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는 장정일만 읽었다. 중간마다 다른 책을 읽었지만, 이빨 빠진 독서일기를 채워 읽었다. 6권을 읽고 4권 그리고 3권을
읽었다. 지금은 5권을 사서 읽고 있다. 도서관에 가면 있지만 구매해서 읽고 싶었다. 역순으로 읽으니 독서일기에서 장정일의
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을 만드는 모든 분께 절을 올리고 싶다. 당신들, 당신들을 진정 사랑한다.
《장정일의 독서일기》의 끝을 바라보고 있다. 장정일이 독서일기란 이름으로 계속 출간하지 않은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고 느낀다. 장정일의 생각과 같은지 장담할 수 없지만.
독서일기 전편으로 갈수록 읽은 책이 종종 더 보인다. 아마도 1980년대 책이 가끔 독서일기에 나오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흔히 예술은 불온한 것이라고 말해지지만, 굳어진 형식에 아무런 충격을 가하지 못하는 작가의 더듬거림은 체제에 대한 '고해'에 불과하며 시비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장인정신은 아버지가 심어 준 '내면감시'에 불과하다. 그리고 자기 갱신의 열정 없는 기계적인 글쓰기는 선생님에게 보이는 매일매일의 '일기 쓰기'에 불과하지 않는가?
책
뒷면에 쓰여 있는 글이다. 자신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해 쓴 글 중에 있다. 단지 독서일기 몇 권인지는 모르지만
"我와 彼我를 구별하지 못하는 지식인은 민간인"이라는 말이 생각날 뿐이다. '자기 갱신의 열정 없는 기계적 글쓰기"를 염려하고
있다. 먼저 충격을 받지 못하는 책 읽기를 버리고 불온함을 받아들이고 살아있는 글쓰기를 하라. 이상. 끝.
장정일의 독서일기 3 장정일 지음/범우사 |
덧_
독서일기을 읽고 내가 다시 세상에 내 놓은 책을 아래에 적는다.
장정일이 책에 대한 인용한 부분과 그것에 대한 생각이다. 장정일의 부연과 인용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았다. ( )에 부연된 것은 나의 생각이다.
<영혼의 집> 이사벨 아옌데 (둥지, 1991)
영혼의 집 1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민음사 |
지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칠레의 사회주의 정부는 왜 군부 반란으로 무너졌을까? 작가(아옌데 대통령의 조카이다)는 책에서 말했다. "좌익의 극단주의자들이 우익의 극단주의자들보다 대통령에게 더 많은 해를 끼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내게는 이론가들이나 내뱉을 그런 판단버다, 소설가적인 상상이 낳은 다음과 같은 촌절하는 경구가 더 흥미롭다. "공산주의는 마술적인 측면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공산주의가 이길 승산이 없다고 말했었을 때 그게 무슨 의미였었는지를 깨달았다."
(장정일은 흥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마지막 인용구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작가나 장정일은 무슨 의미였는지 깨달았는데 나만 헤매고 있다.
작품에서는 구체적인 지명을 말하는 대신 '그 나라'라고만 지칭하고 있지만, 이 작품은 작가의 조국 칠레의 현실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민음사에서 1, 2권으로 2003년에 출간.)
<변태> 수잔 크레인 베이코스 (가서원, 1995)
(장정일은 다 알고 있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읽었지만 난 별로 읽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단지 그의 글을 인용할 생각으로 다시 적어 놓는다. 우리는 성에 대해 너무나 이중적인 생활을 한다.)
성행위에 국한되는 변태행위는 질병인가? 혹은 범죄인가? 아니면 예전에는 변태로 치부되던 것이 오늘에는 보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오랄행위와 같이 시대에 따라 그 기준이 변하는 기호일 뿐인 것인가?
단순하게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가치중립적인 용어를 써서 비정상적이라고 불러야 되는가? 정상이란 다만 통계적인 개념일 뿐임으로.
(세스 고딘도 "정상이 아닌 것은 모두 별종"이라 했다. 또한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이상한 것이 많은 세상이다. 별종은 정말 이상한 것인가? 장정일의 일기가 1995년이니 18년 전이다. 변태가 별종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세스 고딘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멀리서 바라보면 모두 정상이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정상은 사라진다. "별종은 도처에 존재"한다. 우리는 때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간다. 하지만 별종은 존재하며, 별종의 힘은 날마다 성장한다. 별종은 아주 많다. "그것도 아주 많이" 존재한다.
