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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새로 나온 책

2013년 4월 1주 새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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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단치는 시·소설·에세이 등 각 부문에서 프랑스 국내 문학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뛰어난 작가이며, 이름난 애서가이자 독서광이다. 그의 깊은 사색과 빛나는 지혜가 담긴 이 유쾌하고 진지한 독서론을 읽어가다 보면, 가끔씩 무릎을 치며 경탄할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열성 독자라면 이 책을 읽으며 고도의 쾌감을 느끼기에 충분할 것이다. 저자가 끊임없이 던지는 지적인 줄다리기에 이리저리 이끌리다 보면 팽팽한 긴장감은 짜릿한 쾌감으로 변해 어느덧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이 책의 독자가 책과 독서를 이전보다 훨씬 친근하고 가치 있게 느낄 것이란 사실이다. 저자는 ‘왜 책을 읽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고는 “독서는 그 어느 것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서가 위대한 것이다”라고 답한다.

 저자는 책과 독자에게 씌워진 환상을 철저히 걷어낸다. 독자의 지적 허영심이나 책으로부터 위안을 받으려는 나약함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다. 책은 위대한 것이고, 그 책을 읽는 더 위대한 독자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저자가 독자의 환상을 깨는 방식은 때로는 독자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다.

 “책은 독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저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책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책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독서는 우리를 위로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선 오히려 우리를 낙담케 한다. 그러나 절망이 슬픈 것은 아니다.”

 샤를 단치는 그 누구보다 책과 독자에게 기대하는 바가 큰 작가다. 그의 엄격함과 신랄함은 거기서 나온다. 책과 독자에 대한 그의 사랑과 기대가 넘치다 보니 때로는 거장이라는 작가를 공격하기도 하고, 안일한 독자에겐 당장 깨어나라고 흔들어댄다. 심지어 “오만한 작가들의 사기 행각을 조심하라”고 직언을 아끼지 않는다.

 이 책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나 오르세 박물관에 버금가는 하나의 거대한 도서관을 방불케 한다. 직접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마네의 그림이나 모나리자를 감상했어도 느끼지 못했던 특별한 감흥을 한 권의 미술 비평서를 읽으며 느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명화에 대한 관심과 안목을 높여주는 계기가 된다. 이 책은 독서에 있어서 그런 역할을 한다.

 저자는 뒤라스의 작품을 “‘나 걸작이요!’라고 공공연히 으스대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은 “책이 아니라 작가의 거울”이라고 한다.

 현재 읽히지 않는 걸작은 얼마든지 있다. 그 책들은 미래에는 소멸해 버릴 것이다. 영원한 생명력의 원천은 바로 위대한 독자다. 그들이 많든 적든 간에 현재 읽히지 않는 불멸의 고전은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까. 저자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작가와 독자가 한편이 되어 죽음과 결투를 벌이는 것이다. 문학, 즉 예술의 적은 바로 죽음(소멸)이다.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죽음에 저항한 것 역시 바로 문학이고 예술이다.

 “멸망한 제국의 이름은 몰라도, 천 년 전 시인들의 작품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죽음은 망각이며, 특히 단순화이다. 반면 독서는 죽음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거부하며 인생의 아름다운 복잡성을 회복시킨다. 무덤을 꺾을 유일한 경쟁상대는 결국 도서관인 셈이다.”

 “독서는 아주 짧은 한순간이지만 죽음을 이긴다. 그리고 작가의 작품, 즉 책은 그보다 좀 더 오래 죽음을 이긴다.”

 인간은 누구나 유한한 인생을 산다. 하지만, 위대한 독자에 의해 위대한 걸작은 불멸의 생명력을 이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들에 의해 불멸의 걸작들은 끊임없이 새롭게 탄생할 것이며, 인류가 존재하는 한 그 생명력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에게 독서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죽음에 맞서 벌이는 투쟁이자 불멸을 지향하는 행위이다.

 “걸작은 민주적이지 않다.” 최근 샤를 단치가 신간을 출간하며 한 말이다. 위대한 작품은 다수결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세상을 바꾸는 책과 독자의 힘은 숫자가 아니다. 소수의 위대한 책과 위대한 독자가 세상을 바꾼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책에 대한 종말론이 확산되는 음험한 시대에 책과 독서의 가치를 옹호하며 분투하는 ‘위대한 독자’에게 바치는 헌사(獻辭)이다.

