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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인간이 되기 위한 인문

우리안에 있는 인종주의 또 다른 모습 : 다문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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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고자 한 것은 박노자의 책을 보고 나서이다. 다문화가족에 대한 이중성에 대하여 말하였지만 그것은 아무런 개념도 없는 넋두리로 말한 것이다. 꼭 인종주의가 어디서 무엇 때문에 유래되었는지를 알 필요는 없지만 그것을 넘어서려면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우리의 다문화 정책을 명확히 알아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저자의 의도와 다른 의견은 개인적으로 첨언 한 것이다.)

인종주의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중세를 넘어 근세로 넘어서면서 제국주의와 초기 자본주의 태동할 무렵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러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태인을 차별한다거나 하는 것은 인종적으로 우열을 따진 것이 아니다. 기독교 즉 예수를 안정하지 않고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것이 더 강했다. (역사란 참으로 아이러니 해서 이러한 차별로 인하여 유태인은 금융과 자본을 독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니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다른 민족을 차별한 것은 '문화'가 떨어진 미개하다는 것이다. 또한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개념이지 인종으로 구분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것이 자본과 제국주의 더불어 교회가 결탁하여 인종주의를 만들어 낸 것이다.

값 싼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제도는 노예제도이다. 고대에 존재하던 노예제를 이끌어 내기위해서는 새로운 타당한 이유와 학설이 필요했다. 다양한 과학적 (그때는 이런 미개한 것을 과학이라고 했다. 사실은 과학적이지 않지만)인 근거로 인종을 분류하였다. 여기게 다윈의 종이 기원을 악의적으로 해석하여 인종주의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인종주의는 자본주의 탐욕과 병페의 한 산물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식민주의 확산과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임금을 지불할 필요없는 아프리카인(흑인이라고 부르는 자체가 인종주의 산물이다.)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더불어 막대한 이익을 낼 수 있는 인간 사냥이 더욱 더 부채질 하였다. 자본의 이익만을 위하여 인종을 분류하고 그 분류로 노예가 타당하다고 하였다. 이에 교회는 자신들의 자리 보존을 위하여 묵인하였다. 만인은 평등하다는 논리는 그들이 인간일때만 해당되는 것이다. 교회는 그들이 인간이 아님을 인정하고 노예제도를 묵인, 아니 더 동조하였다.

식민주의주의 확산됨에 따라 아시아인의 미개함과 열등함을 개화, 선교하여야 함에 따라 아시아를 정복한다. 이 점도 자본의 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이 모든 병폐가 자본주의의 병폐라 할 수 있다. 지금 이땅의 한반도도 자본주의의 병폐가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종주의는 언제 생겨났을까? 우리는 오래되지 않는다. 거슬러 개화기의 선각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우리에게 인종주의를 전파하였다. 서양인들이 주장하는 인종주의를 비판없이 받아드려 열등한 아시아안들이 일본을 중심으로 뭉쳐서 서양에 맞서야 한다고 ㅎ여 대부분 친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어찌보면 친일은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우리는 현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인종주의는 나쁘다고 알고, 느끼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행동의 하나 하나를 보면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인종주의 변형인 신인종주의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저자는 한국의 다문화주의에 대하여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비판하고 있다.

첫째, 관주도형 다문화주의다. 사회의 안정, 질서, 통제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정부의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다문화주의 정책으로는 이주자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기 어렵다.(유하게 표현하였지만 나는 '없다'라고 본다.)

둘째,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역설적으로 다문화적이지 않다. 즉, 한국 문화로의 동화만을 추구하는 정책이다.

셋째, 대상 집단을 차별화 하는 다문화주의다. 정부의 다문화 정책은 결혼하여 이주해 온 사람, 그것도 여성과 그 자녀만을 대상으로 한다. 많은 이주 노동자에 대한 정책은 전혀없다. 없는 것이 아니라 불법 체류하는 미등록 노동자의 권익 보호보다는 단속과 추방으로 일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문화만 있는 ' 다문화주의다. 자기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 권리나 법으로 규정된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실질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우리에게 바라는 점이 우리가 넘어서고 돌아봐야 할 당면 문제다.

(어느 틈엔가) 인종주의는 나쁘다는 인식만이 우리의 서고를 지배하게 되었고 이제 우리는 다문화주의를 찬양하고 있다.
과연 제대로 된 비판없이 지나간 인종주의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인종주의를 극족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해온 의식 구조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비판이 있어야 한다. 나아가 사회, 경제, 정치적으로 소외된 모든 사람들을 따뜻하게 품어 안아 주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때 우리는 비로소 인종주의와 그 변형인 신인종주의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145쪽)


인종주의
박경태 지음/책세상


덧붙임_
책세상, 2009년 4월 초판 1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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