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고추, 양파, 아스파라거스, 샐러리, 양배추, 당근, 옥수수, 가지, 상추, 감자, 시금치, 토마토…. 우리가 매일 먹거나 접하는 채소를 소재로 한 책이라서 그럴까.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친근감이 드는 이 책은 채소 20종에 얽힌 역사 속 얘기를 통해 세계사의 흥미로운 이면을 들여다본다.
책에 따르면 로마 군인들은 정복 활동 후 양파, 마늘을 퍼트렸다. 파속 식물은 휴대가 간편하고 적응력이 뛰어나며 재배도 쉬웠다. 한 채소 연구 권위자가 마늘 분포도를 만들면 로마 제국의 국경 확장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로마 군인들의 마늘사랑은 대단했다. 저자는 “파속 식물에 대한 로마 군대의 열정은 그 식물들이 힘과 용기를 북돋는다는 전통적 평판에서 어느 정도 비롯된 듯하다”며 “올림픽을 위해 훈련 중이던 운동 선수들은 당시 건강식품으로 양파를 먹었고, 검투사들은 경기장에 들어가기 전에 양파즙 마사지를 받았다”고 말한다. 양파는 치료제로 사용되기도 했다. 중세에 생양파는 개에게 물린 상처, 방광염, 독벌레에게 쏘인 상처에 좋으며, 벌꿀 및 암탉 기름과 섞은 양파는 피부의 빨갛고 파란 점을 없애준다고 했다. 하지만 양파의 가장 큰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냄새다. 미국인들은 심지어 양파의 악취를 법으로 금지하기도 했다. 일리노이 주 하츠버그에서는 영화관에서 양파를 먹는 행위가 불법이고, 미네소타 주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남편의 입에서 양파, 마늘, 정어리 냄새가 날 경우 아내와 성관계를 하지 못하게 정해져 있다.
오늘날 웰빙 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는 가지는 르네상스 시대 유럽에서 ‘발광 사과’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했다. 가지의 먹음직스러운 겉모양에 매혹된 한 서양인이 허겁지겁 가지를 먹어치웠다가 곧바로 발작을 일으켰기 때문. 하지만 이는 괴담이었을 뿐 사실은 급성 위염에 따른 것이었다. 실제로 가지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멜란자나’는 옛말로 ‘말라 인사나’, 즉 ‘미친 사과’라는 단어에서 기인했다.
책엔 트로이 목마에 몸을 숨긴 군인들이 설사를 멈추게 하려고 당근을 조용히 씹어먹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 책의 제목처럼 당근이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기에는 설명이 부족해 보인다.
18세기 유럽 사교계를 주름 잡았던 카사노바는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 굴만 애용하지 않았다. 정력을 키우기 위해 샐러리를 먹었다. 감자의 수난사도 눈길을 끈다. 감자는 17세기 초 네덜란드인에 의해 일본에 상륙했지만 19세기까지 소 사료로만 쓰였다. 러시아 농민들은 감자를 ‘악마의 사과’로 천시했으며, 아메리카에서는 19세기 중반까지도 감자는 가축에게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농부 편람’에는 감자를 급식하기 편하도록 돼지우리 근처에 심으라고 했을 정도다. 하지만 1854년 미국인 매슈 페리 제독이 천황에게 시식을 권한 것을 계기로 감자에 대한 인식이 180도 달라져 현재는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식품이 됐다.
채소는 오늘날 몸에 좋은 ‘진짜 식품’으로 사랑받고 있지만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채소를 업신여겼다. 유럽에서는 노골적으로 ‘조잡한 풀과 뿌리’라고 불리며 경멸당한 역사를 안고 있기도 하다. 채소를 매개로 한 역사적 사건과 문학 작품 속 채소 이야기 등을 인용하며 채소가 인류에게 미친 영향을 탐구한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아울러 채소가 어떤 경로로 세계에 고루 퍼질 수 있었는지를 추적하고, 영양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시각·미각적인 이점을 위해 개량되어 온 채소의 변천사도 아기자기하게 풀어냈다.
당근,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다 |
채소, ‘전쟁史 바꾼 무기’ ‘ 카사노바 정력제’
트로이 목마 속 병사 비상식량은 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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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펴는 순간 은근한 복숭아 향기가 코를 자극한다. 때론 참기름 내가 진동한다. 반투명한 여름 오징어 자태가 아른거리고, 속초 바닷가 양미리 구이집의 연기가 눈을 자극한다. 닫을 무렵이면 자욱하게 밀려오는 추억에 가슴이 얼얼하다.