왜 책을 읽는가
샤를 단치 지음, 임명주 옮김/이루

왜 책을 읽는가…가장 '이기적인 독서'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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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을 받은 극작가 해럴드 핀터가 짧은 시 한 편을 써 친구들에게 보내고 찬사를 기다렸다. 시 전문은 이랬다. "나는 전성기 때의 렌 허튼을 알고 있었네/ 먼 옛날이지, 먼 옛날."

렌 허튼은 영국의 전설적 크리켓 선수. 핀터 친구들은 이 보잘것없는 시에 대해 "간단명료하게 핵심을 찔렀으며 감동적이다"는 소감을 전해왔다. 한 친구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참다못해 핀터가 전화를 걸었다. "시를 받았나?" "물론 받았지." "어떻게 생각해?" 친구는 잠깐 침묵하더니 답했다. "실은 아직 다 읽지 못했네."

세계적 작가가 사소한 칭찬에 집착했다는 사실을 우스꽝스럽게 들려주지만 이 정도 가십(gossip)은 양반이다. 인터넷과 식당에는 노골적인 폭로가 떠돌아다닌다. 두세 명만 모여도 우리는 종종 누군가를 씹는다. 첫마디는 "너니까 하는 말인데"나 "너만 알고 있어"로 시작된다. 가십은 종교와 세속의 억압에도 어떻게 지배력을 확장해온 것일까. 이 '지적으로 껌 씹기'는 왜 그토록 매혹적인가.

가십은 루머(소문)와는 다르다. 루머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내용이 널리 퍼지는 것이다. '타인의 사생활에 대한 소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정의되는 가십은 루머보다 실체가 있고 소수만 공유한다. 여기서 사생활이란 그(녀)의 비밀이다. 사회학자 게오르크 지멜은 "비밀이야말로 인류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에는 "서구 문학의 중심에는 비밀에 대한 발견이 있다. 때론 괴팍하고 때론 숭고한 이유로 주인공은 철저히 비밀을 숨긴다"는 대목이 나온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장 발장과 팡틴도 사적인 비밀을 감추다 위험에 빠진다. "소설은 급이 높은 가십"이라고 영국 소설가 이언 매큐언은 말했다.

비밀스러운 사람에 대한 뉴스야말로 우리 시선을 잡아끈다. 사회학자들은 최근 가십의 정의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 낱말에는 이제 악감정이 더해지고 반드시 사실로 확인돼야 할 필요가 없으며 정보의 유용한 전달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인문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그럴싸하지만 확인이 안 되고 혹독한(feasible, uncheckable, deeply damning)' 가십일수록 매력적이라고 정리한다.

이 책 자체도 가십의 꿀단지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수술을 맡았던 산부인과 의사 말에 따르면, 경호원을 거느리고 나타난 그녀는 수술하기 전에 면도한 자기 치모가 제대로 수거돼 적절히 폐기됐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간호사가 그것을 모아 경매 사이트에 올리진 않았는지 의심했다는 것이다.

메릴린 먼로가 사망했을 때 두 번째 남편 조 디마지오(전설적 야구 선수)가 장례를 도맡았다. 이 책은 "두 사람이 부부였을 때 디마지오가 그녀를 자주 때렸대. 아서 밀러(세 번째 남편이었던 극작가)가 한 말이야"라며 가십을 전파한다. 그 아서 밀러가 세 번째 아내였던 사진가 잉게 모라트에게서 낳은 아들(다운증후군 증세가 있었다)을 숨겼다는 사실도 들춰낸다.

가십의 배후에는 정보 전달 외에 흠집 내기, 성적(性的) 욕망 등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감히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 듣고 싶어 하는 법이다. 저자는 가십을 비난하지 않는다. "가십은 종종 위험하지만 뻔뻔한 위선을 들추고 선량한 보통 사람은 거기서 쾌감을 느낀다. 멋진 가십을 듣고 전하는 일이 기뻤다"는 고백이다.

