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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술 사주는 읽고쓰기

인민人民이 책을 읽지 않으면 우중愚衆이 된다 : 장정일의 독서일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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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을 읽을 때마다 그의 다독과 박식함에 부럽고 우울해진다. 이제 그것을 넘어설 때도 되었건만 부러움에 대한 시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정일은 언제나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그처럼 책을 다독하지도 못하며 또한 자유분방하지도 못하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생각의 자유로움을 책장 너머로 볼 수 있는 책이다." 예전 장정일의 <생각>을 읽고 쓴 대목이다. 이 책도 그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직도 장정일의 자유분방함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

민주사회란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하는 사회이다. 그래서 시민이란 타인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그것과 함께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 시민을 책을 읽는 사람이라고!

시민이 책을 읽지 않으면 우중愚衆이 된다. 책과 멀리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사회 관습의 맹목적인 신봉자가 되기에 십상이고 수구적 이념의 하수인이 되기 일쑤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내밀한 정신의 쾌락을 놓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나쁜 시민이다.

독서는 논술이나 수능을 잘 치르는 데 필요한 것도, 또 교양이나 정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독서는 민주사회를 억견臆見과 독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시민이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책을 읽지 않으면 우중"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그것과 같이" 살아야 함에도 우리 사회는 다름을 인정하고 않고 있다. 나와 다름을 틀림으로 여긴다. 모두 극단으로만 치닫고 있다. 다른 의견이 존재해야지만 민주사회이다.

장정일은 시민이라 말하지만, 시민이라는 말이 적합한지는 의문이다. 우리에게 시민이란 존재하는가. 그렇다고 민중民衆이라고 칭하기엔 부담스럽고 더 좋은 인민人民이라는 말은 그 말에 대한 선입견으로 쓰기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장정일의 시민이라는 말보다는 인민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6권은 1, 2 이후 오랜만에 읽은 그의 독서일기이다. 물론 7권 이후 나온 달라진 그의 독서일기(개인적으로는 예전의 독서일기가 좋지만)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을 읽었다. 이번 책에서도 그간 모르던, 아니 내가 몰랐기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책이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것을 내가 다시 읽기 위해 정리한다. 또한,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나와 공감하고 같은 책을 세상에 나오게 할 수 있다면 책을 읽는 인민으로서 기쁨이 배가 될 것이다.

덧_
아래에 적은 것들이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된 책이다.
장정일이 책에 대한 인용한 부분과 그것에 대한 생각이다. 장정일의 부연과 인용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았다. ( )에 부연 된 것은 나의 생각이다.
절판이 많다. 어떻게 구할까.




장정일의 독서일기 6
장정일 지음/범우사




오태석 지음/종합출판범우
<태> 오태석
오태석의 희곡집이다. 나는 이 작품들이 과연 오태석의 대표작인지 의심스럽다. (나는 그의 희곡을 읽은 적이 없어 대표작인지 알 길이 없다.)

가나다라를 깨우치고도 <자전거>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를 맛보지 못한 사람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즐길 수 있는 즐거움을 맛보지 못한다고 겁(?)을 주는데 어찌 이 책을 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반문화 지향의 중국인
김문학 지음/이채

<반문화 지향의 중국인> 김문학
<과거제도와 문화 전제> : 황제와 유학이념 아래 치러진 과거 제도는 "시험에는 능란하지만 창조적 사고는 결여된 정치 권력의 추종자를 양산"해 내는 제도로 과학과 민주 사상의 씨앗조차 키울 수 없게 했다고 말한다. ... 저자는 일찍이 그렇게도 찬란한 문화를 만들어 낸 중국이 근세에 적응하지 못한 데에는 과학과 민주적인 의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 과거 제도도 한몫 했다고 말한다. 한자 문화권 가운데 과거 제도를 받아들인 한국과 베트남이 중국과 같은 처지를 면하지 못한 반면 유독 과거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일본은 별 탈 없이 서고 문명 수입에 성공했다며, 중국 문화 속에는 아직까지 "과거 제도의 독재 사상과 관료의식"이 잔존해 있다고 쓰고 있다.

(지금까지도 과거가 존재한다. 고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그것을 통해 창의적 사고가 결여된 정치 권력의 추종자를 양성하는 제도로 이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 비약일까.)

