanual.co.kr) 사이트에서 퀴즈로 풀어보고 답을 확인하는 건 또 다른 재미다. 여러 경제관련 용어의 정의에 대해서도 이해가 필요하니. 늘 그렇지만 매뉴얼은 또 다른 '공부'다.

한국의 경제학자들
이정환 지음/생각정원

경제학자 7인의 '삼성사용설명서', 당신의 선택은?
경제학자 7인의 삼성사용설명서
쿠오바디스 한국 재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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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비틀스의 멤버 존 레넌(1940~1980)의 노래는 아름다운 멜로디뿐만 아니라 시적인 가사로도 유명하다. '이매진'(Imagine)이나 '루시 인 더 스카이 위드 다이아몬드'(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등의 여러 명곡에서 레넌은 언어에 대한 자신의 탁월한 재능을 원없이 뽐냈다.

출판사 북폴리오의 신간 '존 레논 레터스'는 유일하게 공인된 비틀스 전기를 출간한 작가 헌터 데이비스가 레넌이 주변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와 엽서, 카드 등 285건을 모아 복원한 결과물이다. 특히 언어의 조탁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울 시인 김경주(38)가 번역했다. 출판사 관계자는 "우선 김경주 시인이 레넌의 팬이다. 또 자유롭고 유머러스한 분위기와 세상과 소통하려 시도하는 측면에서 시인과 레넌이 결을 같이한다는 판단에 번역을 의뢰했고, 시인이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책에는 레넌이 가족, 친구, 낯선 사람들, 신문사, 각종 단체, 변호사, 세탁소에 보낸 편지와 카드가 담겼다. 저자는 수집된 편지에 얽힌 사연을 일일이 소개하고 당시 레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상세히 설명한다. 레넌의 기록물은 1951년 리버풀에 살던 이모에게 쓴 감사 편지부터 1980년 12월8일 그가 마흔 살의 나이로 암살당하던 날 전화 교환원에게 건넨 사인까지 다양하다. 아름다운 문구의 시적인 글이나 고뇌가 엿보이는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글은 물론,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상대방을 헐뜯는 내용의 메모도 있다.

김경주 시인은 '옮긴이의 말'에 "직접 써 내린 글씨체, 센스가 엿보이지만 가끔 헛웃음이 나오는 낙서 같은 그림들, 가끔은 틀린 철자까지 존 레논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부분이란 단 하나도 없다. 이런 '아주 특별한 사소함'을 누구의 필터도 거치지 않은 채 생생히 접해볼 수 있다는 것은 '존 레논 레터스'만이 줄 수 있는 쏠쏠한 재미임이 분명하다"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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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지난 시대를 재생하고 함께 호흡할 수 있다는 것. 그 점은 전기와 평전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역시 아주 색다른 방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결국 모든 평전들과 그 뜻을 같이한다. 게다가 직접 써 내린 글씨체, 센스가 엿보이지만 가끔 헛웃음이 나오는 낙서 같은 그림들, 가끔은 틀린 철자까지 존 레논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부분이란 단 하나도 없다! 이런 ‘아주 특별한 사소함’을 누구의 필터도 거치지 않은 채 생생히 접해볼 수 있다는 것은 『존 레논 레터스』만이 줄 수 있는 쏠쏠한 재미임이 분명하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존 레논 레터스
헌터 데이비스 지음, 김경주 옮김/북폴리오

존 레넌의 편지를 시인 김경주가 옮기다
천재 뮤지션의 편지 285통 '존 레논 레터스'
존 레논이 쓴 글 285건 날것 그대로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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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요직은 몽땅 문과 출신이 맡는 세상이다. 이과는 미래부와 환경부 장관뿐이다. 어쩌다 이과 출신을 장관에 앉히게 되면, 차관은 문과 출신에게 맡겨야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대통령이 이과 출신이어도 그렇다. 물론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문과 출신이 더 좋은 적임자라는 근거도 없다. 대기업들이 이과 출신을 선호하는 현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문·이과 구분이 사실은 동서양의 학문적·문화적·사회적 전통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고, 현실적으로도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세상은 문·이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과거의 위대한 학자나 사상가들은 예외 없이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려면 자연과 인간의 정체를 밝혀주는 과학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제학·경영학·심리학·인류학을 문과라고 우길 수도 없고, 언론·금융·행정·통일·국방이 문과 출신의 독점 영역이라고 할 수도 없다. 화학을 전공하고 나서 인문학자로 변신한 김영식 교수의 '인문학과 과학: 과학기술 시대 인문학의 반성과 과제'(돌베개)에 따르면 그렇다.

문·이과의 구분은 일제가 남겨준 비정상적인 교육제도 때문에 굳어진 것이다. 깊은 사유와 성찰보다 말초적 성과에만 매달리는 기능인 수준의 인문학자와 과학자가 문·이과의 구분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문·이과 구분의 폐해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

대부분의 학생에게 적성과 진로의 절반을 포기하도록 강요한다. 학생들에게 학습 부담을 줄여준다는 주장도 사실은 사회가 부담해야 하는 교육비의 절감을 감추기 위한 핑계일 뿐이다. 순진한 문과 출신들이 과학기술에 의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와 문화의 현실을 외면하고, 과학기술이 인간을 황폐화시킨다고 억지를 쓰게 하는 것도 문·이과 구분이다. 어려웠던 시절에는 도움이 되기도 했던 문·이과 구분이 이제는 우리의 선진국 진입을 가로막은 걸림돌이 되고 있다.

과학을 외면하는 인문학은 존재 의미를 찾기 어렵다. 우리 인문학도 과학화·기술화·정보화를 핵심으로 하는 과학기술 시대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어렵다는 이유로 수학·과학을 포기시키는 것이 문·이과 '통합'이라고 우기는 교육부도 변해야 한다. 모든 학생이 과학의 진정한 가치를 인식하고 즐기도록 해주는 과학 중심의 새로운 교육이 절실하다.

인문학과 과학
김영식 지음/돌베개

과학 없는 인문학은 존재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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