세스 고딘은 별종을 강조하고 있다. )
<위대한 케츠비> 피츠제럴드 (문예출판사, 1994)
(장정일은 세번 째 읽었다고 했다. 나는 올 초 매달 고전 다시 읽기 프로젝트를 한다며 펭귄클래식으로 구매했다. 프로젝트로 거창하게 일을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두게 된다. 그냥 편하게 읽자.)
<중국성풍속사> R.H. 반 훌릭 (까치, 1993)
선사 시대부터 명 왕조까지 약 3천 년 동안에 이르는 중국의 성풍속을 살피고 있다. 제목 때문에 이 책을 선택하는데 저어하는 독자가 있어 일독의 기회를 포기한다면, 중국에 돤한 좋은 이해서를 눈 뻔히 뜬 채 놓치는 우를 범하는 셈이다.
교접은 우주적인 힘인 음과 양의 구현체이며 생명의 근본이라고 받들어진다. 여기서 양은 남자, 음은 여자를 가리키는데, 음양이라는 말에서 보듯 <역경>의 세계 내에서 항상 우선하며 강력한 힘을 나타내는 것을 음이다. (여러가지 이유를 대지 않아도) 고대 중국사회가 모계제였다.
여성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한 것은 신유가의 시조인 주희가 유학을 재정비하기 시작한 송나라 때부터이다. 순수한 혈좉을 보존하기 위해 여자의 정절을 강조햇던 유가는 남녀유별이라는 원칙에 청저해서 부부간의 육체적 접촉은 잠자리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규칙이었고, 잠자리에서 벗어나면 그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접촉해거는 안된 되었다. 중세 교회가 그러했듯이 유학자들이 성행위를 죄악으로, 여자를 이런 죄악의 뿌리로 생각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도교의 전통은 명조 이전의 중국인의 성생활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
송이 패망하고 중국이 최초로 한족이 아닌 타민족의 지배를 받게 된 원대에, 한족 최대의 근심거리는 어떻게 정복잘등이 자기 집안의 여자들에게 치근거리지 않도록 막을 수 있을 것인가하는 점이었는데 그 필요 때문에 유교의 규칙들은 좀더 높이 평가되기 시작했다.
송과 원대의 저자들만 하더라도 정확한 역사적 관점을 취했던 반면에, 명 왕조에는 기존의 모든 관습들을 고대의 문헌 특히 주나라와 한나라 대에서 끌어오는 억지를 낳았다. 예를 들어 당 왕조와 송 왕조 사이의 약 50년 동안에 시작되었던 전족의 역사를 이미 주나라와 한나라 시대에 존재했다고 증명하려는 따위가 그렇다. 명나라 시대는 중국문화가 전례없이 번성한 떄였으나 명의 소멸과 함께 중국인 고유의 혈기 넘치는 경쾌한 기풍은 사라졌으며 성교는 쾌락이기보다 중압감으로 변했다.
(이 부분은 중요하다. 삼국지의 주석을 이해하는데 큰 시사점을 줄 것 같다. 이러한 생각들이 소중화 조선에는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바라보는 것도 흥미로운 주제일 것이다.)
청나라 시대에 형성된 고립주의적이고 침체적인 경향의 싹은 명대에 내재하여 있었으며, 결국 그 이후 중국문화 전반의 발전은 저지되고 말았다.
(性으로 중국의 사상사를 보여준다. 역사는 연관이 있다. 저절로 하늘에서 떨어지듯 생기는 것이 아니다. 볼수록 모르는 것은 많아지고 볼 책은 많아지고... )
<매춘의 역사> 번 벌로, 버니 벌로 (까치, 1992)
매춘의 역사 번 벌로 지음, 서석연 옮김/까치글방 |
(다 알고 있는 이유로 장정일은 읽었다. 나는 매춘에 관한 기록을 위해 여기에 남긴다.)
매춘은 금전적 대가를 목표로 이성을 유혹하는 행위다. 그러나 이 의미 규정은 성행위 전후에 곧바로 금전을 치루는 전통적인 형태의 매춘에만 타당한 설명일 뿐더러, 미묘한 계급적 편견을 드러내는 일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류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동거 형태, 이를테면 내연의 처 관계를 매춘이라는 규정에서 면죄시켜 준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금전으로 확산되지 않는 다른 경우의 거래를 예외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대가가 따르는 모든 형태의 혼외 성교를 모두 매춘이라 규정하고자 할 것인가?
