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우소

작가 두번 죽인 '문학사상'

반응형

작가 두번 죽인 '문학사상'

[한겨레 2004-07-09 17:07]

[한겨레] 월간 문학지 〈문학사상〉 7월호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장편 연재소설과 두 편의 단편소설이 끝나고 다음 차례의 연재물로 넘어가기 전에 두 쪽짜리 ‘이물질’이 끼어든 것이다. 이물질의 정체는 전월호에 실렸던 조용호씨의 단편소설 〈비탈길 하얀 방〉의 줄거리와 ‘누락된 부분’이라는 소설의 마지막 두 단락이었다.

작은 활자체로 요약된 줄거리 위에는 더 작은, 깨알같은 글씨로 “정정해 드립니다”로 시작되는 짧은 해명의 글이 덧붙여졌다. 요컨대, 6월호에 실렸던 〈비탈길 하얀 방〉이 편집상의 실수로 마지막 두 단락이 빠진 채로 제작되었으니, 이번호에 누락된 대목을 싣고 앞부분은 줄거리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건은 벌써 6월호에서 벌어졌던 것.

〈문학사상〉과 같은 권위 있는 잡지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무릇 실수하는 동물이니, 이미 벌어진 일이야 그렇다 치자. 문제는 저질러진 잘못을 바로잡는 〈문학사상〉쪽의 대처 방식에 있다. 장편 연재소설도 아니고 기껏해야 200자 원고지 100장 안팎 분량인 단편소설의 대부분을 ‘줄거리’로 요약하고 넘어가는 '용기'라니! 이 문학잡지는 소설이란 다만 줄거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원고지 댓 장 정도로 요약 가능한 이야기를 소설가는 무슨 심사로 100장짜리로 ‘뻥튀기’했던 것일까. 혹시 원고료가 탐나서 이치를 한번 따져 보자. 이 단편소설이 꼬리가 잘린 채 잡지에 게재된 것은 전적으로 잡지사 쪽의 잘못이었다.

그에 대해 잡지사는 작가와 독자에게 사과하고 최대한 사태의 원상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마땅할 터.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제작된 6월호를 전량 회수해 다시 찍는 일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문학사상〉의 발행부수가 한두 권도 아닌 바에야 잡지를 모두 회수하고 다시 찍어 배포하는 일은 경제적으로나 절차상으로나 부담되고 번거로웠을 게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호인 7월호에서 사태를 바로잡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문학사상〉 쪽도 생각이 미쳤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여기서 잡지사 쪽의 지혜는 한계를 드러낸 것 같다. 6월호에 이미 실렸던 부분은 줄거리로 대체하고, 누락됐던 대목만 게재한 것은 편법에 가깝다. 이 소설의 실제적·잠재적 독자들 모두가 6월호와 7월호를 나란히 놓고 양쪽을 보완해 가며 읽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훼손된 것은 단편소설이라는 ‘예술작품’이다. 사태가 발생했을 때 작가는 제 수족이 끊어져 나간 것만큼이나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웠을 것이다. 게다가 누락됐던 결말 부분은 소설에서 핵심적인 반전을 마련해 놓고 있는 부분이었다. 이 소설은 결말의 두 단락을 읽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작품이다. 작가는 줄거리와 함께 실린 ‘누락된 부분’에 흡족해했을까. 혹시 또 한번의 고통과 치욕을 맛보지는 않았을까. 〈문학사상〉은 작가와 작품을 ‘두번 죽였다.작가 및 작품에 대한 애정과 배려가 아쉽다.

< 출처: 네이버 뉴스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