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주희의 제자였던 황간이 주자의 일생을 정리한 것으로 주자를 알 수 있는 최초의 전기다.
그의 일생은 ① 관직을 거듭 사양하는 대신, ② 천자에게 많은 상소를 올린 일로 요약된다. 흥미롭게도 유학자로서의 주자의 삶은 송시열과 같은 조선시대의 소중화주의자에게 하나의 전범이 되어, 관직을 사양하는 것과 나라(사직)와 백성을 위한다는 빌미로 임금에게 훈계(유학의 념)를 늘어놓는 일이 지조 있는 선비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양식화됐다.
주자에 의하면 인과와의 본무론적 조화는 자연히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수양과 자기 도야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가 편찬한 『소학』에 강조된 오륜은 가족주의적, 내향적인 인과 국가주의적 의가 절충되어 균형이 잡히도록 고안되었다.
(주자에 대해 너무나 모른다. 조선의 문제는 주자학이 모든 근원이라 배웠는데 정작 문제는 주자가 아니라 주자를 수용한 자의 문제라는 것인가.)

주자학이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은 고려시대(1286)로 그때는 주가가 돌아간 지 86년 후이자, 주자가 활약하던 송나라가 멸망한 지 근 10년 후이다. 이때 들어온 유교는 원나라의 지배하에 들어온 탓에 주자가 강조하던 인과 의의 균형을 상실하고 이기주의적이고 가족주의적인 인만이 고취된 형태였을 뿐 아니라 주자의 애국적 대의도 거세된 모습이었다. 그래서 국가사회라는 대의를 잃은 가족주의적, 내향적, 의례적, 형식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불구적인 형태의 주자학은 고려를 타도하고 조선조를 세우는 과정에서 본래의 뜻을 완전히 망실하였다.
조선 건국의 이념을 조달한 공신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① 주자학을 명나라에 충성을 표명하는 사대주의적 어용 이데올로기로 이용하고, ② 고려조의 정치, 경제적 기틀인 불교를 소탕해서 유학을 유일사상으로 만든 뒤, 자신이 가진 지식권력(유학)으로 왕권을 약화시켰다.
(가족주의적인 인仁이라함은 효孝를 최우선으로 강조하는 그릇된 형태로 변질하였다. 이에 따라 실리보다는 형식에 치우친 당쟁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물론 당쟁은 다른 식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보다도 역자의 서문, 「주자학의 한국적 수용형태」가 더 궁금하다. 주자학이 조선의 편향됨 중에서 가장 큰 잘못된 점이라 생각했는데 주자학보다는 그것을 수용하면서 자기 입맛에 맞게 재단한 이기주의적 사고가 문제였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6』 中 『주자행장』, 황간
생애 및 활동
송나라 (宋)의 휘주 (徽州)에서 아버지 위재 (韋齋) 주송 (朱松)과 어머니 축씨 (祝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총혜근엄 (聰慧謹嚴)하고 말수가 적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어려서는 부친의 지기인 호적계 (胡籍溪) · 유백수 (劉白水) · 유병산 (劉屛山)에게 사사 (師事)하였고 과거급제 이후에는 주돈이와 정호 등의 학통을 이은 연평 (延平) 이동 (李侗)을 찾아가 사사, 명도 (明道) 이천 (伊川)을 사숙하여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이후 유교 경전을 탐독하고 풀이 주석을 교정하고 공자, 맹자 등의 사상을 풀이하였는데 이것이 하나의 학문이 되어 성리학으로 발전하였다.
19세의 나이에 과거 시험에 등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관직에 나아가서는 황제에게 요순 (堯舜)의 덕치 (德治)를 설명하며 봉사 (封事)와 상서 (上書)로 누천만언 (屢千萬言)을 개진하였으나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한탁주 등 관료의 미움을 받아 만년에는 모함을 당하고 기인으로 몰리는 등 많은 고생을 겪었다.
그의 학문을 성리학 (性理學) 또는 주자학 (朱子學)이라 하는데, 고대 경전의 주해 외에 유교의 주류인 이기심성 (理氣心性), 거경궁리 (居敬窮理)의 학설을 제창하여 그 학문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저서로는 주역본의계몽 (周易本義啓蒙) · 시집전 (詩集傳) · 대학중용장구혹문 (大學中庸章句或問) · 논어맹자집주 (論語孟子集註)가 있고, 소편 (所編)에는 논맹집의 (論孟集義) · 중용집략 (中庸集略) · 효경간오 (孝經刊誤) · 소학서 (小學書) · 통감강목 (通鑑綱目) · 근사록 (近思錄) · 주자집 (朱子集) 등을 남겼다. 1200년에 졸하니 사망당시 향년 71세였다. 송 영종 (寧宗) 때 문공 (文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송 이종(理宗) 연간에 태사 (太師)로 추증되었으며 신국공 (信國公)으로 추봉되었다가 다시 휘국공 (徽國公)으로 고쳐 봉해졌고 문묘에 배향 종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