<중국 지식인의 반문경상反文輕商> : 과거 제도를 통해 지식의 독점적 수혜자가 된 역대 중국의 지식인들은 반문경상의 태도를 견지했다. 농업 국가이던 나라의 정책이 중농경상이기 때문에  경상은 이해가지만 지식들의 반문은 역설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중국어의 사문소지斯文掃地라는 표현은 "대중이 지식을 얻게 되면 사문, 즉 유학의 도나 체면이 땅에 떨어져 쓸리는 격이 된다"는 뜻으로 중국 문화사가 상문이 아닌 반문화 사회라는 것을 말해 준다. ... 예나 지금이나 상인은 많은 농민보다 견식이 넓으니 문화적 수준 또한 높을 수 밖에 없었다. 늘 여러 지역을 돌며 일을 해야 했으므로 견문이 넓고 모험과 신지식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했으며, 상인들의 자유 경쟁의 원리는 민주의 원리를 낳을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었으나 진시황의 친부라 알려진 여불위와 같이 금전으로 지배계급을 매수하고 농락할 수 있었던 상인의 힘에 대해 두려워한 지배 계급과 문인들은 상인의 온갖 단점만을 극대화시켜 소인이라 멸시하고 억압했다.

(저자는 예나 지금이나 상인이 문화적 수준이 높다고 말한 것은 잘못이다. 예전은 맞지만, 지금은 틀리다. 또한, 여불위의 상인에 대한 단점을 말한 것은 달리 보면 시대를 예측한 정확한 판단이다. 정치가 한국을 (넓게 보면 세계 모든 국가) 아우른다고 생각하지만, 그 정치를 움직이는 것은 상인들의 금전이다. 지배계급을 매수하고 농락하고 있다. 상인의 온갖 단점이 아니라 치명적인 해악이다.)

<중국은 문文의 사회인가?> : 중국이 유사이래 주로 문사나 사대부가 지배해 온 거대한 사회인 것만은 사실이다. 특히 수당, 당 이래 과거 제도 하에 산출된 문인 관료가 황제 아래에서 정부를 운영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면 위에 떠 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 아래 잠긴 장대한 서민층은 문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오히려 상무 쪽으로 치우쳤다고 할 수 있다. 법과 거리가 먼 그들에게 무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문의 사회하면 오히려 중화 제국의 안방인 한반도가 아닐까 싶다.

(소중화를 주창한 한반도가 문의 나라이다. 공감한다. 어설픈 추종은 화를 자처한다. 지금은 소중화가 아니라 미국의 52번째 주를 꿈꾼다. 또 다른 소미화小美化를 꿈꾼다. 우리가 표현하는 미국은 美國이고 일본이 말하는 米國일까. 그렇게 아름다운 나라일까.)


환관
三田忖泰助/나루

<환관> 미타무라 타이스케
이 책의 표지에는 '만들어진 제3의 性'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데 번역자의 머리글을 보면 '측근정치의 구조'가 부제이고, 그런 부제목을 염두에 두고 읽는 독자라야 이 책의 저자가 밝히고자 했던 주제와 방향을 온전히 알 수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물론 현재의 정치 구조와 정치 문화를 들여다보는데 유용한 모범을 제시해 준다고 본다. 청와대  어디에도 환관은 없지만, 권력이 선호하고 또 거기에 기생하는 측근은 어느 시대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환관은 중국에서만 특별하게 존재했던 것으로 역대 중국 왕조의 정치 구조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소중화인 한반도에서도 존재했다.)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는 황제의 독재권을 제한하는 재상권을 없애버렸다. 재상 정치의 폐지는 황제의 권한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때문에 모든 기구는 종적인 관계를 형성하여 횡적인 연결체계를 절대 부정하는 조직으로 구조화되었다.

청나라의 패망을 마지막으로 지상 최대의 환관국인 중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저자의 재미난 후기가 보여주듯이 21세기에도 환관과 같은 존재가 존재한다. 어느 조직에서나 한두 명씩 있는 예스맨이라고 불리우는 측근들은 단지 거세를 하지 않았을 뿐 환관과 같다. ... 박정희 시대에 삼권 위에 군림하면서 측근정치를 행했던 중앙정보부는 명대의 동창이라는 이름으로 존재으니, 그것은 비대해질대로 비대해진 환관 세력이 백성은 물론 사대부와 관료 조직 그리고 자기 내부 세력마저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비밀경찰이었다.

(여기서 잘 몰랐던 점은 명태조가 황제의 권한을 극대화 하기 위하여 재상권을 없앴는데 조선은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재상권 강화를 주창했다. 아이러니하다. 환관은 지금도 존재한다. 명조와 마찬가지로 종적인 관계만 존재하고 횡적인 관계는 없어졌다.)
 

