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무신론자인가? <무신예찬>(원제: 50 Voices of Disbelief-Why We Are Atheists, 2009년)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쟁쟁한 과학자, 철학자, 과학소설 작가, 정치 활동가, 대중적 지식인 50명이 이 질문에 각양각색으로 대답한 짤막한 에세이들을 묶은 책이다.
왜? 종교적 광신주의가 위험수위에 이르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엮은이들은 자신이 믿는 신을 함께 믿지 않는 타인들을 적으로, 타도 대상으로 삼는 광신주의자들의 편협한 불관용과, 그들을 대변하는 로비스트들이 우리 개인들의 자유를 침해하고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현실을 더는 좌시해선 안 된다고 얘기한다. 위기감은 2001년 9·11 사태와 미국의 아프간·이라크 침공, 잇따른 테러 사건으로 극도로 높아졌다. 미국에선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 세력이 정치에까지 깊숙이 개입하고 교과서의 진화론 내용 폐지 운동까지 벌였다. 이 땅의 보수 기독교도 그걸 고스란히 모방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남의 얘기가 아니다.
스티븐 로 런던대 헤이스롭 칼리지 철학교수는 말한다. “만일 존재한다면, 신은 분명 전능하고 무한히 선할 것이다. 그런데 그 존재는 또한 논리적으로 악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다. …무한히 선하므로 악의 존재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악은 존재하므로, 여기서 논리적으로 유대교-그리스도교적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얘기를 원용한 것이다.
독일 생식의학회 대변인 에드가 달, 종교철학자 니컬러스 에버릿 전 이스트앵글대 교수, 그리고 이슬람권인 이란의 여성차별저항조직 대변인 마리암 나마지도 ‘신의 부재’를 입증하기 위해 모두 비슷한 논리를 전개한다. 전능한 신이 ‘약간의’ 악을 허용하는 것은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고 그들의 자유의지를 북돋움으로써 선의 가치를 한층 더 높이기 위해서라고 유신론자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전능의 신이라면 인간을 만들 때 처음부터 자유의지를 북돋고 선의 가치를 더 높일 필요가 없는 완벽한 존재로 만들면 된다. 악으로 단련시킬 이유가 없다.
설사 악을 선과 양립시키더라도, 그것이 더 큰 선을 위해서라면 그 둘을 상쇄할 때 결과적으로 선이 악보다 더 커야 한다. 그런데 세상이 그런가? 수십만이 죽은 쓰나미라는 악을 통해 인간이 얻은 교훈이 수십만의 인간 생명 가치보다 더 컸던가?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수천만의 희생자를 낳은 세계대전의 교훈적 가치가 나치가 저지른 악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컸나?
“악당이 내 다리에 총을 쏘았는데 어떤 자비로운 사람이 나를 돌봐준다면, 그건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자비가 워낙 선하기 때문에 애당초 악당이 나를 쏘았다는 사실 자체도 정당화해준다고 말한다면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차라리 총 쏘는 일 없고 자비도 없는 편이 더 나은 세상일 것이다.”(니컬러스 에버릿)
우리 민족에게 어떤 큰 교훈(선)을 주려고 신은 나라를 남의 식민지로 만들고, 수십만을 성노예로 만들고, 나라를 분단하고, 전쟁으로 수백만을 죽게 하고, 1천만 이산가족이 고통(악)을 당하게 했을까? 그게 아니라면 논리적으로 신은 전능하지 않거나, 선하지 않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하지 않는가.