글발 좋은 요리사가 혀를 달래고 기억을 어루만져주는 새 책을 냈다. 책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예각(銳角)과 서정(抒情). 강남의 스타 셰프였던 저자는 '서울 변두리 출신의 촌스러운 입맛'을 자칭하며 평범한 한 그릇과 함께한 순간을 예리하게 벼려 서정으로 버무렸다. 서해안 갯벌의 맛을 다부지게 보여주는 바지락 칼국수, 배를 뚝 갈라 간장으로 간을 맞춘 부추만두, 식은 후에 죽죽 찢어 먹는 하늘하늘한 배추전이 책장마다 황홀하게 차려진다.
책의 절정은 미식이나 포식이 아니라 허기와 궁기를 말할 때 나온다. 작은 닭 한 마리로 고아낸 양동이 분량의 닭백숙은 적은 돈으로 온 가족을 배불리 먹여야 했던 아버지가 선택한 슬픈 요리였다. 짜장면이 우리를 그토록 사로잡았던 것은 먹는 일이란 얼마나 위대하면서도 쓸쓸한지 깨닫게 해주는 마력에 있었다.
밤에는 읽지 마시라. 연락이 끊긴 옛 친구의 전화번호를 찾으려 서랍을 뒤지거나, 만장하는 식욕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부엌으로 달려가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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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지난 책이다. 무심히 지나친 책에도 좋은 책이 너무 많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
추억과 식욕 부르는 '글 한상'
이야기가 있는 음식, 맛은 추억 그 자체다
짜장면·삶은달걀,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박찬일 셰프 새책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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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운명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독초 벨라도나와 비슷하다. 철부지와 무지한 행인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이 향기 짙은 꽃들을 혐오했다. (중략) 그런데 이런 꽃에서 가지와 식물에만 있는 ‘편안하게 해주는 물질’이 나온다. 조심스레 다루면 종종 병을 치료하고 통증을 가라앉힌다.”
마녀의 능력은 한 시대를 풍미한 권력이었다. 슬픔에 젖은 사람들은 마녀를 찾아갔다. 하지만 젊고 아름답고 능력있는 여성들이 사람을 유혹하고 시대 정신을 흩트려놓았다는 이유로 마녀로 낙인찍혀 처형당했다. 종교재판관, 수도사들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또다른 권력인 마녀를 밀어내고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 15세기 전반 영국―프랑스의 백년전쟁 때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잔다르크(1412~1431)도 후에 영국에 붙잡혀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처형됐다. 재판을 통해 그는 19세 때 마녀로 낙인찍혀 이단, 우상숭배의 죄를 뒤집어 쓰고 화형을 당했다. 백년전쟁이 끝난 뒤에야 마녀 혐의가 풀렸고, 가톨릭교회가 그녀를 성녀로 시성한 것은 1920년의 일이다.
올해 잔다르크 탄생 600주년의 해를 맞아 프랑스 역사저술가 쥘 미슐레(1798~1874)의 1862년 저서가 국내에서 번역 출간됐다. 이 책은 초간본이 나올 당시 사회적 파장을 우려해 출판사를 교체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중세시대에 귀족도 남성도 아닌 사회적 약자로서 무고하게 희생됐던 마녀, 책은 14~18세기 500여년간 서구에서 종교적 이념의 잔인한 결과였던 마녀사냥에 대한 이야기다. 중세여성의 삶과 더불어 마녀로 불리게 된 사연, 마녀재판의 기록 및 마녀 처형 등 여성에게 가해졌던 어두운 역사가 다양한 자료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서유럽에서 대성당들이 하늘 높이 아름답게 솟아오른 시기에 마녀사냥과 처형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한때 ‘민중의 유일한 의사’로 칭송받던 마녀가 도마 위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서유럽 가톨릭 국가에서 사법제도와 종교권력이 결탁해 눈엣가시 같았던 마녀를 탄압하며 기득권을 키워나갔다는 게 저자의 역사관이다. 권력의 우위에 있던 중세 기독교도들은 마녀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심지어 종교재판관들은 누가 더 많은 마녀를 죽였는가에 욕심을 낼 정도였다.
어두운 광기의 시대 희생당한 마녀에 대한 기록이 여러 저서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1513년 주네브에서는 석 달 만에 500명이, 뷔르츠부르크에서 800명, 밤베르크에서 1500명이 화형에 처해졌다. 한 종교재판관이 1500명을 화형에 처하기도 했다.
