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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데는 대화가 필요하고 어떤 사랑도 대화의 부재를 견뎌낼 수 없다.
선생과 황태자의 작가 송영 선생의 에세이 <길 위에서의 생각>을 꺼내 들었다. <대화의 문화가 없다>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1990년에 쓴 글인데 그 당시나 지금이나 대화부재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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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혼자 자기 이야기만 실컷 떠들다가 자기말을 끝내면 자리를 뜨는 사람이 있다. 말할 줄만 알고 들을 줄 모르는 기형적인 인간이다. 술집이나 다방은 유난히 떠들썩하다. 술을 마실 때 보면 이야기는 뒷전이고 쉬지않고 잔을 교환한다. 할말도 없고 들어줄 생각도 없으니까 술이나 마시자는 태도다. 덕분에 술집 매상은 오르겠지만 이런 만남은 사실 무의미하다기 짝이 없다.
대학동창들이 오랫만에 그야말로 큰맘먹고 부부동반으로 연말 망년회를 가졌다. 어느 정도 기반을 닦은 나이들이라 풍채도 좋고 자가용도 한 대씩 몰고들 와서 초반 분위기는 아주 흥겨운 듯 보였다. 한 사람씩 나와서 한마디씩 하는 프로가 있었다. 어떤 친구는 자기 화사 매출 규모를 자랑했다. 또 어떤 친구는 자기 지위를 애기했다. 그저 그런 정도였다. 그런 애길 하니 다른 사람들이 흥미를 갖지도 않았다.
정치인들을 보라. 대체로 일방적인 주장을 하거나 그게 통하지 않으면 삿대질이 고작이다. 의견교환이란 없다. 높은 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리고 의견을 묻지 않는다. 남의 의견이란 중요하지도 않을 뿐더러 남의 의견을 듣는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할 때 유난히 큰소리를 치게 된다. 일방적으로 자기 주장을 하려면 큰소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화란 조화이며 사람을 이성적으로 단련시킨다. 아무리 보잘것 없는 사람의 의견도 때로는 보석처럼 빛날 때가 있는 법이다. 대화가 없는 사회에는 독선이 흐르기 마련이고 이성적인 사고와 행동보다는 비이성적인 사고와 행동이 판을 치기 마련이다. 민주사회라는 것도 사실은 대화의 사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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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이 지났지만 지금의 상황과 별반 변한 것이 없다. 아마도 지금도 당시보다 더 심한 이기주의가 팽배한 사회일지도 모른다.
누구와 이야기를 할 때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싶으면 말을 줄이고 대신 귀를 귀울여라. 모든 대화의 목적은 듣는 것이다. (매력 DNA)
덧붙임_
예하, 1990년 8월 초판
위의 사진과는 많이 다른 송영 선생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길 위에서의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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