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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새로 나온 책

2012년 11월 1주 새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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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는 ‘리(理)’가 우리 마음속의 도덕적 성향이라면, ‘기(氣)’는 욕구에 충실하려는 성향이라고 말한다. 욕구(기)에만 빠져 도덕(리)에 어긋나서는 곤란하다. 퇴계는 ‘리’와 ‘기’를 대비시켜 가치론적 관계로 파악한 셈이다. 반면 율곡은 ‘기’를 존재를 구성하는 재료로, ‘리’는 존재를 구성하는 원리로 봤다. ‘기’는 눈에 보이지만, ‘리’는 보이지 않게 세상에 깃들어 있다. 율곡은 ‘리’와 ‘기’를 존재론을 해명하는 데 쓴 셈이다.

이 교수는 퇴계의 학설이 ‘리’(도덕)와 ‘기’(욕구)라는 기호를 좌·우에 배치한 ‘횡설(橫說)’이었다면, 율곡의 학설은 ‘리’(원리)가 ‘기’(재료)에 올라타 있는 상·하, 승반(乘伴) 관계인 ‘수설(竪說)’로 본다. 이 같은 구도로 보면 1572년 율곡이 퇴계를 비판한 이래 400년간 지속된 퇴계의 ‘주리파(主理派)’와 율곡의 ‘주기파(主氣派)’ 논쟁이 결국 프레임의 차이에서 비롯된 ‘소통 오류’였음이 드러난다. 가치론이냐 존재론이냐에 따라 ‘리’와 ‘기’의 의미가 도덕성향과 욕구성향에서 원리와 재료로 바뀌는데, 그 중층적인 의미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논쟁이 계속되는 이유가 서로의 프레임과 개념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서였다면 허탈한 마음을 넘어 학계에 파란이 일 것도 분명하다.

지난 8일 연구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대학 2학년 때 ‘한국철학사’를 들으면서 퇴계·율곡 간의 논쟁이 왜 합의에 이르지 못했는지 의문을 가졌던 것이 이 책의 출발”이라고 말했다. ‘영국경험론’이나 ‘과학철학’ 강의는 명쾌한 데 비해 ‘한국철학사’는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퇴계와 율곡의 이론 차이를 각각 가치와 사실, 당위와 존재로 구분한 그의 이론은 명징하다. “사실과 가치가 미분화됐던 근대 이전에는 당연히 서로 프레임이 다르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어요. 지금은 사실에 입각해 비가 오지 않는 원인을 따지지만, 사실과 가치를 혼동한 옛사람들은 하늘이 노여워했다고 봤지요. 현대학문의 세례를 받은 지금까지도 16~17세기의 학술 수준을 답습해선 안됩니다. 데카르트부터 선대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발전했던 서양철학과 달리, 조선 유학 연구자들은 옛사람의 말을 무조건 숭배하는 태도만을 취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유명한 퇴계와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도 이 교수의 논의에 입각하면 쉽게 풀린다. 퇴계는 인간의 선한 본성인 사단(仁·義·禮·智)은 도덕성향인 ‘리’에서 비롯되고, 기쁨·슬픔 등 칠정(喜·怒·哀·樂·愛·惡·欲)의 감정은 욕구성향인 ‘기’에서 나온다고 봤다. 반면 존재론에 입각해 ‘리’(원리)가 ‘기’(재료)를 타고 감정으로 실현된다고 생각한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이 모두 한곳에서 나오는데 구분할 필요가 있는지 묻는다.