“올림픽 선수들은 금메달을 따면 신이 선하다고 하지만 4등이나 5등을 했을 때 신이 악하다고 말하진 않는다. … 내가 이긴 건 신이 선하기 때문이고, 지는 건 신의 탓이 아니다. 내가 쓰나미에서 살아남으면 신은 선하고, 다른 사람들이 쓸려가거나 익사하면 그런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다.”(잡지 <철학자>의 부편집장 오필리아 벤슨)
“믿음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나를 지옥으로 끌고가려는 존재를 숭배할 생각은 없다. … 누군가가 마지막에 회개함으로써 천국에 자리를 얻었다고 장담하는 말을 들으면 특히 더 그렇다. 무슨 이런 엉망진창인 기획이 있냐고!”(미국 웰스칼리지 철학교수 로라 퍼디)
“예수가 와서 죄를 없애고 죽음을 없애버린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죽은 지 2000년이 지났는데도 인류는 왜 여전히 죽고, 예수의 은총으로 구원받았다는 추종자들까지도 왜 대부분은 끔찍한 상황에서 죽어야 할까?”(나이지리아 생명윤리학회 회장 피터 아데고크)
“세계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곳이다. 하늘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의 삶이 오직 한 번뿐임을 깨닫고 나면 당신은 … 스스로의 신으로서 자신의 삶을 완전히 통제하고 양심적인 행동과 자기결단을 통해 자신의 기도에 답할 능력을 갖게 된다. 상상의 친구는 필요하지 않다.”(필라델피아 자유사상협회 창설자 마거릿 다우니)
요컨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불행해지진 않는다. 오히려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한때는 열렬한 신앙인이었던 다수의 필자들은 얘기한다. 우리 삶의 일회성과 우연성을 깨닫고, 그로 인한 근원적 고독을 끌어안는다면, 그걸 피하려고 입증할 길 없는 구원에 매달려 삶을 낭비하지 않고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고 사랑하며 더 보람차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주적으로 하찮은 존재다. 공간에서는 한 점에 불과하고 시간에서는 한 찰나에 불과한, 헤아릴 길 없이 미미한 존재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에게만큼은 중요해질 수 있다.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우리 서로에게만은 말이다.”(작가 데일 맥고원)
무신예찬 |
믿습니까? 뭣하러…
신은 왜 세상의 악에 대답 못하나
신을 믿지 않는 지식인들 "인류 평화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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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조화롭게 먹는 혁신적인 방법이 있다!" 새 책 '슈퍼이팅'이 다루는, 귀가 솔깃해질 법한 정보다. 이 책은 각 영양소 사이의 협력 또는 방해의 관계에 주목한다.
무엇을 먹으면 어디에 좋다라는 단순한 접근을 거부하고, 영양소들이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아 건강할 수 있는 것인지 설명하기 위해서다. 일례로 뼈 건강을 위해 먹는 칼슘의 효과가 나타나려면 마그네슘도 정확한 비율로 섭취해야 한다는 식이다.
특히 실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유제품, 과일, 해산물, 견과류, 채소, 곡물, 육류 등으로 효과를 보는 방법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남다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의 효과를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도록 식단 짜는 방법도 소개한다.
자칫 우리나라 식생활과 동떨어질 수도 있는 책 속 재료와 조리법을 대체하는 한국 음식과 재료까지 짚어 준다.
슈퍼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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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소수자를 편든 데는 태생적 이유가 있었다. 1941년 뉴욕에서 멕시코 출신 핵물리학자의 딸로 난 그는 까무잡잡한 피부 탓에 일찍부터 차별을 의식했다. 높고 고운 목소리를 애써 개발한 것도 소외감을 이기기 위해서였다. 1960년 19세에 첫 앨범을 내고 '맨발의 디바'로 떴고, 2년 후엔 주간지 '타임' 표지를 장식했다.
원래 사랑을 나누고 주목받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중독증 같은 습관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됐어요." 1963년 킹 목사가 워싱턴DC에서 "내겐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할 때 '우리 승리하리라'를 불렀고, 바웬사의 폴란드 독립투쟁 때도 동참했다.
전위에 섰던 만큼 아픔도 많았다. 코카콜라의 광고모델료 5만불 제안도 거절할 정도로 돈에는 '무심'했지만 '리무진 좌파' 소리까지 들었다."1만달러 출연료를 받는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입으로는 '빈곤과 굶주림'에 대항해 싸우는 노래를 부르는 두 얼굴"이라는 만화 풍자에 발끈했다. 베트남전 반대운동을 주도했지만, 베트남 사회주의 정부의 인권유린까지 비난했다가 좌파들로부터 'CIA 끄나풀'이란 욕을 먹기도 했다.