<주자행장> 황간
이 책은 주희의 제자였던 황간이 주자의 일생을 정리한 것으로 주자를 알 수 있는 최초의 전기다.

그의 일생은 1) 관직을 거듭 사양하는 대신, 2) 천자에게 많은 상소를 올린 일로 요약된다. 흥미롭게도 유학자로서의 주자의 삶은 송시열과 같은 조선시대의 소중화주의자들에게 하나의 전범이 되어, 관직을 사양하는 것과 나라(사직)와 백성을 위한다는 빌미로 임금에게 훈계(유학의 념)를 늘어놓는 일이 지조있는 선비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양식화됐다.

주자에 의하면 인과의의 본무론적 조화는 자연히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수양과 자기 도야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가 편찬한 <소학>에 강조된 오륜은 가족주의적, 내향적인 인과 국가주의적 의가 절충되어 균형이 잡히도록 고안되었다.

(우리는 주자에 대해 너무나 모른다. 조선의 문제는 주자학이 모든 근원이라 배웠는데 정작 문제는 주자가 아니라 주자를 수용한 자들의 문제라는 것인가.)

주자학이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은 고려시대(1286)로 그떄는 주가가 돌아간지 86년 후이자, 주자가 활약하던 송나라가 멸망한 지 근 10년 후이다. 이 떄 들어온 유교는 원나라의 지배하에 들어온 탓에 주자가 강조하던 인과 의의 균형을 상실하고 이기주의적이고 가족주의적인 인만이 고취된 형태였을 뿐 아니라 주자의 애국적 대의도 거세된 모습이었다. 그래서 국가사회라는 대의를 잃은 가족주의적, 내향적, 의레적, 형식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불구적인 형태의 주자학은 고려를 타도하고 조선조를 세우는 과정에서 본래의 뜻을 완전히 망실하였다. 조선 건국의 이념을 조달한 공신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1)주자학을 명나라에 충성을 표명하는 사대주의적 어용 이데올로기로 이용하고, 2)고려조의 정치, 경제적 기틀인 불교를 소탕해서 유학을 유일사상으로 만든 뒤, 자신들이 가진 지식권력(유학)으로 왕권을 약화시켰다.

(가족주의적인 인仁이라함은 효孝를 최우선으로 강조하는 그릇된 형태로 변질하였다. 이에 따라 실리보다는 형식에 치우친 당쟁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물론 당쟁은 다른 식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보다도 역자의 서문, <주자학의 한국적 수용형태>가 더 궁금하다. 주자학이 조선의 편향됨 중에서 가장 큰 잘못된 점이라 생각했는데 주자학보다는 그것을 수용하면서 자기 입맛에 맞게 재단한 이기주의적 사고가 문제였다.)


일본인과 에로스
서현섭 지음/고려원북스

<일본인과 에로스> 서현섭
한국인들은 일본을 일본 그대로 놓고 보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일본을 볼 때 '한국에는 있으나 일본에는 없는 것'을 찾아낸 다음, 일본을  어떤 결핍태로 묘사한다. 그래서 한국인은 일본인을 얕잡아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책은 '일본은 일본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와 다르니 야만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주자행장>의 역자 서문에서) 일본 유학자들은 유학을 받들면서도 "일본 정신과 그 주체성을 잃은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명한 유학자 쿠마자와 반잔은 화장이나 토장이냐는 논란에 대해 "산 사람이 살 토지도 없는데 어디 죽은 사람을 위해 넓은 땅을 허비하여 토장을 할 것이냐"라는 명답으로 유교식 토장을 거절했다. 일본에서도 주자학은 도쿠가와 막부 시절부터 어용학이 되었지만 주자의 가례를 따라 토장을 하겠다는 유자는 없었다. 일본의 유학 수용사 내지 퐁토를 두 가지러 요약한다. 1)일본인에게는 일본인됨이 앞서고 학자됨은 2차적이다. 2)주자학이 어용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항한 숱한 유교 학파가 싹튼 일본에는 언제나 복수의 사상이 공존, 대립하곤 했다.

8세기 초에 가록되었다는 일본 최초의 문헌 <고사기>의 국토 생성 신화는 우리와 아름을 확실하게 말해주는 표지이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신이 바닷물을 휘저어 하나의 섬으로 만들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남신 이자나기가 여신 아자나미에게 몸의 생김새를 묻자 이자나미는 한 곳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였고 남신은 자신은 한 곳이 남는다고 했다. 남신의 나머지 부분과 여신의 부족분을 합해서 나라를 만들자고 의기투합한 결과 오늘의 일본 열도가 생겼다는 신화이다.
남매간의 근친혼마저 암시하고 있는 이 건국설화는 꽤 파격적이다. 한 나라의 국토가 신들의 성적 결합에 의해 국토가 생겼다는 이 설화는, 일본인의 성에 대한 의식을 음습하고 칙칙한 것이 아닌 밝고 생산적인 것으로 특징짓는다. 그리고 바로 그런 태도가 일본인의 거리낌 없는 성문화를 만들었다.