이 교수는 ‘주리파’와 ‘주기파’의 구분이 1929년 다카하시 도오루에서 비롯된 ‘식민사관’이라 말했다. 도오루는 주리파와 주기파의 화해 불가가 조선 사상의 분열성·고착성·종속성을 상징한다고 봤다. “사실 조선의 모든 유학자는 ‘주리파’였어요. 퇴계학파나 율곡학파 내에서도 벌어진 논쟁이 많았던 걸 보면 주기와 주리의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죠. 프레임 차이에서 비롯됐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런 새로운 해석이 “조선 유학이 현대 분석철학과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게 한다”고 본다. “특히 율곡학파가 말한 승반의 구조는 현대 심리철학·윤리학·미학에서 사용하는 ‘수반이론’에 비견될 만한 것입니다. 서양에서 20세기 중반 이후 등장한 이론을 16세기에 이미 제기하고 있었던 것이죠.” 예를 들어 말의 상태가 기수의 승마능력을 결정하듯 ‘리’와 ‘기’는 더불어 변하는 ‘공변’ 관계에 있다는 것이 승반론의 요지다. 인간 또한 본래 선한 성품인 ‘리’를 가지고 있더라도 각기 다른 몸뚱이인 ‘기’에 따라 수많은 성품이 빚어진다.

이 교수는 오늘날 ‘진보’와 ‘보수’의 대립도 횡설과 수설로 설명 가능하다고 본다. 이상주의적 진보와 보수는 각기 횡설의 입장에서 ‘정의’(리)와 ‘사적 이익’(기)만을 강조하기에 늘 평행선이다. 그는 존재론에 입각한 경제적 생산양식이라는 하부구조(수설)를 전제한 뒤 정의와 사적 이익(횡설)을 생각하는 것이 진보와 보수가 나아갈 길이라며 횡설·수설의 통합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는 남명의 <학기유편>에 실린 24개의 성리학 도표 중 14개가 원대 유학자인 정복심의 <사서장도>에서 옮겨왔다는 사실을 새로 발굴해 이번 책에 함께 싣기도 했다. 그는 이런 발굴 또한 “지난 20년간 가진 합리적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숙하기 위해서는 비판적 합리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치와 사실을 구분하지 못한 16~17세기 유학자들이 끝없는 다툼으로 날을 지샜듯 현대를 사는 우리 또한 “사실에 가치를 덧씌워 맹비난하는 세태를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를 되짚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횡설과 수설
이승환 지음/휴머니스트

퇴계 · 율곡 이후 400여년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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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은 단순한 데서 나왔다. 불교와 유교는 삼국시대에 전래됐고, 7세기 중엽 아라비아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교는 불과 100여년 만에 통일신라의 국제무역항 울산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슬람교보다 훨씬 오래된 그리스도교가 한반도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믿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스도교는 콘스탄티노플을 기점으로 라틴어를 쓰는 서방 그리스도교, 그리스어를 쓰는 동방 그리스도교로 나뉜다. 동방 그리스도교는 아라비아,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에까지 도착했다. 중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던 한반도에도 그리스도교가 어떤 형태로든 알려졌을 것이란 이야기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동양에서 유래한 종교다. 구약의 중심인 아브라함, 신약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 모두 오늘날의 동양 땅에서 태어나 활동했고, 인종적으로도 동양인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도 동양인이다. 최초의 교회라고 일컬어지는 안디옥도 동양이다. 그러나 동방 그리스도교의 위세가 꺾이고 서방 그리스도교가 강해지면서 그리스도교는 서양 종교처럼 여겨지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교도들은 모두 서방 그리스도교를 믿는다.

17~18세기 조선에 전해진 천주교 역시 서방 그리스도교였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박지원, 홍대용은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 문물을 연구했는데, 그중에는 당연히 서양인들이 믿는 종교인 천주교도 있었다. 물론 천주교를 지식이 아니라 신앙으로 받아들인 이도 있었다. 정약전·약종·약용의 3형제와 이벽, 이승훈 등이었다. 이들은 그 대가로 목숨을 내놓거나, 살기 위해 신앙을 버려야 했다.

