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때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다. 한참동안 읽은 기억이 난다. 집에 와서 책을 찾아보니 없다. 어디갔을까? 다음에 가면 사야겠다.
책의 내용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누워있는 창녀의 벗은 몸을 보고 "... 낡은 칫솔처럼 생긴 음모가 짓밟힌 풀잎처럼 ..."이런 귀절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마지막에 있는 그녀들의 가장 치부이자 생활 수단을 이러히게 비유한다니, 고등학생인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래서 다른 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부분은 머리에 새겨져있다.
안성기와 전무송이 열연한 영화로도 유명하다. 임권택감독의 초기 작품으로 기억에 남는다. 한데 가물가물(매사가 그렇다)하다. 다시 봐야겠다. 지금 다시 보아도 그때의 그 감정이 남아있을까?
"병 속의 새"는 어떻게 되었을까? 세상속으로 간 법운(소설 속의 나)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김성동과 같이 파계하고 작가가 되었을까? "비워내지 않고서는 채울 수가 없다."는 저자의 말처럼 병 속의 새를 마음에서 비웠을까?
<만다라> - 솔뫼 김성로 화백
얼마전 김성동과 김성종을 구분 못하는 국문과교수라는 포스트를 썼다. 한심한(?) 국문과 교수[각주:1]를 말했다. 하지만 사태의 해결에 대한 문학과지성사는 아무런 대응이 없다.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나중에 트위터로 물어보았더니 잘 해결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어떻게 잘 해결되었는지 내용의 전말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문지의 처사(?)보다도 학자(요새 대학교수 보고 학자라고 부르진 않는다. 그냥 밥벌이를 하는 직업인이다. 물론 전부 다가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아는 몇몇 만 그럴것이라 굳게 믿는다.)적 양식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그가 더욱 더 궁금하다.
평생을 글로 살아온 작가 김성동에게는 치명적인 것이다. 더불어 작가 김성종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지금은) 출판권력의 하나인 문학과 지성이 작가를 무시하는 행동은 옳지않다. 또한 이렇게 쉽게 잊혀져 가는 것이 너무 무섭다.
소설이라는 것을 처름 써보았던 것은 초등학교 오 학년 때였으니, 업(業)이었던가. 상상력이 들어갈 공간이 없는 만화책을 집어 던지고 나서 잡게 된 것이 소설책이었다. 외로움 때문이었지만, 백지에 먹물이 찍힌 것이라면 콩나물을 싸온 신분지 쪼가리까지도 숨넘어가게 읽었다. 그리고 이백자 원고지로 쉰 장쯤 될 분량의 소설을 공책에 써보았던 것은 순전히 가슴앓이로 고통을 당하시는 어머니를 위로해드리기 위해서였다. 창자가 끊어지는 창망중임에도 자식이 지었다는 소설을 낭송으로 들으며 엷은 웃음기를 보여주시던 기억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떠오르는데, 주인공이 서울로 가는 대문에서 그 소설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으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서울 묘사를 해볼 재주가 없었던 때문이었다.
소설가가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이 할 일 많은 사바탁세에서 기껏 잔소리꾼이 될 줄은.
부처가 되고 싶었다. 이 어둡고 답답해서 숨가쁘게 힘겨웁기만 한 오탁악세의 이치와 저 우주 삼라만상의 참된 이치를 막힘없이 두루 깨친 부처가 되어, 이 세상의 온갖 악을 멸하고 선을 받을어 행하고 싶었다. 적어도 그러기 위해서 영육을 함께 던지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맴돌아 소설가가 되고 말았다. 욕계화택의 온갖 선악과 미추와 시비를 물고 늘어져 콩팥이 새삼 륙으로 시시콜콜 잔소리를 늘어놓고 그 잔소리의 품삯을 받아 육신을 부지하는 자가 되고 만 것이다.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일찍이 보리(菩提)의 아름다운 마음을 내어 부처를 이루고자 하였으나 기껏 한 잔소리꾼이 되고 만 자의 가슴속에 어찌 또 만 가지의 감회가 없으랴.
그러나 이 중생이 진실로 슬퍼하는 것은 진정한 잔소리꾼의 길이 부처를 이루기 위한 길만큼이나 아아라히 멀기만 하다는 데 있다. 진실로 진정한 잔소리꾼이 되고자 할진대 무엇보다도 먼저 세상사의 이치를 그 밑뿌리에서부터 몰록 깨쳐 마치지 못한 자로써 어찌 또 세상사의 선악미추를 잡고 늘어져 잔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식은땀이 나는 일이다.
두 번째로 소설을 써보았던 것은 1974년이었다. 가을이었다. 가을이 깊어 있었다.
도봉산 만장석봉(萬丈石峰) 밑에 오르면 천축사(天竺寺)라는 옛절이 있는데, 그 절 밑에 있는 토굴에 아그려쥐고 앉았던 것은 어떤 여자대학생한테서 받은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그해 여름 경기도 안성 땅에 있는 칠장사(七長寺)라는 옛절에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또한 업이었을까. 방학을 맞아 잠시 머물다 간 어떤 이름 모를 여자대학생한테서 한 권의 책이 왔던 것이었으니.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문학을 지망하는 청년에게]라는.
'병 속의 새'를 꺼내기 위하여 입천장에 소금기가 앉던 중생한테 그것은 충격이었고, 물 묻은 손으로 전기를 만졌을 때처럼 부르르부르르 온몸이 떨려오던 것이었던 것이다. 그랬는데...... 또한 업이었던가. 사흘 밤낮을 엎드려 1백여 장짜리의 단편 <목탁조(木鐸鳥)>를 썼고 그것이 활자로 찍혀 나왔는데, 그 처녀소설이 '악의적으로 불교계를 비방하고 전체 승려들을 모욕했다'는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아 만들지도 않았던 '중쯩'을 빼앗기게 되었던 것이었으니.
세 번째로 다시 소설을 써보았던 것이 1978년이었고, 중편을 장편으로 고쳐쓴 것은 그 다음 해였다. 그리고 지금 네 번째로 고쳐써 본다.
어린 나이였던 첫 번째는 다만 배고프고 외로웠던 때문이었으나,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똑같은 생각이었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진실로 진정한 '그 무엇'을 얻기 위하여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체의 것들을 가차 없이 단호하게 버리자는 것이었다. 비워내지 않고서는 채울 수가 없다.
그런데...... 쉰다섯 살이 된 지금은 잘 비워지지가 않는다. 온갖 인연의 쇠사슬들이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마지막으로 한번 떠나야겠다는 생각이다.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저만큼 산이 보인다. 옴 미기미기 야야미기 사바하.
남한강가 '非寺蘭若'에서
金聖東; 손곧춤
아직도 근무하나. 국문과출신이 귀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인가 보다. 그 대학 총장은 아무것도 모르나.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