(전 세계에서 일본과 일본인을 무시하는 나라는 한국인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일제강점기 때문이 아니라 문화적 우위를 늘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이 아니라 왜倭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동이東夷이고 그들은 倭이다. 오랑캐가 오랑캐라 부른다. 누가 야만인가.)


김수영 평전
최하림 지음/실천문학사

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
김명인 지음/소명출판

<김수영 평전> 최하림
<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
<김수영 평전>은 김수영의 삶을 추적한 평전이고 <근대를 향한 모험>은 김수영 시에 관한 평론이다.김수영은 1)일제시대 때 누구나 다 가담한 사회주의 운동이나 항일 운동 자체에 대해 무관심했다. 2)해방 후, 뒤늦게 사회주의(좌익)월북 인사들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3)6.25라는 참상과 직면하자, 모든 이데올로기적 판단이 중지되고 생존의 방법으로 남한을 택한다. 4)휴전선이 고착되고 냉전이 시작되자 사회주의에 대한 콤플렉스에 다시 시달린다.

김수영은 1) 또는 3)과 같이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는 도피와 생존을 택하고, 2) 또는 4)와 같이 상대적으로 유화적이고 과도기적인 공간에서는 과격한 자유주의자 내지 회의주의자가 된다. 김수영이 4.19에 왜 그토록 열광했는지의 비밀은 여기 있다. 4.19는 그가 온몸을 던진 최초의 투신이었다. 하지만 혁명은 진창으로 빠져들고 5.16이 일어나자 김수영은 내부에서 붕괴된다. 현실에 대한 무관심이나 생존을 위한 판단 중지로 되돌아가기에는 난생 처음 맛본 4.19에 대한 열정이 너무 컸다. 그래서 나름의 타계책으로 택하게 된 것이 하이데거의 시론이며 언어와 우주에 대한 투항이다.

(콤플렉스는 다른 이가 씌어준 굴레가 아니다. 자신이 만든 굴레이기에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이도 자신뿐이다. 하지만 자신의 굴레는 쉽게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그 굴레에 얽매인다. 그래서 출구를 반대편으로 더 빨리 많이 가게 된다. 박정희가 남로당 콤플펙스로 다 우경화되었고, 이전 대통령은 학력 콤플렉스와 운동권 콤플렉스에 벗어나려 했지만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

김수영이 쓴 "비참의 계수가 다른 데로 옮겨갔다.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은, 선진국과 후진국의 대립으로, 남과 북의 대립으로, 미,소의 우주 로케트의 회전 수 대립으로 대치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골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회복이다"(1964) "우리의 시의 과거는 성서와 불경과 그 이전까지도 곧잘 소급되지만, 미래는 기껏해야 남북통일에서 그치고 있다. 그 후에 무엇이 올 것이냐를 모른다. 그러니까 편협한 민족주의의 물레바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의 미래에도 과학을 놓아야 한다"(1968)는 구절은 현대 세계에 대한 시인의 지관을 보여주는 성찰적 잠언으로도 읽히지만, 김명인에게 그의 "지나친 앞서감"은 오히려 근대(현대)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비쳐진다. "부르조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보다 중요한 대립이 등장했다는 것, 이제 문제는 인간의 회복이하는 것, 그리고 남북통일의 전망은 근시안적이라는 것 등은 그의 현실인식이 억압적 현실에 의해 굴절된 결과이거나 아니며 그의 현대에 대한 집착이 주관적인 비약을 낳았거나 둘 중 하나, 혹은 둘 모두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수영의 너무 앞서감에 비과학적이라는 인장을 찍을 사람이 김명인 말고 누가 있겠는가.

(장정일의 책과 상관없는 김수영에 대한 글이다.) 일제 시대에 도코로 유학을 간 김수영은 특이하게도 연극을 공부했고, 뒤에 가족들과 함께 중국 릴림으로 이주했을 때 그 곳에서 연극활동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했던 연극 작품은 물론 연극론(관)마저 변변히 남아 있지 않다. (김수영이 연극을 했다는 것은 나는 처음 알게 되었다. 김수영에 대한 나의 무지 때문이겠지만 어디서도 읽은 바가 없다.)