조선 왕조가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1791년 윤지충이 어머니의 초상을 유교식이 아닌 로마 가톨릭 예식으로 치른 사건이다. 그러나 장례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교는 당대의 기득권층이 받아들이기 힘든 교리를 전파하고 있었다. 예수는 가난하고 굶주리고 병든 자들을 섬겼다. 예수를 진심으로 따른다면 왕-귀족-평민-노예의 수직적 계급 구조나 부자와 빈자가 엄격하게 나뉘는 부의 분배 구조는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시대의 로마가 그랬듯이, 조선 역시 이 같은 혁명적 사상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혁명적 가치가 세계 각지에 고스란히 전해질 리는 없었다. 그리스도교의 가치는 받아들이는 이의 편의에 따라 윤색됐다. 임진년에 조선을 침략한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아고스티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날에도 고니시의 동상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다. 그의 군사 1만8000명도 대부분 그리스도교인이었다.

일본은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선교를 하던 시기보다 50여년 뒤인 1549년 그리스도교를 본격적으로 접했다.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일행이 가고시마에 내리면서 일본의 가톨릭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집권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을 침략하기 위해 포르투갈로부터 들여오는 조총이 필요했고, 그 때문에 서양인들의 활동을 허락했다. 하비에르의 도착으로부터 100년간 일본은 ‘크리스천 시대’라 할 만큼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있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은 평등과 사랑을 설파하는 그리스도교가 봉건질서와 가난에 신음하던 일본 하층민들에게 파고든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십자군이 그러했듯이,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그리스도교 군대도 조선의 죄 없는 민중을 가책 없이 학살했다. 민중은 조선에서 죽느니 포로로 붙잡혀 살아남는 길을 택했다. 10만여명의 조선인이 왜군에 끌려갔는데, 그중 일부는 일본에 퍼져 있던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규슈 일대에만 수천 명의 조선인이 그리스도 교리를 공부하고 교회까지 세웠다. 원치 않게 끌려온 이국에서 의지할 곳이라고는 내세에서의 평화를 보장하는 종교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찌감치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이던 동방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됐을까. 로마 가톨릭과 그에 대항해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위세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사실 동방 그리스도교 역시 조금씩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서방 그리스도교가 마테오 리치를 내세워 중국을 찾았을 때, 그곳엔 이미 오래전 잃어버린 자신의 형제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까지 전해진 그리스도교는 동방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인 네스토리안교였다.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지만 하느님의 어머니는 아니라고 주장한 네스토리안교는 서방 그리스도교의 권력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몰렸고, 박해를 피해 묵묵히 동진했다. 마침 그곳엔 실크로드가 있었다. 네스토리안교는 중국, 몽골, 만주, 고려 국경 일대에까지 퍼졌다. 중국인들은 네스토리안교를 빛나는 종교라는 의미의 ‘경교’(景敎)라 불렀다.

경교가 결정적으로 세를 떨친 것은 원나라 때였다. 원의 세조 쿠빌라이칸은 다민족·다문화 제국의 경영자답게 모든 종교에 관대했다. 그는 유교의 이상 군주, 불교의 보살, 이슬람의 후원자, 그리스도교의 개종자였다. 쿠빌라이칸의 어머니이자 칭기즈칸의 며느리인 소르칵타니 베키는 아예 독실한 동방 그리스도교인이었다. 고려의 충렬왕은 쿠빌라이칸의 사위로 그의 성대한 생일 축하연에도 다녀온 적이 있으니, 그리스도교도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왕을 경배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리스도교가 아시아에 전해지면서 토착화됐다는 것이다. 몽골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자신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시설에 ‘사’(寺)를 붙였다. 대흥국사, 운산사, 취명산사 등이 모두 그리스도교 시설이었다. 서양에서도 교회(church)라는 말이 정립된 것이 17세기이니, 그 이전의 그리스도교 시설을 구분하는 별다른 이름이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몽골의 그리스도교 사제들은 새벽에 일어나 목탁을 치고 향을 피우기도 했다. 그들은 삭발까지 했다.

몽골 그리스도교는 고려에도 들어왔다. 몽골이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에 세운 기관인 정동행성의 수장이 바로 그리스도교도였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도교 성인인 조지의 한자 음차인 활리길사(기와르기스)였다. 활리길사는 2년간 개경에 살면서 노비제도의 혁파를 시도하는 등 그리스도교 색채가 가미된 조치를 취했다.