(매춘의 규정이 한정적이다. 그리고 장정일의 말처럼 광의의 매춘을 규정하면 (이것도 장담 못하지만) 성직자를 제외하곤 모두 매춘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음은 공창에 찬반이 나오는데 이 또한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매춘을 없앨 수 없다. 간단히 이야길 문제는 아니다. 매춘의 원인이 되는 빈곤과 약물 같은 사회악을 제거하면 매춘이 없어질까? 난 이점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든다. 금전을 매개로 양자 간에 합의된 성행위는 남, 여가 존재한다. 공급이 없어지면 수요의 대가가 올라가고 그렇다면 공급이 늘어나는 것이 시장 원리가 아닌가. 매춘을 시장논리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사회악을 일거에 없앤 정부는 역사이래 어디도 없었다는데 그 맹점이 있다. 그렇다면 매춘은 공창이 옳은가?)
<오해> 원재길 (민음사, 1996)
80년대의 여러 중산층 소설이 보여주었던 내 집 마련 성공담의 90년의 변용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소박한 리얼리즘을 훨씬 상회하는 심리적 리얼리즘을 보여준다. 까닭은 그토록 원햇던 전원 생활지에서 상식있어 보이고 선량해 보이는 두 사람이 범죄자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책이 알려지지 않고 지금은 절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은 단지 오해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오해가 잘못된 출발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20년이 지나 사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오해는 여전히 유효하다.
오해는 편견, 욕구불만, 질투 등에서 나온다.)
오해의 근거는 수성과 이기주의의 두꺼운 갑옷에 감싸여진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찾아져야 했다. 전원은 도시인의 꿈이지만, 그들이 전원으로 향할 때는 도시인의 악몽도 함께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닐까? 전원에서의 삶이 도시인의 순정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악덕을 드러내는 역설로서도 기능한다. 도시란 그들이 돈벌고 살면서 더렵혀 놓은 곳이다. 그러니 그곳에서 돈벌고 그곳을 더럽혀 놓은 곳이다. 그러니 그곳에서 돈벌고 그곳을 더렵혀 놓은 자들은 도시를 재생해야 할 의를 마땅히 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도시를 더럽게 착취한 자들이 가장 먼저 전원주택을 갖게 된다.
<오해>가 중요한 것은 대화, 신호체계, 선입관과 같은 사소해 보이는 인간 조건의 한계와 동물적 본능에 대해 이 작품이 생각할 기회를 준다.
인간관계에서도 대화 부재로 숱한 오해가 빗어진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그런 오해를 발본색원하는 일이 쫀쫀한 것으로 또 새월이 약이라는 식으로 무시되어 왔다.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문예출판사, 1994)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문예출판사 |
<1984>와 함께 20세기의 기술 과학과 전체주의를 고발하는 문명비판 소설의 높은 자리를 차지해 왔다. 전체주의와 그 토치술을 고발하려 했던 오웰과 달리 헉슬리는 이 소설에서 인간 또는 문명을 억압해 온 가장 강력한 전범을 가리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항상 불만족스럽게 살고 있는 이유는, 욕망과 충족 사이의 수급 불균등 때문이다.
훈련된 아이들은 자라서 필요에 따라서나 능력에 따라서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바, 헉슬리의 세계는 그것을 윤리화라고 말한다.
(우리가 윤리라고 부르는 것과 많이 차이가 나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스스로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배운 대로 만족한다. 무서운 일이다. 붕어빵을 원하고 있지 않은가. "미래학은 미래가 현재화된 것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재즈 - 원초적 열망의 서사시> 아르노 메를랭, 프랑크 베르제로 (시공사, 1996)
재즈: 원초적 열망의 서사시 아르노 메를랭 지음/시공사 |
이 책은 재즈 보칼에 대해 한마디의 거론도 없는 대신 존 맥러플린, 팻 메시니, 래리 칼턴 등의 기카리스트를 언급하는데 그 까닭은 비틀즈 이후 록이 전면으로 나서면서 외곽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제즈가 록과 제휴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반영한 듯하다. 저자는 마일즈 데이비스가 록 기타의 신화 지미 핸드릭스를 만났던 순간을 적고 있다. "1968년 데이비스는 록 기타의 영웅 지미 핸드릭스를 만났다. 핸드릭스는 블루스의 힘을 팝의 보편성에 결합시킨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데이비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중요시되지 않던 기타가 재즈의 진보를 이끌 악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윙하지 않은 것은 재즈가 아니다. 다시 문제는 스윙이다. 스윙은 다양한 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아직도 그 힘을 잃지 않고 있다.
(독서일기에 재즈 관련 책이 꼭 한두 권 있다. 다시 문제는 스윙이다. 공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