방대한 문헌자료와 증언 등을 토대로 하면서도 저자 특유의 문학적 수사와 은유법을 곁들여 글을 써내려갔다. 정치게임과 경제난, 인권무시, 그 속에서 희생되는 사회적 약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등장한다. 마녀라는 단어가 현대에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개인을 무차별하게 폭행하는 행위에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이 따라다닌다. 책은 현대까지도 나타나는 마녀들의 기원을 찾고 수세기가 지나서도 존재하는 힘을 포착할 수 있는 현미경이다. 마녀라는 역사 속의 소외된 존재를 다시 불러내고 있는 이 책을 통해 현 시대를 통찰할 수 있다.
새로운 것들은 모두 사탄이었다. 죄가 아닌 진보는 없다.(393쪽)
마녀 |
중세 마녀는 ‘心身 치료사’… 교회와 ‘영역’ 겹쳤다
그들은 왜 마녀를 미워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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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를 “뇌 때문이야”라고만 하고 마치지 않는다. 책 사이사이에 그런 뇌를 이기는 방법도 함께 제시한다. 먼저 발전적이지 못하고 안주하는 뇌를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속도를 늦추라’고 강조한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히든, 속도를 늦추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주의 깊게 생각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치밀하지 못한 뇌의 성향은 어떻게 극복하는 것이 좋을까? 행복한 뇌는 단기적인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단기 목표를 먼저 세우고, 그 목표가 결국에는 장기 목표를 이루게 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 유익하다. 예를 들어, 6개월 만에 13㎏을 감량하고 싶다면 1주일에 1㎏을 감량하기로 하고 그때마다 뇌에게 목표를 달성했다는 보상을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아울러 저자는 사회신경과학자 존 카치오포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며 ‘고독을 이해할 것’을 추천한다. 뇌가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가상의 인물과 유대감을 느낄수록 현실로 돌아왔을 때 허전함을 느끼기 때문인데, 이때 자신의 감정이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인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충족감을 느낄 수 없어서인지를 이해하면, 뭔가에 중독되려 할 때 자신을 보다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으른 뇌를 이기기 위한 방법으로 저자는 뇌의 이런 성향을 정반대로 활용하는 12가지 팁을 제시한다. 크고 장기적인 목표는 뇌가 부담스러워하니 일단 쪼갤 것, 즉각적인 피드백으로 약간의 부담을 줄 것, ‘할 수 있어’라는 무책임한 긍정 대신 ‘할 수 있니?’라고 자문할 것,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합리화하고 싶을 때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날 것 등이다. 이런 팁을 잘 활용하면 소소한 실수가 초래할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 ‘주도적이지 않고 눈치보는 뇌’를 극복하기 위해선 뇌가 받아들이기 힘든 노력을 계속하면서 ‘나는 왜 안 될까?’라고 자책하는 것보다, 뇌의 이런 성향을 반대로 활용해 ‘쉽게, 짧게, 반복’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만드는 데 유리하다고 말한다. 짧고 간결하고 단박에 이해하기 쉬운 메시지가 설득력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 메시지를 아주 빨리 처리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메시지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저자는 인간의 뇌가 스마트하지 못하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우리의 뇌는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서 가장 발달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흠 없고 결점 없는 완벽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하지만 체크리스트를 곁에 두거나, 어떤 보상이 주어질 때 잠깐 멈추고 이것이 좋은 보상인지 나쁜 보상인지 생각해보거나, 옆 사람의 의견을 따라가고 싶을 때 몇 초만 생각을 멈추어보는 등의 작은 노력만 기울여도 게으른 선택이나 비겁한 포기로 나중에 후회하는 횟수는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라고 조언한다.
나는 결심하지만 뇌는 비웃는다 |
충동적이고 멍청하고 얍삽하기까지… 못믿을 뇌
‘똑똑하지 않은’ 뇌를 이기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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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많은 투사의 신변에는 묘령의 꽃과 같이 아름다운 ‘맑스 걸’ ‘엥겔스 레이디’들이 마치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르며 살풍경한 사상운동 선상에 한 떨기 꽃수를 놓아줬다.”(‘삼천리’ 1931년 7월 1일, ‘붉은 연애의 주인공들’)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 특히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에는 반드시 여성이 나온다. 남녀평등을 주장하던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에 많은 여성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대가 암울해도 청춘남녀가 모였으니 사랑이 피어나는 건 당연하다. 한 치 앞도 모를 정도로 불안했기에 이들의 사랑은 더욱 붉게 타올랐는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이 같은 로맨스는 대중의 구미를 끄는 법. 잡지 ‘삼천리’는 1931년 7월호에서 박헌영의 부인이자 당대 경성 최고의 미인으로 꼽혔던 주세죽(1901∼1955), 최초의 동아일보 여기자이며 여러 남성 독립운동가와 인연을 맺었던 허정숙(1902∼1991), 기생 출신의 정칠성(1897∼1958) 등 여성 사회운동가 10명의 삶을 ‘그들의 남자’, 즉 사생활을 중심으로 소개했다.
