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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인간이 되기 위한 인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에 대한 불온한 것들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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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성이란 (미천한 것, 별 볼일 없는 것, 인간도 아닌 것들과의) 어떤 뜻밖의 만남에서 '저들'의 기분이다. 불온성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다. 책은 이 구절로 시작된다. '저들'의 기분이라 말한다. '저들'은 송기원의 두 편의 시에 나오는  '그들'과 통한다. 

꽃밭을 지나며

이렇게 많은 꽃들이
그들 몰래
피어 있다니!


다시 꽃밭을 지나며

저렇게 많은 꽃들이
그들에게 들켜
시들어 버리다니!


멈춘 세상에 가하는 불온한 것들의 채찍질

80년대 대학 언저리를 다닌 이에게는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으로 잘 알려진 이진경의 강연(혹 세미나)를 다녀왔다. 얼마전 읽은 <불온한 인문학>의 연작이라는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에 관한 강연이었다. 책을 읽지 않아 내용은 알지 못하고 단지 그것에 대하여 궁금함에 참석했다. 이러한 궁금증이 유발된 것은 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책과 세상>에 실린 독자와의 대담을 보고난 이후이다.

강연은 '불온한' 것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불온한 인문학>을 읽을 때만해도 그 '불온함'이 예전에 나이 든 꼰대들이즐겨 말하던 그 '불온함'과 같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전혀 인식하지 못했었다. 당시 나라를 지탱하고 이끌어나간다고 생각하는 많은 위정자들의 하수인, 완장 찬 아랫 것(이들은 아직도 아랫 것에서 약간 윗 것이 되어 이 땅에 있다)들은 늘 말했다. 너희 놈들은 참으로 '불온한' 놈들이다. 그 불온한 것들이 진정 불온한 것들인지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불온함을 언제 느끼게 되는가?
어떤 존재와 대면했는데, 그 존재가 인간인지 동물인지, 생명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나 통상적으로 경계 지어놓은 것들이 어떤 존재에 의해 깨져버릴 때, 또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던 그 존재가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다든지, 대든다든지 할 떄 느께게 된다.그러니까 그걸 느끼는 사람에게만 '불온함'이 귀속된다고는 할 수 없다. 차라리 그 만남에 귀속된다.

다시 강연으로 돌아가 이진경은 그 '불온한' 것들이 불온하게도 고개를 빳빳히 들고 대든다면 어떻게 될까라고 반문한다. 맞다 당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내가 왜 '불온한'지에 대한 항변이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그들의 의도(?)대로 '불온함'은 잊고 순응하고 있는 모습이 지금의 우리들의 모습이다.

책에 나온 몇 가지 에피소드를 말하며 저자는 꼭 읽기를 권한다. 물론 작 책이기에 당연한 말이지만 그 말이 덩연하다고 들리지 않았다. 꼭 읽어야 할 당위성을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 중에 하나가 왜 (저자가 꼭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나 내가 듣기로는)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 좋은, 인간적인 세상인가라는 부분이다. 농담처럼 이 책의 출판사가 휴머니스트라 말하며 그 말을 정말 싫어한다고 농반 진반으로 말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세상을 위해 인간이 아닌 것들에 대해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그렇게 해왔는가?  한 예를 들었다. 개고기 반대 서명을 받는 자리에서 왜 개는 안되고 소나 돼지는 되는가를 물어 보았다고 한다. 주최측은 개는 인간의 친구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 말도 안되는 개소리(저자가 이렇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난 이렇게 들었다)로 개고기 반대 서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소와 돼지는 원래 인간에게 고기를 대주려고 태어났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평생 친구로 살아가다가 일생에 단 한번 (너무 인간적인) 인간에게 배신당한 개팔자는 좋은 것이 아닌가. 평생 고기를 대주려고 살다간 소와 돼지에 비하면.

평소 개고기를 금지하자는 개소리에 대해 별 생각이 없다. 그보다 저자가 말한 너무나 인간적인 그래서 휴머니즘이 넘치는 세상이 진정으로 인간적인 세상인지 묻고 있다. 난 저자의 생각에 백배 공감한다. '탄생'되는 것들은 다 그들만의 이유가 잇는 것인데 인간적인 세상에서는 인간만을 위해 그들의 탄생을 탄생으로 받아드리지 않고 있다.  암세포를 가진 쥐의 예를 들면서 다른 탄생에 대하여 말했다. 태어나면서 인공적으로 다시 말하면 너무나 인간적으로 암세포를 가지고 태어난 쥐의 탄생은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인가? 너무나 인간적으로 표현하더라도 말하기 힘들다.

나를 비롯한 일반인들의 전체 인구의 약 10% 이상을 차지하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대부분 느끼지 못하며 이루어지고 있다. 장애인 보호시설은 정작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 비장애인으로 부터 장애인들을 격리 수용하기 위한 울타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양키들이 아메리카 인디언(너무 유럽적인 말이기에 쓰기 싫은 말이지만)들을 보호의 명목으로 인디언보호구역에 가둬 그들과 섞이는 것을 막은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도 인간적인 면이 옅보인다. 여기서 인간이란 비장애인을 말하며 양키를 지칭한다.

'장애인과 정상인' 인지 아니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맞는 것일까? 이 화두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야 하는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숙제이다.

인간적인 것에 대한 고민은 인간과 비탄생, 즉 만들어진 것에 대한 불온함에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생명은 신성한 거라고 여기고, 생명없는 것들을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다. 근데 사실 생명없는 것들로 인해 우리가 달라진다. 그걸 무시하는 건 어리석은 차별이자 분별이죠. 현실이 그렇다면 그것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를 따져야 한다."

저자가 쓴 내용, 말한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읽은 책을 모두 이해한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저자의 권위와 그 책의 내용에 대해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질문을 던지면서 책을 읽다보면 책 내용을 다 잊더라도 적어도 자기가 질문한 생각들이 남게된다. 그런 질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되고, (나의 경우에는) 책을 볼 때 저자의 사고방식을 배운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생각만 쫒지 말고 책을 친구로 삼아라. 두려워 할 필요 없다."


덧붙임_
저자는 '휘말리다'는 (감성의) 증폭, 전염을 말한다. 즉 매혹됨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물론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과는 동떨어진 말이지만 '휘말리게 만들어라'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에 적용된다. '휘말리게'는 스스로 향기를 품어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여 사로잡는 것이다. 상대방을 스스로 '휘말리게'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

덧붙임_둘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저자와의 만남 - 2011. 11. 24
<책과 세상> 89호, "멈춘 세상에 가하는 불온한 것들의 채찍질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이진경 지음/휴머니스트



덧붙임_ 2011.12.20
불온한 것들의 채찍질_ 이진경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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