시간은 더욱 거슬러 오른다. 한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녔던 발해는 훗날의 용어를 쓰자면 ‘동북아 중심국가’이자 ‘글로벌 공동체’였다. 산둥반도, 일본, 거란, 신라, 사마르칸트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고, 수많은 민족, 언어가 뒤섞여 있었다. 당시 상인들은 중국과 터키가 싸우느라 불안했던 실크로드 대신 사마르칸트에서 러시아를 거쳐 발해까지 이어지는 ‘담비의 길’을 택하곤 했는데, 이 길을 통해 그리스도교가 전해졌다. 옛 발해 땅이었던 러시아 우스리스크에서 서쪽 40㎞ 지점에선 두 개의 절터가 발굴됐는데, 이곳에는 불상, 사천왕상 머리, 용의 머리와 함께 동방 그리스도교 십자가가 그려진 점토판까지 나왔다. 한때 발해의 수도였던 중국 훈춘에서는 삼존불상이 발견됐는데, 부처 오른쪽의 협시보살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다. 당대의 종교란 불교, 그리스도교, 무속 신앙이 뒤섞인 ‘어울림의 신앙’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스도교 문화가 불교 미술의 정수인 석굴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전해진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아 불교도들은 간다라 미술을 탄생시켰다. 석굴암 역시 간다라 미술의 영향 아래 신라인들의 미의식을 더한 걸작이다. 그리스도교 동진 연구자인 E A 고든은 석굴암 전실 내벽에 부각된 십일면관음상, 십나한상 등에 나타난 옷 무늬나 신발이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경교에선 하느님을 천존, 예수를 세존이라 불렀다. 토착화를 위해 ‘존’(尊)이라는 불교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당나라 때 번역된 시리아어 그리스도교 경전에는 그리스도가 무욕(無慾), 무위(無爲), 무덕(無德), 무증(無證)을 터득하라고 강조하는 대목이 나온다. 노자나 장자가 했을 법한 말같이 들린다.

오늘날에는 사소한 것으로도 구분한다. 개신교와 천주교가 다르고, 개신교 내부도 수많은 종파가 나뉜다. 조금만 다르면 같이 못 살 것처럼 으르렁댄다. 더 평화롭게 사랑하며 사는 대신, 싸우다가 문명이 스러지고 인생이 끝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싸우라”는 말 대신 “사랑하라”는 말을 더 많이 했는데도 말이다.

불국사에서 만난 예수
최상한 지음/돌베개

신라 · 발해 불상에 새겨진 그리스도교 흔적의 의미는?
신라때 이미 한반도에 기독교 들어왔다?
‘불국사에서 만난 예수’ 펴낸 최상한 경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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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가 2006년 <만들어진 신>을 출간하면서 일이 시끄러워졌다. 기세등등한 무신론자들은 먼지 쌓인 전통에 기대 가쁜 숨을 몰아쉬던 종교, 특히 기독교를 공격했다. 도킨스와 함께 저널리스트인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선봉에 섰다. 이 강경한 두 명의 무신론 전사들을 묶어 ‘히치킨스’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이전까지 서구 사회에서 종교는 개인의 선택 문제라고 여기는 시선이 많았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미국을 공격했고, 미국은 ‘십자군’ 운운하며 이슬람에 반격했다. 종교가 이 세상에 화마를 다시 불러온 것이다. ‘히치킨스’가 작심하고 종교 비판에 나선 까닭이다.

종교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반박에 나섰다. 수녀로 살다가 환속한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신은 어디 있나”라는 물음에 “신은 인간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암스트롱은 무신론자들의 공격에 일일이 대응하는 대신, 종교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종교는 교리, 믿음이 아니라 수행이라면서, 종교야말로 인간의 영혼을 보듬는 가장 중요한 기제라고 설명한다.