포크 음악을 함께 이끌었던 연인 밥 딜런에 대한 기억에서는 애증이 함께 묻어난다. 스스로 "시간과 상황에 의해 엮인 거리의 쌍둥이였다"면서도, "사회변화에 대한 그의 적극적인 참여는 노래 만들기에 한정되어 있었다. 어떤 식의 시민적 저항도 한 적이 없다"고 평한다.
80년대를 보는 시선에는 60년대 우드스톡 세대의 불만과 조바심이 뒤섞여 있다. '라이브 에이드'를 말하는 대목만 봐도 그렇다. "화려한 세계에서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겠다며, 우리의 부를 나눔으로써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암시가 있었다. 나는 '기아의 종언을 위한 평생의 헌신'이라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몸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위 아 더 월드'(1985년 미국 가수들의 아프리카 돕기 음반) 파티 때 빠진 것에 상처 입었다고 털어놓는다. 꽤나 두꺼운 이 책을 끝까지 붙잡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 이처럼 치부와 약점까지 드러내는 솔직함에 있다.
존 바에즈 자서전 |
'포크 女帝' 가 털어놓는 삶과 노래에 대한 고백
평화 노래한 ‘도나도나’ 바에즈 회고록
포크음악 대명사’ 바에즈의 파란만장한 삶
기타 둘러메고 거리로 포크의 여신 바에즈 민낯의 삶을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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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권력자의 공간인 궁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궁궐 건축은 이런 본질과는 별개로 여러모로 독특한 점이 많다. 우선 정궁인 경복궁 말고도 창덕궁(사진)·창경궁·경희궁·덕수궁·인경궁 등 무려 5개나 되는 별도의 궁궐(이궁)이 지어졌다. 태종이 지은 창덕궁은 가장 오랫동안 왕의 거처로 쓰였고, 영조·정조·고종은 경희궁과 창경궁, 덕수궁에 눌러 살다시피 했다. 동아시아 궁궐 건축의 전범이 된 중국 궁성의 남북 세로축, 좌우 대칭의 배치 원칙도 조선에서는 경복궁 말고는 지켜지지 않았다. 유교 사상의 예치에 바탕한 공간 질서를 강조했던 조선 왕실의 궁궐 공간에서 왜 유독 분방한 일탈과 예외가 도드라졌던 것일까.
건축 제도를 다룬 옛 문헌들을 연구하며 궁궐 공간의 변천사를 탐구해온 조재모 경북대 건축학부 교수는 <궁궐, 조선을 말하다>에서 이런 의문에 쾌도난마의 답변을 내놓는다. 궁궐 공간에는 애초 만드는 사람의 관점과 사용했던 사람의 관점이 엇갈려 왔는데, 시대를 초월해 존재하는 권력자의 욕망과 취향, 19세기 이래 서구 외세의 영향 등이 궁궐 운영의 규범에 계속 틈을 내는 바람에 카오스적인 정체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는 게 그의 견해다.
책에 거론된 사례들 가운데 가장 별난 경우가 15세기 성종이 창덕궁 옆에 붙여 지은 창경궁이다. 그의 즉위 당시 선왕인 세조·덕종·예종의 비가 모두 살아 있던 터라 본디 이 대비들을 위해 주거공간으로 마련한 궁궐이었기 때문이다. 대비가 세상을 뜨면 버려져 허물어지기 일쑤였지만, 임진왜란 뒤에도 왕이 세 사람 내지 두 사람의 대비를 모셔야 하는 경우가 허다해서 17~18세기 창경궁 일대에서는 대비전을 새로 짓는 공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게다가 창경궁은 18세기 정조가 기거하며 정궁 구실을 하기도 했다. 부친 사도세자의 추모사당 경모궁(현 서울대병원)이 지척이라 참배가 수월했던 까닭이다.