글은 삶이자 역사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직후까지 발간된 주요 잡지와 신문의 기사들을 재료 삼아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한반도의 굴곡진 근대사를 생생하게 복원해냈다. 인물 평전을 주로 써온 엮은이는 대중지 ‘개벽’과 ‘별건곡’, 친일 어용지 ‘삼천리’,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소련 모스크바에서 발행됐던 ‘모쁘르의 길’까지 좌우 이념을 가리지 않고 당대 발간물을 샅샅이 뒤졌다.
“요즘 창경원 앞은 사쿠라 팬들로 길이 막힌다.…예전 ‘동경조일’이라는 신문에 ‘조선인은 애국심, 즉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없기에 독립할 수 없다’는 내용의 사설이 실렸다. 그 글을 쓴 이가 오늘 창경원의 야간축제 광경을 본다면 얼마나 좋아하며 또 한 번 글을 쓰겠는가.”(‘현대일보’ 1946년 4월 24일, ‘사쿠라’)
소설가 이태준(1904∼1970)의 ‘꽃나무는 심어놓고’는 망해가는 농촌마을에 일제가 강제로 벚나무를 심게 한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그로서는 일본의 상징인 벚꽃이 광복 후에도 조선의 궁궐을 뒤덮고 있고 조선인들은 무심히 벚꽃놀이를 하는 모습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식민지 시대와 광복 직후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 및 모순을 꼬집는 풍자적인 글과 치열한 논평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일제강점기 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워온 독립운동가들이 남북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하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까지 자아낸다. 신식 ‘머리 말리는 기계’가 있던 서양식 미용실 모습과 담배를 물고 있는 신식 여성부터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며 양복에 백구두를 신고 다니는 젊은이까지 온갖 사상가와 멋쟁이들로 복작거렸던 서울 종로 밤거리 풍경 등을 그려낸 부분도 흥미롭다.
잡지, 시대를 철하다 |
일제강점기 굴곡의 일상 생생
잡지 속에 담긴 굴곡진 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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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계란 계를 구성하는 요소의 수가 매우 큰 계를 말한다. 여기서 구성 요소 간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구성 요소는 상호 작용을 통해 서로 영향을 미치는데 상호 작용이 선형적이면 구성 요소가 많더라도 계는 단순한 방식으로 거동한다. 구성 요소 개개의 성질을 이해하면 계의 전체 거동도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예측이 가능하다. 지휘자의 구령에 따라 움직이는 매스게임 같은 상황이 이런 경우이다.
하지만 상호 작용이 비선형적이면 계의 거동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구성 요소 개개의 성질을 알더라도 이들이 얽혀 있는 전체가 어떻게 거동할지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된다. 용량과 속도에서 나날이 발전하는 컴퓨터를 이용한 계산으로 이 거동을 추적해낼 수 있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계가 커질수록 계산할 수 없는 한계에 곧 도달하게 된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개개 구성 요소의 거동을 관장하는 원리들이 전체 계의 거동을 이해하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말로 표현되는 상황이며, 개개 구성 요소의 울타리 안에서 하는 환원주의적인 분석은 충분하지 않다. 전체를 보기 위한 새로운 도구가 필요하다.
이 책에서 임계성이란 계가 보이는 현상을 특정지울 수 있는 축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인다. 예컨대 사람의 키를 생각해보자. 서구인의 키가 대체로 동양인보다 크며, 같은 지역에서도 키가 크거나 작은 사람들이 섞여 있다. 하지만 사람의 키는 대략적인 크기가 있다. 벼룩만한 사람은 없으며, 집채만 한 사람도 없다. 외계인이 지구의 사람들을 보았다면 1~2미터 크기의 생물체로 기록을 할 것이며, 이는 큰 오류 없이 사람을 묘사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특정 축척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페르 박의 연구로 유명해진 모래 사태가 그것이다. 모래알 몇 개가 움직이는 작은 사태로부터 받침대 위에 쌓여있는 모래 전체가 쏟아져 내리는 큰 사태도 있다. 최근에 일본의 한 지역을 흔든 강도 5의 지진이 있었지만, 다음에 올 지진에 대해서는 어떤 강도의 것이 언제 올지 알 수가 없다. 더 약한 지진이 올 수도, 훨씬 강한 지진이 올 수도 있다.