암스트롱이 부드러웠다면, 영국의 신학자 코너 커닝햄은 거칠다. 무신론자들의 ‘헛소리’를 일일이 소개하고 논박한다. 암스트롱이 대중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조곤조곤 말했다면, 커닝햄은 중세의 교부부터 프리드리히 니체, G K 체스터튼, 모리스 메를로 퐁티, 자크 라캉, 알랭 바디우 등을 현란하게 인용한다. 주와 색인만 150여쪽에 이른다. 역시 현란하기 이를 데 없는 슬라보예 지젝은 커닝햄의 <다윈의 경건한 생각>(원제 Darwin’s Pious Idea)이 “혼란스러운 우리 시대의 일용할 양식”이라고 평했다.

커닝햄은 다윈을 다윈주의자들로부터, 기독교를 기독교도들로부터 구해낸다. 다윈주의와 기독교 교리는 애초에 싸울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윈 근본주의자와 기독교 근본주의자는 엉뚱한 곳에 자신들의 신앙탑을 세운 뒤, 그곳에 숨어 상대방에게 화살을 쏘고 있다. 어쩌면 이 두 집단은 ‘적대적 공생관계’일지도 모른다.

커닝햄은 다윈 근본주의자들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극도의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집요하게 지적한다. 다윈 근본주의는 신의 근거를 파괴하다 못해 인간이 선 땅의 토대까지 허문다.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을 믿는다면 다윈주의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생물학을 넘어 사회학, 심리학, 윤리의식에까지 다윈주의를 적용할 수 있다. 조지 게이로드 심슨은 심지어 “(<종의 기원>이 출간된) 1859년 이전에 나온 해답은 모두 가치를 상실했다”고 말한다.

인간과 유인원이 존재론적으로 연속선상에 있다면, 유인원과 개, 개와 물고기, 물고기와 물풀, 물풀과 플랑크톤의 관계도 그러하다. 인간의 지위는 미끄럼틀 위에 오른 듯 미끄러진다. 다윈 근본주의는 무엇이든 녹일 수 있는 ‘만능 산’이다. 산화력이 너무 뛰어나다 보니 그것을 담으려는 어떤 용기든 녹이고, 결국 지구에 구멍을 뚫어버린다.

기독교 안에도 여러 가지 종파가 있듯이 다윈주의 안에도 여러 가지 입장이 있다. 그중 ‘적응주의’는 유기체가 표현한 세밀한 부분이 모두 자연선택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공작의 화려한 꽁지깃, 사슴의 거대한 뿔 모두 자연에 적응한 결과라는 것이다. 기독교에도 이와 비슷한 관점이 있는데 이를 ‘효용 창조론’이라고 부른다. 이 관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라고 본다. 창조론자가 “하나님이 하셨다”고 외칠 때, 적응주의자는 “자연선택이 했다”고 받아친다.

이것은 사실 같은 논리로 다른 단어를 배열한 것에 불과하다. 이 관점이 옳다면 맹장은 왜 있는가. 전나무는 왜 꽃가루를 낭비하는가. 인간은 왜 이타주의적 행동을 하는가. 다윈 역시 난관에 빠졌다. “모든 것이 적응이라면, 상황은 더 좋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자연선택의 전능함에 기대던 다윈은 차츰 자연선택 이외의 작용에 대해서도 탐구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다윈은 ‘다중 원인론자’라는 것이다.

