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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글 창제 작업은 누가 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1443년 12월 30일자의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ㆍ중성ㆍ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상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즉, 세종 혼자서 창제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평소 몸이 약했던 세종이 그처럼 엄청난 작업을 혼자 해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한글 창제 전의 몇 년 간은 세종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던 때라 정사를 돌보는 것은 물론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경연(經筵)조차 제대로 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럼 집현전 학사들도 모르는 상황에서 비밀리에 누가 세종을 도와주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꼽히는 인물들이 바로 세종의 자녀들인 문종과 수양대군ㆍ안평대군ㆍ정의공주 등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거론되는데, 그가 바로 신미대사이다. 특히 신미대사의 경우 단순히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한글 창제의 주역이라는 설도 있을 만큼 세종 및 한글과의 관계가 깊은 인물이다.
신미대사가 한글을 창제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이유를 추적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한글이 범자(梵字 ;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의 문자)를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설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불교 경전은 범어로 기록된 것이 많았다. 승려인 신미대사는 불경을 번역한 한자에 오역이 많음을 알고는 독학하여 범어 및 티베트어를 비롯한 5개 언어에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범어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세종보다는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를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1443년 12월 30일의 세종실록 기록을 보면 ‘옛 전자를 모방했다’는 내용이 있다. 또 훈민정음해례본의 정인지 서문에도 ‘모양은 본뜨되 옛 전자를 모방했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전자(篆字)란 가장 오래된 한자 글씨체 중의 하나를 가리킨다.
하지만 세종의 어명없이 글자를 창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세종 혼자 독자적으로 글자를 창제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세종이 글자 창제에 관심을 가져 여러 신하들에게 각자의 능력에 맞게 일을 나눠 시킨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글은 세종이 창제했다.
세종은 전문가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오랫동안 헌신토록 함으로써 국가 전체의 역량을 골고루 끌어올리는 용인술을 썼다. 다소 흠이 있는 황희나 조말생을 중용해 장점과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했다.
세종의 인재경영은 인사때문에 망亡치고 있는 오늘날 정치를 보면 그 중요성을 더 잘 알 수 있다.
세종의 또 커다란 리더십은 '소통'이다. 당대 법과 문화, 과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일대 발전을 이룬 것은 '소통을 기반에 둔 헌신의 리더십' 때문이다.
<한 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의 저자 박영규는 "세종의 리더십의 교훈은 충분히 지도자 공부가 된 사람이 리더가 돼야 한다는 것"이라며 "지도자는 모름지기 정치철학과 가치관은 물론 문화적 소양도 함께 지녀야만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 박영규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 박현모 지음/푸른역사 |
덧붙임_
지명창통진실수(知命創通進實修)
첫째, 지(知)는 지적 리더십이다. 스스로 엄청난 분량의 공부를 하고, 집현전을 통해 통합적 지식을 축적해낸다. 그리고 경연이라는 독특한 공동학습프로그램과 정례회의를 통해 지식을 확장한다. 축적되지 않고 소통되지 않는 지식, 확장되지 않는 지식은 단편으로 끝나고 자신만의 만족에 그쳐버리게 될 텐데 세종은 이것을 현명하게 이루어 냈다. 지적 리더십은 세종의 힘 중의 하나이다.
둘째, 명(命)은 민본에 기초한 소명리더십이다. 지금 ‘왕이 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임무는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한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선언한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이것은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 백성을 사랑한다는 애민과도 다른 백성이 근본이라는 민본으로의 “중심이동” 선언이다. 그 선언에 따라 자신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위임받 은 자”라는 소명의식이 비전실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셋째, 창(創)은 창의리더십이다. 대표적인 것이 훈민정음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발명품, 실용적 기구들, 실용서적으로는 의방유취, 농사직설, 삼강행실 같은 실용 매뉴얼들이 있는데 이러한 결과물들은 모두 창의경영의 성과들이다. 그런데 이 창의경영의 출발은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어진 마음’에서 출발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절박한 필요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책임진 백성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어질지 못하거나 감수성이 없는 마음에서는 나오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통(通)은 소통리더십이다. 세종은 그 스스로 수준 높은 학문을 갖추었고 왕이 되기 전에 부왕태종으로부터 ‘일의 대체를 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안들에 대해 의견을 구하고 신하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의견을 채택해서 힘을 실어주었다. 지적 권위를 가진 사람이 빠지기 쉬운 오만과 독선이 없었다. 소통의 적이 자신만큼 아는 사람이 없다는 데서 오는 것이라면 세종의 소통은 전체의 지혜가 더 훌륭한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특별히 세종의 경청능력은 경이로운 수준이다. 경청은 소통의 출발이 된다는 것을 세종께서 몸소 보여주었다.
다섯째, 진(進)은 추진력을 갖춘 실천리더십이다. 보통 추진력이란 언어가 주는 이미지는 각종 장애물과 소소한 민폐는 돌아보지 않고 돌파해 내는 저돌성을 나타내 보이지만 세종은 느리더라도 끝내 해내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일관된 추진력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특징은 신하들의 반대를 극복해내는 설득과 타협, 소통을 통해 결국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참여하게 만드는 포용적인 실천력을 갖추었다. 세종대에 이루어진 성과들이 어느 하나 단기간에 쉬이 해치울 수 없는 것들이었는데도 그 많은 것들을 이룬 배경에는 이러한 설득력과 실천력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했다.
여섯째, 실(實)은 실용리더십이다. 어떤 사안을 시작하거나 그 결과를 보고받을 때면 ‘이것이 백성에게 유용한가’를 물었다. ‘지킬 수 없는 법은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고 하며 실용적 법제정과 실행에 초점을 맞추었다. 실용은 인재쓰기에서도 드러난다. 뇌물을 받거나 도덕적인 지탄을 받는 사람들도 그의 재능을 먼저 활용하기 위하여 임금이 방패막이가 되어 용서하고 등용한다. ‘법은 융통성과 원칙 중에서 어떤 한가지만을 고집할 수 없는 것이다’라면서 원칙론이 빠지기 쉬운 억울함을 실용의 차원에서 보완하였다.
일곱째, 수(修)는 수신리더십이다. 세종만큼 자기절제와 인내가 몸에 밴 사람이 있을까 싶을 만큼 자신을 다스림에 뛰어났다. ‘내가 경서와 사기는 보지 않은 것이 없고 또 지금은 늙어서 능히 기억하지 못하나 지금에도 오히려 글 읽는 것을 치우지 않는 것은 다만 글을 보는 동안에 생각이 일깨워져서 여러 가지로 정사에 시행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로써 본다면 글 읽는 것이 어찌 유익하지 않으랴’라고 한다. 평생학습, 평생수양을 실천하고 있다. 실용을 위한 학습보다 먼저 긴요한 것이 바로 마음을 공부하는 것이다. ‘마음공부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하며 당시 젊은 사대부들에게 ‘어떻게 하면 선비들의 부화한 버릇을 버리게 할까’를 묻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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