경희궁도 본디는 광해군이 인경궁과 더불어 조선 궁궐의 새로운 전범을 세우고자 시도한 대형 건축프로젝트였다. 정작 궁궐을 애용한 이는 영조였다.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사당 육상궁(현 청와대 서편)과 가까워 왕래하기가 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후대 고종 때는 거의 창고처럼 쓰이다 일제에 의해 뜯겨나가는 비운을 겪게 된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창덕궁’이란 속담처럼, 창덕궁은 왜 그리 오랫동안 정궁으로 사랑받았을까. 지은이는 집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가 다시 신고 나오는 우리 특유의 좌식 문화를 배경으로 지목한다. 이런 관습으로 보면, 남북 일렬로 늘어진 경복궁의 전각 배치보다 동서축에 따라 옆으로 건물이 올망졸망 이어진 창덕궁의 배치가 훨씬 이동하기 쉽다. 건물 전면을 주로 쓰는 우리 생활 관습이 창덕궁의 병렬식 배치를 선호한 요인이 됐다는 뜻이다.
난삽한 옛 문헌 기록과 건축사 용어들이 많이 인용되고, 의례 등에 대한 사변적인 분석도 섞여 책은 쉬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건축 양식 분석에만 치중하지 않고, 궁궐 안을 돌아다닌 사람들의 욕망과 취향을 좇는 역사추리적 상상력이 곳곳에서 빛난다. 욕망과 의례, 법도가 뒤엉키며 변모해간 조선 궁궐 건축의 속내를 집요한 문헌탐구와 문제의식으로 풀어낸 지은이의 혜안이 느껴지는 책이다.
궁궐, 조선을 말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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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서 우암 송시열(1607~1689)을 검색하면 3000회가 넘게 나온다. 그만큼 논쟁적 인물이었음을 뜻한다. 그의 무대가 조선왕조 500년의 한가운데인 17세기, 국내외 정세 변화가 정치기강과 사회질서를 위협하던 때였다. 그의 처방은 예와 의리. 논어 이인(里仁)편에 나오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가르침이 모토였다. 정쟁(政爭) 끝에 83세에 사약을 받고 죽기 전에도 "팔십여 나이에도 끝내 (도를) 듣지 못하고 죽게 되었으니 마음에 부끄럽고 한스러울 뿐이네"라고 탄식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히 갈린다. 국내 유학자 중 유일하게 성인을 뜻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대유(大儒)로 불렸는가 하면, 자의대비의 사후 복상을 1년으로 할 것인가, 3년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예절 논쟁을 주도하는 등 예학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우암 전문가이자 숭실대 철학과 교수인 저자가 34년 연구 결실을 한 권으로 묶은 책. 우암의 사상을 조선 성리학의 계보 속에서 종횡으로 비교 조명했다. 저자는 우암의 사상이 "무너진 국가 사회의 법과 제도의 재건, 인륜 질서의 재정립, 상실된 민족적 자존과 자주 의식의 회복, 이질 문화의 대량 유입과 강요에 대한 거부와 상처 난 문화 의식의 치유를 위한 이념적 처방의 성격을 지닌다"고 쓴다.
