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문외한의 유쾌한 '은유 성찬'
[한겨레 2004-07-09 17:17]
파블로 네루다 탄생 100돌‥'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번역 출간
영화 <일포스티노>의 원작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번역 출간되었다. 칠레 작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64)의 작품을 중남미 문학 연구자인 우석균(서울대 언어교육원 연구원)씨가 우리말로 옮겨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제104권으로 펴냈다. 파블로 네루다 탄생 100주년(7월12일)에 맞춘 것이다.
영화 '일포스티노' 원작 소설 치·시·유머 잘 어우러진 아메리카 소설 또다른 맛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영화 <일포스티노>와 거의 동일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다만,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탈리아에서 제작한 영화에서는 네루다가 고국 칠레의 불안한 정정을 피해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의 한 섬에 머물고 있다가 우편배달부를 만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원작은 네루다의 인생 후반부의 거처였던 칠레의 해안 마을 이슬라 네그라를 무대로 삼는다. 또 하나의 차이는 결말. 영화와 달리 소설은 피노체트 일당의 쿠데타에 따른 좌파 아옌데 정권의 좌초, 그리고 네루다 자신의 죽음까지를 담았다. 네루다와 친했던 우편배달부 마리오 역시 당국에 연행되는 마지막 장면은 이 소설에 비극적 그늘을 드리운다.
그렇지만 소설은 전체적으로 매우 유쾌하고 활달하다.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시에는 문외한이었던 우편배달부 마리오가 대 시인 네루다를 만나면서 ‘메타포’에 눈을 뜨고 시를 읊조리며 그 자신 어엿한 시인의 눈으로 세계를 새롭게 보게 되는 과정이 속도감 있게 그려진다. 마리오가 시의 세계에 입문하는 과정은 베아트리스라는 매력적인 처녀를 사랑하고 마침내 그 사랑이 결실을 맺는 과정과 포개진다.
네루다의 시와 이름을 다 만 자신의 구애를 위한 후광 정도로 생각하던 마리오에게 시란 우선 ‘메타포’로 다가온다. 메타포는 마리오와 네루다, 마리오와 베아트리스, 그리고 마리오와 세계를 이어 주는 매개와도 같다. 그러고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이 소설 전체가 메타포에 대한 찬미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슬라 네그라의 바다를 노래하는 네루다의 시 낭독을 들으면서 마리오는 “제가 마치 선생님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 같았어요”라는 소감을 밝힌다. 메타포가 무언지 모르겠다던 청년이 저도 모르게 근사한 메타포를 구사한 것이다. 베아트리스의 어머니는 자기 딸에 대한 마리오의 애정 공세를 못마땅해하며 “(말이란) 허공에서 사라지는 불꽃놀이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 어머니조차 사랑의 감정에 한껏 젖어 있는 딸에게 경고한답시고 “넌 지금 풀잎처럼 촉촉해”라 말할 정도로 메타포에 대한 이해가 깊다. 자신의 정치적 분신과도 같았던 아옌데가 쿠데타군의 총포에 스러진 뒤, 그 자신 병상에 누운 네루다는 문병 온 마리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주문한다: “이봐, 편안히 죽을 수 있게 절묘한 메타포나 하나 읊어 보게.”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작가가 독일에 망명하고 있던 1985년에 발표되었다. 스카르메타는 <일포스티노>가 제작되기 전에 스스로 이 작품을 저예산 영화로 만들었으며, 영화는 칠레에서 15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네루다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바탕에 깔면서도 그에 눌리지 않고 자기 나름의 어조와 색채를 유지한 데에 소설적 성공의 비결이 있었다. 정치와 시와 유머가 무리 없이 결합된, 남아메리카 소설의 또 다른 유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 출처: 네이버 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