다윈주의가 ‘진보’ 개념을 전제하는지도 오랜 논쟁거리였다. 사실 어떤 진화론자들은 ‘진보’라는 단어를 입에도 올리기 싫어한다. 자칫하면 다윈 이전의 세계관인 (신의 섭리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론으로 회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아니면 다윈 이후의 역사가 오용한 진보 개념의 끔찍함 때문일 수도 있다. ‘진보’라는 깃발로 ‘미개’한 사람들을 한 줄로 세운 뒤 닦달한 것이 서구 제국주의의 역사 아니던가. 진보를 믿지 않는 진화론자들은 인간의 출현이 ‘우연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자크 모노는 “우주는 생명을 임신하지도 않았고, 인간을 포함한 생명계도 임신하지 않았다. … 이 우주에서 인간은 우연히 나타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노의 말은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는, 그저 ‘낭만적’인 결론이라는 주장이 즉각 나왔다. 크리스티안 드 뷔브는 “같은 조건만 주어진다면, 생명은 언제 어디서나 비슷하게 생겨날 것”이라고, 조지 월드는 “우주는 불가피하게 생명을 낳는다”고 반박했다. 그래서 커닝햄은 타협책을 제시한다. “진화에 진보패턴이 나타난다. 하지만 진화가 보여주는 것이 역사의 진보는 아니다. 진화하는 것은 구조, 법칙, 형태다.”

사실 과학과 종교는 요란하게 싸울 일이 없다.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직후 새뮤얼 윌버포스 주교와 진화론자인 올더스 헉슬리가 벌인 논쟁은 ‘기념비적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논쟁은 마케팅적으로 과장됐다는 것이 커닝햄의 지적이다. 윌버포스 주교의 편에도 과학자가 많았고, 헉슬리 역시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 과학자라는 이미지를 심기 위해 일부러 논쟁을 벌였다. 즉 과학과 종교의 전쟁은 ‘가짜’였다.

대중은 그렇게 믿고 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다윈은 종교에 의해 탄압받은 과학자라고. 그러나 커닝햄은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도 지구가 구형임을 전제했다고 말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종교 지도자에 의해 박해받기는커녕 자신의 책이 출판된 해에 자연사했고,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 역시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 안도했을 것이다. 기독교는 알려진 것과 달리 유연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과학 덕분에 종교는 잘못과 미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종교 덕분에 과학은 우상숭배와 거짓 절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윈과 동시대에 살았던 성직자 오브리 무어는 “다윈주의는 특별 창조론보다 훨씬 기독교다웠다. 다윈주의는 하나님이 자연에 내재하며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이 모든 곳에서 나타난다고 암시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물리적 기원에 대한 설명은 과학이, 존재론적 기원에 대한 설명은 종교가 각각 나누어 맡자는 것이 이들의 생각인 것처럼 보인다.

커닝햄은 마지막 장에서 기독교 교리에 대한 파격적인 해석을 전개한다. 아니 커닝햄은 자신의 해석이 이치에 맞는 것이어서, 오히려 현대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해석이 나쁜 의미에서 ‘중세스럽다’고 여긴다. 에덴동산이 과거 어딘가에 있었다는 믿음, 하나님이 6일 만에 천지를 만들었다는 해석, 인간의 원죄의식, 내세에 대한 약속을 모두 부정한다. 대신 물질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초월주의를 간직하는 길을 내려고 애쓴다.

성 이레나이우스는 말한다.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약속이 이뤄지는 미래로 나간다”.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창조는 끝나지 않았고 계속되고 있다. “창조는 하나님의 뜻이 서서히 펼쳐지는 것”이다. 성서는 홀로 떨어진 과거사가 아니라, 펼쳐진 미래에 대한 책이다.

핵심은 그리스도다. 기독교가 물질을 중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덕분이다. “그리스도는 몸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리스도는 몸을 창조하고, 몸을 취하고, 몸을 구원하고, 끝으로 몸을 부활시키기 때문이다. 이 부활보다 더 육적인 것은 없다.” 그리스도의 존재를 통해 자연/은총, 성스러움/세속, 자연/초자연의 이원론은 무너진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 죽음 너머의 세계를 강조하는 것은 최악이다. 그것은 “이 세계를 죽음의 손아귀에 넘기고 저 세상을 꿈꾸라고” 유혹하는 격이다. 세상은 ‘우주적 공동묘지’가 아니다. 요한계시록이 이르듯이 “우리가 하늘로 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다.”(21:2)