(책과는 상관없는 장정일의 연극에 대한 짤막한 덧붙임은 주레사 비평을 하는 평론가들이 꼭 보았으면 좋겠다.) 서구의 비평가들이 연극과 희곡에 대해 열렬히 쓰는 것과 대조적으로, 만물상에 가까운 우리나라 문학 평론가들이 1년 동안 쏟아내는 무수한 평론집 속에 희곡에 관한 글은 하나도 없다. 우리 작가들이 쓴 희곡이 천대 받아도 좋을 만큼 우리나라의 시와 썰이 모조리 뛰어나서일까? 아니면 평론가들의 장르적 편견이나 권력화된 장르 그 자체 때문일까?


지식인의 종말
레지 드브레 지음, 강주헌 옮김/예문
<지식인의 종말> 레지 드브레
프랑스 지식인들에 대한 냉소적인 보고서. "프랑스 지식인은 1898년에 집단으로 태어났다"는 말이 가르쳐 주듯이 프랑스 지식인은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임무와 존재를 알렸다. ... 과거의 지식인이 "드레퓌스는 무죄인가 유죄인가?"라는 문제로 고심했다면 현대의 지식인은 "드레퓌스 파에 가담하는 것이 나올까. 아니면 반드레퓌스 파에 가담하는 것이 나을까?"를 고민한다.

(드레퓌스 사건 : 프랑스 육군의 포병대위였던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1894년 소령인 페르디낭 에스테라지(프랑스어: Ferdinand Walsin Esterhazy)라는 간첩이 쓴 문건으로 인하여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강제로 불명예 전역된 뒤,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으로 유배당한다. 드레퓌스는 잘못된 증거 자료에 기초를 둔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사실 드레퓌스는 무죄였다.)

"원래 지식인이란 이름은 자유롭게 사색하고 자료를 비판적인 안목에서 분석하며 증거에 따라 반성하는 사람들에게 붙여진 것"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시종일관 '최초의 지식인"과 '최후의 지식인'이라는 구분을 사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 지식인이 사회에 개입하는 객관적인 조건들도 변했을뿐더러, 그 조건들은 지식인 자체를 변화시켰다."

오늘날의 지식인이란 "커뮤니케이션 환경에 지나치게 잘 적응한" 무리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언론에 의해 주어진 세계를 바탕"으로 세게를 이해하는 자들이며, 미디어에 의해 자아가 만들어진 사람들이다. 이 즉물적인 세계에서는 저자가 강조하는 자료나 반성이 들어설 틈이 없다.

드브레는 참 재미있게도, 아군과 적군 개념이 없는 지식인을 민간인이라고 지칭한다. 피아 구분을 상실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싸우기를 포기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지식인은 전사라는말이다. 체 게바라와 함께 볼리비아 혁명에 참여했다가 정부군에게 잡혀 30년 감옥행을 선고받았던 드브레다운 말이다.

(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란 아와 피아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상태의 기록이다"라고 했는데. 피아의 구분을 해야지만 지식인이라는 말은 명쾌한 지적이다.)


역사소품
곽말약 지음/범우사
<역사소품> 곽말약
역사 인식(재해석)을 새로 하는 것으로 현실적 문제에 대한 지혜와 비판을 얻고자 했다. 하지만 이런 작업에는 늘 두 가지 혐의가 따른다. 첫째,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를 동원하는 것(관제화된 역사문화) 둘째, 검열을 피하기 위해 역사 뒤에 작가의 발언을 숨기는 것(도피로서의 역사문학). 다행이도 이 책에 실린 여덟편의 소품문에서는 두 가지 혐의를 발견할 수 없다.

<노자, 함곡관으로 돌아오다>는 중국인의 현실주의를 잘 드러내 주는 작품이다. 소를 타고 인간이 없는 사막을 찾아 도와 덕을 찾으려고 했으나, 자신이 아끼던 소만 죽이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 이렇게 말한다. 검둥이 소가 내 선생이 됐던 거지. 그는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네. 즉 인간관계를 절대로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과, 인간관계를 떠나면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이지. 도덕이나 열심히 떠들어대며 사막으로 뛰쳐나가기보다는, 오히려 일반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어가 한 포기 묘목부터 시는 게 좋다는 것이지.