우암 송시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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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미트가 학자로서 활발히 활동했던 1920~ 30년대 독일은 혼란의 시대였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 군주제 붕괴, 좌우 극단주의 세력과 주변 강대국의 압박 속에 무기력했던 바이마르공화국의 몰락, 나치즘의 대두와 같은 ‘험악한 사태’들을 끊임없이 겪었다. 이런 가운데서 그는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강한 권위를 가진 국가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길로 나아갔고, 결국 나치즘에 이론적·철학적 근거를 제공한 극우 보수주의 사상가가 됐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문제들은 악마적이리만큼 냉철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어, 좌우를 막론하고 정치와 국가를 사유하고자 하는 후대 사상가들에게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정치의 본질을 적과 동지의 구별에서 찾는 과감한 발상, 주권자를 예외상태에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로 보는 새로운 관점, 자유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 등이 그러하다. 샹탈 무페, 조르조 아감벤, 에티엔 발리바르 등은 이런 슈미트의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대표적인 좌파 사상가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란 명제인데, <정치적인 것의 개념>은 이 문제에 천착했기에 슈미트의 대표 저작으로 꼽히고 있다. 슈미트는 도덕적인 것에는 ‘선과 악’의 대립, 미학적인 것에는 ‘미와 추’의 대립이 그 본질적인 규준이 되듯,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의 구별과 대립을 그 본질로 삼는다고 봤다. “동지와 적이라는 특수한 대립을 다른 구별들로부터 분리시켜 독립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 속에 이미 정치적인 것의 존재로서의 사실성과 독립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적이란 사적인 경쟁 상대가 아니라 공적인 투쟁의 대상으로,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존재다. 예컨대 산업 콘체른이나 노동조합은 경제적 기반에 근거한 인간의 결합이지만, 상대방을 실제의 적으로 다루고 그것과 투쟁하는 경우 정치적인 세력이 된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해, 이렇듯 투쟁하는 상대로서 적과 동지의 구별이 없다면 정치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정치적인 것에 대한 슈미트의 사유는 근본적으로 국가의 본질을 파고드는 작업이다. 그는 책의 첫머리에 “국가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고 못박고, 끝머리에는 ‘인간적인 것들의 질서’라는 표현을 쓰며 “통합에서 질서는 생긴다”고 말한다. 적과 동지의 구별은 ‘예외상태’라 할 수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적과의 ‘전쟁’으로 나아가는 결정을 내릴 주권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이 곧 국가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또한 정치적 통일체인 국가는 모든 인간적인 것들의 질서 그 자체라고 본다.
슈미트는 당시 유럽을 휘감은 자유주의는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부정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국가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자유주의가 만든 것은 권력의 배분과 균형, 곧 국가의 억제와 통제의 체계일 뿐이며 자유주의를 국가이론이나 정치적 구성원리로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를 ‘중립물’로 간주하고 국가의 제도들을 ‘안전판’으로 만들어버리는 자유주의적 사고 속에서 투쟁이라는 정치적 개념은 경제적 측면에서는 ‘경쟁’으로, 다른 한편의 정신적 측면에서는 ‘토론’으로 변질된다고 여겼다. 정치적인 것을 복원하는 것만이 자유주의의 요란한 탁상공론을 끝내고 진정한 공동체를 이뤄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책에 대한 주해를 쓴 미국 신보수주의의 대부 리오 스트라우스는 “홉스가 자유주의의 창시자라면,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긍정을 통해 자유주의 안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준비’해줬다”고 평가한다.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을 긍정하기 위해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서로에게 위험한 존재라고 본 홉스의 전제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런 전제에 따라 이를 다스릴 수 있는 지배를 필연적이라고 긍정한 것이다. 스트라우스는 이런 맥락에서 “슈미트의 자유주의 비판은 자유주의의 지평에서 수행됐으며, 그가 준비한, 자유주의를 대체할 체제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한 세기에 걸쳐 슈미트의 정치철학이 좌우파를 막론하고 끝없이 되새겨지는 맥락을 짐작하게 해주는 지적이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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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잠입하여 몸으로 부딪치며 구조의 모순과 현실의 배반을 고발하는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완결판 <희망의 배신>이 나왔다. 한국어판 제목으로 보자면 <긍정의 배신>과 <노동의 배신>을 잇는 배신 3부작의 완결이라 하겠고, 내용으로 보자면 재취업자로 위장하여 펼치는 구직 활동을 통해 화이트칼라 중산층의 몰락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웨이트리스, 호텔 청소부, 월마트 매장 직원 등으로 워킹푸어를 체험한 <노동의 배신>과 짝을 이루는 책이라 하겠다. <긍정의 배신>은 성공 신화와 긍정의 힘에 가려진 구조의 모순을 고발하는 지점에서, 나머지 두 개의 배신은 중산층과 하층민이 맞닥뜨리는 현실의 배반을 실제 상황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함께 곱씹어 볼 만하다.