강도가 어느 이상의 것만 지진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지진의 강도에는 특정한 크기가 없는 것이다. 임계성을 보이는 현상들은 공통적으로 멱함수 분포를 따르는 특성을 보인다. 지진의 강도에 대한 빈도의 데이터가 멱함수 분포(대부분의 관측 값은 아주 작고, 소수의 관측 값만이 크다)를 따르는 예이며, 이것이 잘 알려진 구텐베르크-리히터 법칙이다.
임계 현상에 특정 크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큰 현상이나 작은 현상이나 같은 원리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진의 원인을 밝히려고 할 때 작은 지진들은 무시하고 큰 지진 만에 매달리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오히려 더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작은 지진들을 연구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복잡계에 대한 기존의 학문적 접근 방식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1980년대 중반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에 의해 미국의 산타페 연구소를 중심으로 복잡계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태동하였다. 페르 박과 그의 동료들은 1987년 모래 사태 모형과 함께 자기 조직화된 임계성에 대한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모래 사태는 누구나 쉽게 시도해볼 수 있는 실험이다. 접시 위에 모래를 천천히 떨어뜨려 쌓으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자. 처음에는 모래가 비교적 평평하게 쌓아진다. 떨어지는 모래알이 바닥의 모래알들을 건드려 구르게 하지만 그 효과는 국소적이어서 멀리 퍼지지 못하고 떨어진 모래알 근처에서만 움직임이 있다.
하지만 떨어지는 모래알이 점점 높이 쌓여 모래가 접시의 가장자리까지 차고 모랫더미가 가파른 경사에 이르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떨어지는 모래알 하나가 여전히 국소적인 움직임만을 만들 수도 있지만, 모래 전체가 무너져 접시 밖으로 모래가 쏟아지게 하는 큰 모래 사태를 만들기도 한다.
모래 사태의 크기에 대한 빈도의 분포는 멱함수를 따르며 따라서 모래 사태는 임계성을 띤다. 더해서 흥미로운 것은, 큰 사태 이후에는 떨어지는 모래알이 다시 쌓이면서 사태가 일어났던 경사도를 점차 회복한다는 것이다. 즉 모랫더미는 외부의 조정 없이 스스로 임계성을 향해 구동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조직화된 임계성이다.
모래 사태에 대한 수학적 모형은 놀랍도록 간단한데 이것이 훗날 자기 조직화 임계성 연구의 전형을 제공한 BTW(Bak, Tang, Wiesenfeld) 모형이다. 이 모형은 너무도 간단해서 중학생이라도 이해하고 시뮬레이션을 해 볼 수 있는 정도인데, 물리학의 전형적인 단순화 방식인 '거칠게 갈기(coarse graining)'를 따른 것이다.
물리학자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흔히 문제를 단순하게 바라보는데, 이 때 주의할 것은 단순하게 하면서도 해결하고자 하는 현상의 본질은 남긴다는 것이다. 이 작업을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 '목욕물은 버리되 아기는 버리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 표현이 페르 박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인지는 모르겠다.
페르 박과 동료들이 발견한 자기 조직화 임계성은 물론 모래 사태에만 머물지 않는다. 도로 위에서 겪는 교통 체증은 누구에게나 벌어지는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복잡계가 보이는 특성이며, 임계 상태에 도달한 교통 체증이 제한된 교통 환경에서 가장 효율적인 교통 흐름이라는 사실이 물리학 연구에서 밝혀진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페르 박의 첫 발견은 이후 다양한 학문 분야의 많은 연구자들을 자극하여 수많은 연구 결과들을 이끌어 냈으며, 복잡계의 자기 조직화 임계성이 물리학을 넘어 생물학, 뇌 과학, 지구 과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분야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연구되었다.
이 책은 보수 성향이 짙은 학문 세계에서 열린 마음으로 진리를 추구해가는 한 뛰어난 과학자의 연구 역정을 재미있게 기술하고 있다. 또 다양한 분야의 결과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분야의 연구에 뛰어드려는 이에게 이 책은 더할 나위없는 훌륭한 입문서가 될 수 있다.
복잡계 연구자에 의한 번역이라는 점도 언급하고 싶은 이 책의 장점이다. 과학적 사실 전달이 정확한 점이 돋보이며, 번역 문장 또한 매끄럽게 다듬어져서 읽어 내려가며 원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는데 거침이 없었다.
빈곤의 확산, 자살률 증가, 정권의 득세, 트위터를 통한 여론 형성 등 현재 우리 사회의 뜨거운 이슈들도 복잡계의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임계 상태에 있는지 밝히기 위해서는 진지한 연구가 있어야 하겠지만, 우리 사회가 개개인 수준의 성향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모습을 보이는 복잡계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자연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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