<역사소품>이란 계몽적 성격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편마다 선전문학을 뛰어넘는 문학적 아취를 품고 있다는 것도 말해두고 싶다. 예를 들어 <노자,함곡관으로 돌아오다>의 중의적 구성은 이렇다. 1)사막으로 떠난 노자로부터 <도덕경>을 받은 관윤(문지기)이 <도덕경>의 탈속적인 세계관에 취해 나무 밑에 거지처럼 누워 있다. 2)사막으로 떠났던 노자가 허기와 갈증에 지친 채 돌아와 관윤에게 물과 떡을 얻어먹고 마시며 인간 세계를 찬미한다. 3)속세로 돌아가는 노자를 향해 관윤이 욕을 해댄다. 이 짧은 소품문의 주제는 노자의 현실 긍정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노자가 환속의 소감을 펼치는 2)가 아니라, 관윤이 두 번이나 농락당한 1)과 3)이다. 노자는 탈속이나 현실 어느 양쪽에도 포함되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이 소품문의 묘미가 있다.

(노자는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소를 찾아보려 했지만 늘 놓치곤 했다. 다른 관점에서 노자의 소를 만날 수 있기를기대한다.)


소리의 황홀
윤광준 지음/효형출판
<소리의 황홀> 윤광준
솔직히 말하면 내가 진짜 부러웠던 것은, 오디오 평론가라는 직업이 아니라, 그가 직접 거금을 들여 설렵했던 오디오 편력이다.
윤광준은 간곡히 오디오 파일들에게 권한다. 인간에게 유보시킬 행복은 없다. 가장 절실할 때 가질 수 없는 것은 불행이 아니고 또 뭐란 말인가.

(너무나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또한 다음에 나오는 돈이 없다는 게 이런 빈곤함을 더 해준다. 오디오 정신은 그냥 정신일 뿐이다.)

저 무지막지한 오디오 정신을 깨달았다. 무릎 위에 얹어 놓거나 머리에 이고 있을 작정으로라도 좁은 방 안에 탄노이를 들여 놓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결심을 뒷받침해줄 돈이 없다는 게 새삼 깨달은 오디오 정신을 빈곤하게 한다.


갈등의 핵, 유태인
김종빈 지음/효형출판

<갈등의 핵, 유태인> 김종빈
유태인과 유태교는 물론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폭넓고 재미난 지식과 논란거리를 제공하는 책.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전략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의 건국은 처음부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스라엘 탄생으로 인해 아랍 산유국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소련의 진출을 허용하는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생겨나지 않는 편이 서방측을 위해서는 훨씬 좋았다. 나중에 달라졌지만 영국의 경우는 노골적으로 아랍편이었던 것이다." (한데) 이스라엘 건국의 필요성은 최초로 선포한 벨포어 선언은 영국인의 입에서 나왔다. (왜 일까? 몹시 궁금하다.)

소련과 동구 공산주의 국가들이 1947년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에 무더기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건국은 불가능했다. ... 현실주의자 스탈린은 유태인 국가가 서방측과 가까운 국가가 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보아 크리스쳔들은 유태인을 핍박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 독일전쟁 기간 동안(특히 후반) 아랍권은 영국과 밀착해 있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영국은 기권했다.

랍비와 시냐고그를 중심으로 전승되는 오늘날의 유태교가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3세기부터다. ... 제사장이나 사제 같은 기존 상류층에 속한 성직자들, 성전에 상주하는 정통파격인 사두개파 그리고 토라(씌여진 율법) 연구의 재야 지도층, 스스로 율법 연구에 나선 신생 그룹인 바리새파 이렇게 대립하고 있었다. 바리새파는 정통이 아닌 오늘날로 말하면 수정주의자들인 셈이다. 바리새파에서 랍비가 나왔다. 저자는 기원 전후를 기점으로 사두개파나 바리새파와 다른 순수 신앙 공동체로 에쎼네파를 들고 있는데, 예수가 이 종파에서 나왔다는 유력한 설들이 나오고 있다.