가십은 어떤 사실과 시각, 모략을 공유하는 오래된 방법의 하나다. 진화생물학은 사회적 결속을 다지는 생존 도구로 그것을 해석하기도 한다. 집단은 커질수록 물리적인 접촉이 어려워지는데, 대화와 글이 그 틈새를 메울 수 있다는 것이다. 트위터·페이스북·블로그는 이제 지구 반대편까지 가십을 곧장 유포한다.

당장 현재진행형인 가십이 떠올라 더 잘 읽히는 책이다. 열흘 전에 '윤중천 성 접대 스캔들의 내막'(?)이 카카오톡으로 들어왔다. 별장, 로라제팜, 벤츠, 동영상 같은 낱말 사이에 저명인사들의 실명이 박혀 있었다. 매혹적인 가십의 조건을 두루 갖췄다.

이 책은 가십의 역사를 다루지는 않는다. 선박왕 오나시스와 마리아 칼라스, 마틴 루서 킹 2세, 수전 손택, 다이애나 왕세자빈, 존 F 케네디, 바이런, 헤밍웨이 등의 비밀을 들추는 재미에 책장이 빨리 넘어간다. 황홀한 가십 퍼레이드다. 원제는 'Gossip'인데, 달콤하지만 결과가 심각할 수 있는 가십에 빗대 달았다는 한글 제목은 영 요령부득이다.

성난 초콜릿
조지프 엡스타인 지음, 박인용 옮김/함께읽는책

毒이 든 초콜릿처럼… 달콤살벌한 가십의 양면성
'가십'은 악의적일수록 멀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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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프랑스에서 <다가오는 봉기>라는 작은 책이 출판됐다. 저자는 ‘보이지 않는 위원회’였다. 이 책은 현대 자본주의가 어떻게 자아, 사회적 관계, 노동 등을 소외시키는지 분석하고, 주류 정치 바깥에 반자본주의 운동을 추진할 코뮌(공동체)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이들은 “당신이 진실이라고 느끼는 것에 참가하고, 만남의 즐거움을 경험하고, 개인을 구속하는 옷을 벗어던져라”고 말한다. 이듬해 프랑스 정부는 인구 350여명의 시골 마을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던 30대 쥘리앵 쿠파와 그 동료 8명을 이 책의 저자로 지목하고 ‘테러활동을 위한 범죄조직을 결성했다’는 혐의로 체포했다. 그들이 그곳에서 한 일은 “오래된 오두막을 복원하고 낡은 바를 다시 살리고, 근처 식료품 가게를 이동도서관과 시네클럽의 도움을 받아 협동조합으로 재조직화”하는 일 등이었다. 이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풀려났다.

영국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앤디 메리필드의 <마술적 마르크스주의>는 지은이의 표현대로 “이중의 불만”에서 나온 책이다. 하나는 “세계에 대한 불만”, 즉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이고, 또 하나는 “지는 경기를 계속하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불만이다. 지은이는 자신이 지향하는 대안적 마르크스주의 개념과 운동사례들을 풍부하게 제시하는데 <다가오는 봉기>도 그중 하나다.

그는 <뉴레프트 리뷰> 등으로 대표되는 기존 좌파 집단을 향해 다소 신랄한 비판을 퍼붓는다. 그들의 활동은 “그저 경험적 조사를 하고, 실패한 지구적 체제를 감시하고,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비판적 부정성에 골몰하”는 “무기력하고 미래도 없고, 희망도 없고, 누군가에게 다가갈 수 있는 별다른 내용도 없는” “자신들의 엘리트 이너서클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참여”라는 것이다.

그는 “노동자 계급은 여전히 확고하며,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는 사고방식과도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집단이 자본주의에 대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불만 때문에 하나로 모일 수 있다면 이 반자본주의 동맹이 ‘노동자 계급’인지 아닌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청년층, 지식인, 탈숙련노동자, 실업자, 감원된 노동자, 느리게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 낙오자, 부적응자, 성공하거나 좌절한 천재들…. 이들은 모두 ‘반자본주의 동맹’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이 동맹의 의제 또한 다양할 수 있다. 제3세계 부채 탕감, 어린이 노동 금지, 자동차 추방, 도시를 활력있게 만들기,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폐쇄, 고삐 풀린 지구화 길들이기, 세계를 바꾸고 삶을 바꾸기 등.

