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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술 사주는 읽고쓰기

글쓰기가 굉장한 즐거움이었고 그 무엇보다 자극적인 일이었다 : 헤밍웨이의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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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에게 글쓰기에 관한 질문을 하면 "나비의 날개 위에 무엇이 있든, 매의 깃털이 어떻게 배열되었던 그것을 보여주거나 그것에 관해 말하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편저자 래리 필립스의 노력(?)으로 헤밍웨이의 소설, 편지, 인터뷰 그리고 기사에서 글쓰기에 관한 글을 모았다. 편저자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글쓰기에 관한 글도 엮어 책을 펴냈다.

편저자는 "이 글 모음집이 많은 문장이 태어나는 데 이바지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하지만 번역자도 "편집자 주석이나 각주가 전혀 없이 발췌 글과 그 글의 원전에 대한 간략한 정보만 실려 있어 글의 배경지식 부족으로 문맥의 파악이 어려워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말한다. 토막글로 편집자의 편의로 잘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그럼에도 "헤밍웨이의 지혜와 위트, 유머, 통찰력은 물론 작가로서 흠잡을 데 없는 고집과 전문성까지 두루 경험"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스콧 피츠제럴드와 애증 관계를 보여준다.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에게 글쓰기에 관해 많은 충고 또는 조언의 편지를 보냈다. 그것은 "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의 표현이다. 피츠제럴드로서는 기분도 나쁘고 자존심도 많이 상했으리라 보인다.

이 책을 통해 헤밍웨이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그의 표현은 단순하고 거침없다." 하지만 "동료 작가들에 대한 진심 어린 충고는 문학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진솔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 쓰기를 권한다. 그가 혐오하고 꺼린 글은 "거짓된 글, 돈벌이를 위한 현실에 타협하는 글, 정치적 성향을 띤 글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근대 문학도 백 년이 되었는데 이러한 시도가 없다는 것이 독자의 한 사람으로 아쉬움을 느낀다. 그보다도 이쪽에서 밥벌이 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아쉬움이 더 크다. 그들은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 만일 그들이 직무유기가 아니라면 이 땅에는 진정한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 중 어느 것이 옳은지는 모를 일이다.

책의 내용 전체를 모두 옮겨 적을 수 없고 기억하고 싶은 아니 다시 읽고 싶은 글귀를 적어본다. 또한, 스콧 피츠제럴드와 관련된 편지글 일부도 적는다. 둘의 관계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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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은 진실한 글이다. 누군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면 그 이야기의 진실성은 작가가 지닌 삶에 대한 지식의 양과 진지함의 정도에 비례한다.
그래서 작가가 이야기를 창작할 때 그 이야기는 작가만큼 진실해진다. (기사작성)

카를로스가 후안에 대해 악담을 하거든 누가 옳은가 하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양쪽 처지에서 생각해보게. 사람마다 그래야 하는 일이 있고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 있네. 또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도 알게 되지.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밀고 나가야 하네. 하지만 모름지기 작가는 어떤 판단도 해서는 안 되네. 그저 이해해야 하지. (기사작성)

이건 제 평생을 바쳐 쓴 글(노인과 바다)입니다. 쉽고 편안하게 읽히는 짧은 글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면이 담겨 있고 동시에 인간의 정신세계도 담고 있지요. 지금으로서는 내 능력으로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글입니다. (찰스 스크리브너에게, 1940)

소설을 집필할 때 어떻게 전개될지 알고 계십니까?
거의 모르지, 이야기를 시작하는 건 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부터는 소설 속에서 일어나야 할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거든. (기사작성)


매일 글쓰기 작업을 시작하시기 전에 앞서 썼던 부분을 어느 정도나 다시 읽으시나요?
가장 좋은 방법은 매일 처음부터 다시 읽는 거라네. 그렇게 글을 다시 읽으면서 수정을 해나가다가 어제 멈췄던 부분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지. 전체 원고 분량이 너무 많아서 매일 다 읽을 수가 없는 경우라면 두어 장 정도 되돌아가 읽어도 되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만 처음부터 다시 읽게. 그렇게 해야 전체 이야기가 전체 이야기가 통일될 수 있거든. (기사작성)

나는 적어도 천년동안 지속하여 온 욕설만을 사용한다. 한때 반짝했다가 곧 퇴색해버릴 글이 될까 봐 두려워서란다. (캐롤 헤밍웨이(다섯째 자녀)에게, 1929)

저는 애국자도 아니고 왼편이나 오른편으로 치우치지도 않을 겁니다. 조만간 나는 왼편이든 오른편이든 중도든 상관없이, 일해서 먹고 살지 않는 정치 놈팡이들을 기관총으로 겨눌 겁니다. 일이 아니라 정치로 먹고사는 사람은 누구라도 표적이 될 거란 말입니다. (폴 로메인에게, 1932)

후대에 관하여 : 글을 진실하게 쓰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후대의 일은 후대가 알아서 하겠지요. (아서 미즈너에게, 1950)


예술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떡 두 가지일세. 돈을 주는 것과 그가 할 일을 알려주는 것. 객관적인 요구는 이 두 가지뿐일세. (어니스트 월시에게, 1926)

나는 편지가 쓰고 싶네. 편지를 쓰는 건 일은 하지 않으면서도 뭔가 해냈다는 느낌을 주는 아주 멋진 방법이거든.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1925)