유태교는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의 세계가 있음을 믿긴 하지만, 기독교나 불교처럼 철저하지 않다. 토라에 천당과 지옥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유태교 신앙에서는 물리적인 형태의 천당과 지옥을 분명하게 내세우지 않고 있다. 편안한 마음의 영혼이 안주하면 그것이 천당이고, 자신이 저지른 죄업에 대한 후회와 번민으로 보낸다면 그것이 바로 지옥이라는 개념이다. 이런 점에서 유태인들은 대단히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으로도 유태인들의 관심은 현세에 있다. 내세에 대한 강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에쎄네파이다. ... (에쎄네파는 1947년 대량의 문서가 발견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문서들을 분석한 학자들은 이 기록을 남긴 에쎼네 종파가 기원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와 유사한 신앙체계를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유태인들이 보는 예수 그리스도관은 어떨까? 유태인들은 예수를 윤리와 유태교 전통생활에 매우 충실했던 출중한 랍비로 보며, 로마 치하에서 유태민족을 해방시키려고 했던 행동주의자적인 인물로 본다.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때문에 로마 관헌들에게 예수는 모험주의적인 민족 지도자로 비쳤고 그래서 처형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 예수가 유태교를 패하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 했다고 보지 않는다. 노쇠한 종교 지도자들의 자의적인 율법 해석과 세속적인 부패를 질타하는 젊은 예언자가 속출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예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유태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수가 없다고 한다. ... 유대교의 메시아관에 따르면 메시아는 단 한 번 오는데, 메시아가 오면 세상의 불의가 없어지고 가난, 고통, 불화가 사라지는 평화 시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새상이 그렇게 바뀌었냐고 반문한다. 그것이 메시아가 세상에 오지 않았다는 증거라는 주장이다.

유태 역사에 메시아를 자처한 예언자들은 많다. 그런데 유태인들의 메시아는 종교적이라기보다 군사적인 의미가 더 크다. ... 메시아는 다윗처럼 군사적 리더라는 측면이 강했다. ... 특정한 메시아가 나타나 어떻게 리드한다기보다는 그런 시대가 메시아적 시대이며 유태인들이 바라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유태인의 내세관이 기독교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것처럼, 죄의식 역시 그렇다. 유태인은 기독교에 비해 죄의식이 가볍고 그리 큰 비중을 처지하지 않는다. 남에게 잘못을 저질럿을 경우 그 당사자에게 그 허물의 용서를 청한 후에야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그렇지 않고 기도만으로는 안 된다고 본다. 다시 말해 계율보다는 일상생활에서의 일반적인 윤리의식이 더 강조되는 것이다. 이 또한 유태인의 현실주의를 보여준다.

(기독교는 모든 죄를 신이 용서해 준다는 것은 그의 대리인이라 자칭하는 성직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언어도단이다. 모든 죄를 용서해 줄 수 없다. 당사자가 먼저 용서해야 마음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7세기 중엽에야 창시된 이슬람교는 유태인들의 일신교 체계를 고스란히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 다윗, 모세의 계보는 물론 예수까지를 알라의 예언자로 보며, 마호메트가 알라의 최대, 최후의 예언자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이슬람교는 유일 인격신의 종교인 유태교 그리고 기독교라는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완결된 유일 인격신의 종교라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아담과 이브나 노아에 대해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을 첫번째 유태인으로 본다. 까닭은 아브라함이 신과 계약을 맺은 최초의 선조이기 때문이며, 이라크 지역에서 살고 있는 유태인을 오늘날의 팔레스타인(가나안) 지역으로 이주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서기 70년.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 기나 긴 디아스포라(흩어짐)을 겪게 되는 유태인은 나라가 없기 떄문에, 가장 문명화된 나라와 도시를 찾아다녔다. 그들이 문명화된 지역을 애써 찾아 다닌 것은 그만큼 차별받지 않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생존술은 역설적으로 유태인으로 하여금 누구보다 앞서 선진 문명을 습득할 수 있게 했다.

유태인에 대한 정의는 첫째, 유태교를 믿고 그 율법에 따른 생활을 하는 사람(종교적), 둘째, 부모가 유태인인 사람(인종적), 셋째, 유태인의 전통 문화유산과 그 관습을 따르는 사람(문화적)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인종적, 문화적인 규정보다, 종교를 더 중요시 한다. 하지만 유태교 교단에 따라 교리상의 간극이 너무나 커서 서로를 적대시하기도 한다. 인종보다는 종교를 더 중요시하는 한편 민족과 종교 또한 동일시하는 유태교는 그래서 타 인종에게 선교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출발부터 잘못이다. 잘못된 출발은 늘 문제가 생긴다. 꼬인 밧줄을 풀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 아니라 잘라내야 하는데 지금은 그것도 불가능하다. 다만 부러운 점은 유대인의 현실적인 사고방식이다.

예수에 관한 내용은 기독교에서는 반대하겠지만 공감한다. 예수 이후에도 재림예수라고 말하는 맣은 유사종교가 얼마나 많았던가. 출발도 같고 모든 것이 비슷한 이슬람과 기독교의 반목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둘 모두의 성지 예루살렘도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으니 책에서도 언급하지만 서방과 이슬람의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과 이슬람의 반목이다. 그 대리인인 미국이 앞장설 뿐이고.)


