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오후 어느날 홍대 근처 OO북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책을 보다 잠깐 졸았다. 무슨 말을 들었는데 꿈에서 들은 이야기인지 옆 테이블에서 하는 이야기인지 구분이 안된다. 잠결에 들은 이야기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출판밥 먹은 사람처럼 보이는 몇 명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단군이래 최대 불황이 올해도 출판계를 강타하고 있다. 이대로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는 표정이 역역하다.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길거리로 나앉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공통적인 의견이다. 이벤트를 하면 좀 팔릴까, 뭘 하면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까 등등 각자의 생각을 두서없이 내놓고 있었다. 옆에서 듣기에는 모두 허접하고 재탕, 삼탕의 이야기들 뿐이었다. 그러니 ... 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때 "금서를 만들면 어떨까?"라고 누군가 말했다. 반응은 냉냉했다. 지금 몇 년도인데 쌍팔년 금서타령이냐는 표정들이다. 다시 그가 말한다. "지금 출판권력으로 불리는 출판사들이 모두 금서 팔아 오늘날 이렇게 된거쟎아. 생각해보라고. 누군가 금서로 지정을 해준다면 사람들은 관심을 가질 것이고 금서라는 호기심과 품절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않겠어. 그러면 사는 사람이 생길 것이고 누가 사면 또 옆 사람도 사는 것이 사람들 심리이니." 관심을 가지고 주의깊게 듣는 표정이다. 그가 말을 다시 이었다. "책이란게 나도 만들긴 하지만 팔린다고 다 읽는 건 아니쟎아. 일단 팔리는 게 중요하지." 옆에서 누가 말했다. "한데 금서를 누가 지정하나. 5공도 아니고. 안기부에서 지정할 것도 아니고..." 다시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몇 분 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맞은 편에서 팔장끼고 관망하던 사내가 갑자기 소리쳤다. "군대있쟎아, 군바리들에겐 금서는 아직도 있는 거 아닌가. 아무 책이나 내무반에서 못보쟎아." 다시 말을 이었다. "군대에서 내부반 반입금지 금서목록을 발표하는거야. 군대라는 특수성을 말하면서 군대반입금지면 금서 아닌가." 모두들 좋아하는 기색이 역역했다. 그러면 되겠다, 참 좋은 생각이다, 왜 그 좋은 생각을 못했을까, 넌 천재다 등 수다를 떨었다. 처음 금서를 이야기했던 사내가 말했다. "군에서 어떻게 금서목록을 발표하게 하지. 군대에 높은 사람중에 아는 사람 있어."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고 조용해졌다. 커피를 홀짝거리기도 하고 괜히 주인을 불러 커피 리필을 부탁하기도 하며 화장실에 다녀온다는 이도 있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누군가 우리가 생쥐도 아니고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겠냐며 낮술이나 먹으러 가자고 한다. 일행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두 낮술을 먹으러 카페를 떠났다.
잠결에 들은 이야기가 꿈이 아니었나. 한달정도 지났을 때 신문에 국방부 금서목록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생쥐가 정말 방울을 달았을까? 아니면 고양이가 원래 고양이가 아니고 많이 살찐 생쥐였나?
불온도서 지정은 <세계인권선언>에 반反한다
불온서적 지정은 헌법상 기본권 침해라는 원고들의 주장에 대해 재판부는 "헌법 21조2항의 사전검열 금지는 실질적으로 행정권이 주체가 돼 사상이나 의견 등이 발표되기 이전에 예방적 조치를 해 발표를 사전에 억제하는 것인데, 시중에 유통되는 서적을 불온도서로 지정하고 군 내 반입을 차단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라는 공문을 하달한 조치로 언론ㆍ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이 제한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불온서적으로 지정된 각 도서의 불온성을 판단해 달라"는 원고의 요청에 대해 재판에서 다룰 중점 사안이 아니라며 이와 관련한 원고의 주장은 참고자료로만 제출받았다. 법원은 구체적으로 어떤 책의 어떤 내용이 불온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았다. 법원이 '뜨거운 감자'를 피해감으로써 불온서적이라는 판단 자체가 타당한지, 판단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황의 특수성'이라는 이름으로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제한하는 데 있다. 더 나아가 '특수성'이라는 상황을 판단하는 주체가 누구이며 어떠한 근거에 그러한 '특수성'을 판단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없다. 기준이 있다면 '특수성'이다. 우리가 해방이후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한반도가 처한 '특수한 대치상황'이다.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에서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은 '특수성'에 기인한다는 되풀이되는 소리의 연장이다.
모든 사람은 의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권리는 간섭없이 의견을 가질 자유와 국경에 관계없이 어떠한 매체를 통해서도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얻으며, 전달하는 자유를 포함한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에도 "모든 사람은 의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정하고 있다. <세계인권선언>이 오래되어 사문서(?)되었지라도 레지스탕스이며 <세계인권선언> 작성에도 참여한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에서 이 시대에 외쳤다. "만일 여러분이 어느 누구라도 이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부디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가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의 말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보수 성향인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는 "군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할 때 기본권 침해로까지는 보이지 않는다"면서도 "법원이 기본권에 대해 일반론적인 판단만 하고 개별 책의 불온성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 것으로 보여 구체적 심리를 회피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왜냐고 묻는 우매한 질문에 '특수성에 기인한다'는 현명한 답이다. 모든 문제를 한방에 해결하는 도깨비 방방이로 사용하고 있다.
덧_
출판계가 어려우니 군대가 도와주려고 금서 목록을 발표했다는 썰(?)이 있나? 참 좋은 군대이다. 이제 금서목록에 속하지 않은 출판사들의 집단 소송이 있을 예정이라는 썰(?)도 있나? 왜 누구는 금서로 지정하고 나는 지정하지 않느냐며 금서 지정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겠다는 썰(?)이 있나. 앞으로 그 규정에 맞추어 책을 내겠다는 썰(?)도 있나.
덧붙임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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