특히 이번 책이 집중한 화이트칼라 중산층의 몰락은 기술과 노동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상품화하여 고용주의 입맛에 맞게 가공, 포장하고, 적절하게 유통될 수 있도록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직장에 발붙이고 살기 위해 성격과 태도마저 연기하듯 바꿔내야 하는, 가볍게 말하면 직장인의 비애라는 측면에서, 무겁게 말하자면 노동의 소외와 인간 존엄의 박탈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국도 은퇴 후 가장 많이 시도하는 게 치킨집이나 프랜차이즈 자영업이다. 치열한 전장에 모두가 각개 전투로(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임하는 형국이다. 미국에서는 이 책의 출간 이후 회사에 충성을 서약하던 화이트칼라 계층들이 서로 모여 공감을 키우고 힘을 모으는 변화를 이끌어냈다고 한다. 앞서 말한 구조의 모순과 현실의 배반에 맞서기 위해서는 손잡고 변화를 위해 싸울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부디 이번이 마지막 배신이기를 기대해본다. - 인문 MD 박태근
추천의 글: 이 모든 것이 미국의 현실이라고만 치부하기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청년 실업과 중장년층의 정리 해고와 재취업난은 우리에게도 일상이 되었으니까. 어떤 해결책이 가능한가? 저자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뭉쳐 자신들의 존엄성과 가치를 주장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희망의 배신>은 그런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우리가 적어도 ‘생쥐’보다는 더 나은 존재라는 각성 말이다.(로쟈 이현우, 서평가)
희망의 배신 |
연봉 1억의 그녀, 변기 닦이로 전락한 이유는?
우리의 침묵을 깨우는 각성제
왜 사람들은 점점 불행해질까,
열심히만 일하면 잘살 수 있을까?…희망의 배신
열심히 살아도 불안한 중산층의 암울한 현실
`부장서 알바로` 화이트칼라의 몰락
‘화이트칼라’ 무너지는 꿈… ‘장기 자산’서 ‘단기 비용’ 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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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탄 본을 번역한 이 판본의 특징은 108명의 호걸이 양산박에 처음으로 모두 모여 제사를 지내고 의형제를 맺는 70회에서 끝난다. <수호전>은 무협지이기 때문에 싸움 장면이 가장 많고, 술과 음식을 먹는 묘사가 그다음으로 많다. 이 소설만 보면 중국은 거의 육식문화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여기, 고기 서너 근 끊어주시오’라고 말하고,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 열다섯 살 때 이 소설을 처음 읽고, 나는 빈번히 나오는 이 관용구로부터 ‘영웅=남의 살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공식을 어렴풋이 감지했다.
중국의 문화비평가 류짜이푸는 중국의 원형(진짜) 문화는 <산해경>에서 <반금련> <홍루몽>으로 이어지며, <서유기>도 여기 속한다고 한다. 이 계보는 동심과 모성을 숭배한다. 반면 <수호전>과 <삼국지>는 중국의 문화 원형에서 크게 이탈한 위형(가짜) 문화다. 그는 <면벽참사록>(바다출판사, 2007)에서 200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오싱젠을 펜촉이 닳도록 예찬한다. 그에 대한 연구서를 내기도 한 류짜이푸는 가오싱젠이 중국의 원형 문화를 잘 계승했다고 본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모옌에 대한 그의 논평은 아직 접하지 못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모옌의 최고작 <탄샹싱>(중앙M&B, 2003)을 그가 읽었다면, 당연히 모옌을 위형 문화의 한자락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부모들은 <수호전>과 <삼국지>를 자식들에게 권하면서 그 속에 있는 의리와 의협을 배우라고 한다. 안타깝지만 <삼국지>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권모술수고 <수호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무뢰배들의 폭력뿐이다. 노지심은 주먹 세 방으로 사람을 때려죽인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인물이고, 이규는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살맛이 나지 않는 악귀이며, 무송은 이성을 잃고 하루 저녁에 양민 열두 명을 난자해 죽인 ‘묻지마 살인범’이다. 이들은 다 사람을 죽여서 영웅이 됐고, 인육을 상시로 즐긴 한니발 렉터(미국 작가 토머스 해리스의 범죄소설 시리즈에 나오는 연쇄살인범)의 사부들이다.