비극의 현대지도자
서중석 지음/성균관대학교출판부

(장장일이 여러쪽에 대해 서술했고 가장 관심가는 부분이다. 별도로 정리해야 한다. 아쉬운 점은 절판이다. 이 책은 꼭 읽고 싶다.)



나의 아버지 여운형
여연구 지음, 신준영 엮음/김영사

<나의 아버지 여운형> 여연구
이 책에 해설을 쓴 정병준 역시 여운형의 사상적, 이념적 모호성과 불명확성을 지적하면서도 "당시의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정 인명보다도 구체적인 실천"이 더 중요했음을 꼽고 있다. 야운형의 그러한 노력은 좌우합작을 성사시키기 위해, 1946년 한 해 동안 무려 다섯 차레나 북한으로 밀행하여 김일성과 회담했던  사실에 함축되어 있다. 부르조아 민족주의만 아니라면 누구와도 만나려고 했던 좌우합작에 대한 비상한 노력 때문에 여운형은 남과 북에서 동시에 존경받는 드문 정치인이 되었다.

여운형의 딸로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내기도 했던 여연구가 쓴 부친의 평전이다.

(김일성과는 여러 곳에 연결고리를 만들고 박헌영은 너절한 인물이며 민주역량을 균열가게 만든 사람으로 묘사한 것은 여연구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김구에 대한 지적 한 가지. 어린 여연구가 아버지에게 "어쩌면 그렇게 정세판단을 못할까요?"라고 묻자 여운형은 "김구가 반탁하는 것은 이승만과 다르다. 몰라서 그러니 욕하지 말고 깨닫게 도와줘야지"라며 그의 고지식과 이승만의 단정 야욕을 구분한다. 그러면서 여연구는 "김구는 자기의 반탁노선이 결국 이승만의 단정 야망 실현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야 깨달았다"고 쓴다.

(서중석의 <비극의 현대지도자>에 언급된 김구와 같다. 많이 배워야, 많이 일어야 함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김구가 온몸으로 맞은 상황이 그를 고지식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몽양의 말처럼 의도는 순수하다. 김구가 조금 더 현명하게 대처했다면.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아쉬운 점이다.)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이옥순 지음/푸른역사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이옥순
'서구의 눈'으로 동양을 바라보는데 길들여진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인도에 대해서 하나같이 똑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즉 인도는 미성숙하기 떄문에 문명화되어야 할 대상이며, 때문에 계몽이 필요한 인도는 종종 여성이나 어린아이로 묘사된다.

많은 한국인들은 영국인들과 똑같이 인도를 "반문명, 반현대의 이미지로 본질화"하면서 인도를 정신주의, 요가, 명상, 자연의 땅으로 묘사한다. 한국의 여행자나 작가들은 변화중인 인도의 현재나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을 뿐더러, 인도인과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 서구인으로 인도를 보는 한국인들의 도착된 태도에 저자는 "나는 19세기 제국주의자 영국에게 감염된 우리의 인도보기를 복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명명한다."

한국의 복제 오리엔탈리즘은 일본제국주의으로부터 수입되었다. 일본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기로 결심하면서 동양에 대한 멸시를 국시로 삼았으니, 1885년 발표된 우큐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론이 바로 그것이다. 36년 간의 일제통치는 우리에게 동양에 대한 멸시를 심어주었으며, 독립을 위한 민족자강 운동은 물론 독립 이후의 근대화 역시 일본과 마찬가지로 '서양에 동화하고 모방'하는 과정이었다. 인도는 우리의 후진성을 잊게하고 우리를 서양과 동일시하기 위해 상상의 이미지로 존재해야 한다.

이 책은 독자들이 무심코 "영국 식민주의가 만들고 구성한 인도의 범주화와 이미지"를 모방하고 확대하여 "오래된 인도 관련 지식을 재생산"하지 말 것을 권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서양이 누리는 지적 권위와 지배적 위치를 탈중심화하여, 말 할 수 없는 변방을 응시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해보라고 말한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세상은 "서양의 독무대가 아니라 서양과 비서양이 모두 참여하는, 중심과 변방"이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백인인 척 우리보다 얼굴색이 짙은 사람을 무시하지만, 흰둥이가 보기에는 단지 바나나일 뿐이다. 겉은 노랗고 속만 하얀, 즉 백인 흉내를 내는 바나나에 지나지 않는다. 다문화 사회로 가고 있는 우리 사회에 없어져야 할 복제 오리엔탈리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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