카를 마르크스는 종교를 두고 “억압된 피조물의 한숨”이며 “비정한 세계의 마음”이며 “삭막한 환경의 영혼”이며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했다. 커닝햄은 허무주의야말로 그렇다고 되받는다. 가차 없는 물질주의로 아름다움, 진리, 선, 인격의 근거를 허문 데 따른 이득은 무엇인가. 인류의 오랜 유산인 종교를 파괴하고 광막한 허무주의의 사막에 도착해서 무엇을 얻었는가. 과학과 종교는 함께할 수 있다고 커닝햄은 믿는다. 다만, 둘의 싸움을 붙여 이득을 보려는 사람만 멀리할 수 있다면 말이다. 생전 종교인의 거센 비판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 찰스 다윈은 죽어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됐다. 낯설 것 없는 풍경이다.

다윈의 경건한 생각
코너 커닝햄 지음, 배성민 옮김/새물결플러스

과학과 종교는 애초에 싸울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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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2월 13일, 스톡홀름에서 노벨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한 알베르 카뮈(1913~1960)는 엽서에 이렇게 급히 적었다. 노벨상 수상자가 참석해야 하는 파티 같은 의례적 모임이 지겹다는 뜻이었다. 수신자는 장 그르니에(1898~1971).

알제리의 수도 알제의 철학교사였던 장 그르니에가 제자 알베르 카뮈를 처음 만난 건 1930년 10월. 담임과 반 학생 사이였다. 소르본에서 수학하고 철학분야 대학교수 자격증을 획득한 그르니에는 아비뇽·나폴리 등에서 교사생활을 하다 알제의 학교에 부임했다. 하지만 그해, 카뮈는 결핵에 걸려 학업을 중단했다. 담임은 제자의 병문안을 위해 서민동네 벨쿠르를 찾았다. 1960년 1월 4일 교통사고로 카뮈가 죽을 때까지 계속됐던 우정의 시작이었다.

알제 빈민구역의 병약한 소년과 젊은 교사로 만나 시작한 인연을 30년 동안 이어준 것은 편지였다. 남아 있는 편지만 235통. 카뮈 112통, 그르니에 123통. 20대 후반 한때 분노 조절에 실패했던 카뮈가 불태워버린 두 박스의 편지는 제외한 분량이다.

카뮈가 성장하면서, 둘의 관계는 사제(師弟)에서 문우(文友)로 변화한다. 카뮈는 새 책과 새 글을 쓸 때마다 철학자이자 위대한 작가인 스승의 반응이 궁금했다. 고민이 있을 때마다 그르니에에게 물어왔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르니에는 자신의 산문집 서문을 제자에게 부탁했고, 사르트르와 지드 등 당대 지식인들에 대한 품평을 나눴다.

30년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놀라운 것은, 카뮈보다 그르니에의 포용력이다. '따뜻한 회의주의자'로 불리는 이 성숙한 철학자는 이 긴 시간 내내 성찰의 대화를 이끌어간다. '이방인'을 쓴 재능에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제자가 물론 자랑스러웠겠지만, 제자에게 무언가를 배우는 스승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신이 내게 신세 진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나를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의 나이가 아주 어렸었다는 이유 바로 그것밖에 없습니다"(장 그르니에).

"10월이 되면 제가 선생님을 만난 지 13년이 됩니다. 그러니 이렇게 적어도 되겠지요. 선생님의 오랜 친구"(알베르 카뮈).

카뮈의 말에 따르면 둘의 관계는 예속도 복종도 아닌, 대화와 교환이요 상호대조였으며, 영적인 의미에서의 '모방'이었다.

1932년 장 그르니에가 산문집 '섬'을 펴냈을 때, 그 서문을 카뮈가 썼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안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끝에 가서 제자가 스승을 떠나 자신의 독자적이고 다른 세계를 완성하게 될 때 스승은 흐뭇해한다."

어쩌면 이후의 30년을 암시하는 자기실현적 예언인지도 모르겠다.

카뮈-그르니에 서한집 1932~1960
알베르 카뮈.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책세상

친구라고 불러도 될까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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