내가 출판하기를 원하지 않는 글을 당신이 출판할 권리는 없습니다. 그건 카드 게임을 하면서 속임수를 쓰거나 남의 책상이나 휴지통을 샅샅이 뒤지거나 개인적인 편지를 읽는 것이나 매한가지로 인간이 인간에게 할 젓이 아닙니다. (찰스 팬터에게, 1952)

평론가들이란 사람들에게 어떤 속성을 덮어씌우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생각했던 것과 다른 모습을 발견하면 본성을 속이고 살아간다고 비난을 하지요. (맥스웰 퍼킨스에게, 1926)

글을 끝내기 전에 온 세상을, 아니 제가 보았던 만큼은 그려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얇게 펼쳐내기보다는 늘 압축하고 요약해내려고 합니다. (폴 파이퍼 부인에게, 1933)

좋은 책은 실제보다 더 진실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좋은 책을 읽고 나면 그 이야기가 모두 나에게 일어난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좋은 일, 나쁜 일, 절정의 환희, 후회, 슬픔 그리고 등장인물들과 배경이 되는 장소와 날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나의 경험이 된다. (기사작성)

정말 좋은 글이란 아무리 여러 번 읽어도 도대체 어떻게 썼는지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위대한 글에는 수수께끼가 존재하고 그 수수께끼는 파헤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계속될 것이며 언제나 유효합니다. 그래서 좋은 글을 다시 읽을 때마다 우리는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내거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지요. (하이 브레이트에게, 1952)

나는 글쓰기를 아주 좋아한다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글쓰기가 쉬워지지 않아.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잘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해도 글을 쉽게 쓴다는 건 기대할 수 없다네. (브라그 주니어에게, 1959)

좋은 글은 저절로 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도 아닙니다. 글쓰기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도전으로 내가 지금껏 했던 그 어떤 일보다 어려운 일이지요. 그래서 나는 글을 씁니다. 그리고 글이 잘 써질 때 저는 행복합니다. (이반 카쉬킨에게)

글쓰기가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까?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럼요. 확신하십니까? 확신하고 말고요. 그렇다면 참 즐거운 일이겠군요. 그럼요. 글쓰에 관련된 일들은 모두 즐겁습니다. (아프리카 푸른 언덕)

글쓰기는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그것이 글을 쓰는 진짜 이유였다. 전에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의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글쓰기가 굉장한 즐거움이었고 그 무엇보다 자극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닉 애덤스 이야기)

시베리아 유배가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작가를 만들었다. 쇠를 두드려서 칼을 만들듯 작가는 부당한 일로 단련이 되어 만들어진다. (아프리카 푸른 언덕)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인간에 관해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는 것이다. 먼저 그 주제에 대해 알아야 하고 그다음엔 어떻게 써야 할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배우는데 평생이 걸린다. (기사작성)

모든 이야기는 한참 진행되다 보면 결국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니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 작가는 진정한 이야기꾼이라 할 수 없겠지요. (오후의 죽음)

게티즈버그 연설문이 짧은 것은 우연이 아니지요. 산문 글쓰기의 법칙은 수학, 물리학, 비행의 법칙처럼 변하지 않는답니다. (맥스웰 퍼킨스에게, 1945)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해 궁리를 해보았다. 어쩌면 그렇게 형편없는 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형편없는 글을 써서 읽는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걸까? (이동 축제일)


*

스콧은 문학을 너무나도 엄숙하게 대합니다. 문학이란 능력껏 잘 쓰고 시작한 것을 끝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요. (아서 미즈너에게, 1950)

글이 형편없고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일 때도 그냥 계속해서 써나가야 하네. 소설을 다루는 방법은 오로지 한 가지뿐일세. 빌어먹을 이야기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지.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1929)

지금 난 아주 굉장한 소설을 쓸 예정이네. 하지만 그 소설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네. 말로 하면 글로 쓸 때 그것을 아주 쉽게 생각하게 되고 또 입 밖에 내버리면 부정을 타게 되니까.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1927)

구경꾼들이 글이 좋다고 큰소리로 성원을 보내거나 글이 좋지 않다고 야유를 보내도록 그냥 내려버려 둬도 자네는 아무 일 없이 잘 지낼 수 있을 거네.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1934)

어떤 책의 잘된 부분은 작가가 운 좋게 귀동냥한 이야깃거리일 가능성이 있네. 아니면 작가 자신의 고된 일생의 잔해일 수도 있지.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낫다고 할 수는 없어.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1929)

자네가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만들어 글을 써야만 하네. 그리고 인물들의 전력에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해.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1934)

자네 <대지의 성장>을 읽어보았나? 그다음에는 제발 <톰 보이드>를 읽도록 하게...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1925)

그 소설들이 매춘이라는 게 아니라 그저 잘못된 판단이라는 말일세. 소설을 써서도 충분히 살아갈 만큼 돈을 벌 수 있네. 이 어리석은 친구야, 어서 소설을 쓰게.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1929)


덧_
가끔, 순서가 관계없는 책은 마지막 챕터부터 읽는다. 던져주는 대로 읽지 않겠다는 소심한 일탈이다. 이 책도 그렇게 읽었다.




헤밍웨이의 글쓰기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래리 W. 필립스 엮음, 이혜경 옮김/스마트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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