루쉰은 중국의 봉건제도를 ‘아이가 아이를 잡아먹는’ 사회라고 질타했다. 류짜이푸는 <삼국지>와 <수호전>을 극렬하게 비난한 <쌍전>(글항아리, 2012)에서 그 말을 본떠, ‘아직 두 책을 읽지 않은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이 책에 서문을 짓고 추천사를 쓴 명사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솔직히 나도 먹고살자고 <삼국지>에 손을 댔지만, 한번도 마음속으로 <삼국지>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108 호걸이 산으로 간 이유는 선택할 정치적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호전>의 주인공들은 충신이 되고자 했으나 되지 못하고 역도가 되었다가, 마지막엔 충신이 됐다. 체제 바깥이 불가능했기에 생긴 역설이다. 이 책 3권 190쪽에 나온 주3은, 중국처럼 사람 많고 큰 나라에서는 지방 토호가 치안 일부를 담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거기서 폭력이라는 위형 문화가 자라났다. 어떤 문화권은 성애에 관대하면서 폭력을 단속하고, 어떤 문화권은 폭력에 무감각하고 성애를 금기시한다. 유럽은 전자고, 한국 · 중국 · 미국은 후자다. _장정일
수호전 1~6 세트 - 전6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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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시월이 되면 라디오 선곡표가 예측 가능해진다. 아마도 월초엔 바리톤 김동규의 중후한 목소리가 돋보이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가, 월말엔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로 시작하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들릴 것이다. 노래를 들으며 또 일부는 꼭 이렇게 한마디씩 할지도 모른다. “저 가수 저 노래로 엄청 벌었을 거야. 그치?”
이 책은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온 ‘엔터테인먼트 법’을 중심으로 다양한 판례들을 소개한다. 위 퀴즈의 정답이 누구든, 가수 이용이 얼마를 벌든 분명한 사실은 저작권 문제가 이제 더이상 원작자와 관련 업계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손쉽게 가수 2PM의 ‘Hands up’을 음원파일로 추출한다거나 미개봉된 외화를 한글 자막까지 달아 파일공유 사이트에 업로드할 수 있고, 개인 블로그에 인기작가의 소설작품을 연상시키는 아류작을 올릴 수도 있다. 그것이 원작에 대한 오마주든, 다 함께 즐겨보자는 ‘공리주의’의 발현이든, 원작으로부터 얻은 모티브든 모두 저작권 침해에 해당된다.
개인의 즐거움을 위해 향유하던 문화가 모든 이의 ‘산업’이 되면서 겪게 된 변화들이다. 이를 두고 저자는 “기술의 발달은 기존의 저작권법에 새로운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현직 법률자문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연예업계 종사자들이 현장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책을 구성했다. 총 4장에 걸쳐 크게 저작권, 초상권과 패러디, 저작물 다운로드, 전속계약 등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한다. 특히 전속계약에 관한 마지막 장엔 다양한 사례들이 소개돼 무료 법률상담을 받는 느낌을 준다. 익명처리가 돼 있지만 업계 종사자라면 누구나 알 법한 다양한 사례는 타산지석의 예로 삼을 수 있다. 부록으로 실린 연기자 중심, 가수 중심 표준전속계약서도 일반인이 한 번쯤 읽어봄 직하다.
잘 알려진 외화나 우리 영화와 얽힌 저작권 이야기도 흥미롭다. 영화 ‘어바웃 어 보이’ 속 휴 그랜트가 캐럴 하나 잘 작곡한 아버지 덕에 평생을 먹고살 걱정 없게 된 사연, 영화제작사가 원곡의 저작권료를 감당할 수 없어 비틀스 노래의 커버버전(다른 가수들이 재녹음한 곡)을 쓴 영화 ‘아이 엠 샘’의 뒷이야기 등이 그렇다.
매번 신곡이 나올 때마다 표절 논란에 휩싸이는 가수, 기획사와 전속계약 해지로 법정공방에 시달리는 연기자들…. 하루가 멀다 하고 포털 사이트를 뒤덮는 이런 뉴스들의 사연이 궁금했다면 참고하기 좋은 책이다.
모든 이를 위한 엔터테인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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