‘마술적 마르크스주의’라는 용어는 라틴아메리카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로 대표되는 ‘마술적 리얼리즘’에서 빌려온 것이다. 또한 이 책 전체가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의 고독>에 대한 오마주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곳곳에서 이를 인용한다. 지은이는 그 이유를 <백년의 고독>이 “우리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에 관한 또 다른 모습을 제공하고, 진보주의자들에게 영구적인 전복의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상상적인 도구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비정규직, 실업 문제 등과 관련해 “완전고용, 제대로 된 임금과 복지가 있는 제대로 된 일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좌파의 목소리”를 비현실적이고 구시대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더 적게 일하고 더 낫게 살자가 시대정신이다”고 강조하는 대목 등 기존의 통념을 깨는 주장들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다. 또 옮긴이가 지적했듯이 “곳곳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해방구가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해 어떤 계획과 연결망, 전략이 필요한지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을 열고 읽어 내려가다 보면 21세기가 요구하는 진보의 상상력에 대한 한 모습을 얻을 수 있다. 지난해 영국의 진보서점연합이 뛰어난 저술에 수여하는 ‘빵과 장미상’ 최종 후보 일곱 작품 안에 포함됐다.

마술적 마르크스주의
앤디 메리필드 지음, 김채원 옮김/책읽는수요일

마르크스주의, 이제 이기는 게임을 하라

+1960~70년대 경제개발 없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겠지만 그에 따른 희생과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거대한 역설>(원제: Development and Social Change)은 지난 수백년 간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를 움직여 온 키워드 '개발'을 전방위적인 관점에서 심층 분석한 비판서다. '왜 개발할수록 불평등해지는가'라는 부제처럼 비판적인 접근을 하고 있으나 무조건적인 비판론은 아니다. 현대 사회의 모든 측면을 아우르는 통합 주제인 개발의 이론과 실제가 역사적으로 어떤 변화 과정을 거쳐왔는지를 살펴보고 각종 대항운동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는 한 권의 개발 통사에 가깝다.

1996년 초판이 나온 이후 2012년 5판까지 나올 정도로 개발 분야의 손꼽히는 저작이다. 저자는 미국 코넬대 교수로 국제 개발 분야의 권위자로 개발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접근한다. 전 지구적 개발은 국제 정세와 주변 상황에 편승한 인위적 노력이었으며, 따라서 자연스러운 진화가 아니라 정치적 기획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근래의 개발에 대해 경제 개발로 국가의 존재 의의를 인정받으려 했던 개발 프로젝트 시대(1940~70년대), '시장은 선, 국가는 악'이라는 인식하에 민영화 위주로 진행된 지구화 프로젝트 시대(1970~2000년대), 두 시대 사이의 긴장으로 출현한 지속 가능성 프로젝트 시대(2000년대 이후)로 분류한다.

세상은 끊임없는 개발로 나아가고 있으나 모두를 행복하게 해 주는 착한 개발은 없다. 세계 인구 중 상위 10%의 부유층이 전 세계 소득의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10억명이 넘는 사람들이 만성 영양 실조에 신음하는 현실에도 개발이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연평균 5~8%의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인도에서는 아직도 5세 미만 어린이 절반이 영양실조에 시달린다.

초국가적인 개발 시스템은 불평등의 새로운 지리학을 낳았다. 개발을 신봉하는 북반구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부정적인 효과를 남반구의 빈민층이 뒤집어 쓰고 있다.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소규모 경작을 하던 농민들이 상업형 농토 개발에 따라 도시 빈민층으로 전락하면서 슬럼을 형성하고 있다. 쓰레기 매립지에서 폐지나 넝마를 모으며 살아가는 인도 빈민여성들은 수입이 절반이나 줄어 새벽 5시가 아니라 3시부터 일을 시작하고 일손을 돕기 위해 아이들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로 사정이 나빠졌다.

때로는 서민을 도우려는 개발 담론이 족쇄가 되기도 한다. 빈곤층 소액 대출이라는 획기적인 사업으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 역시 초기의 취지가 무색하게 평균 이율은 20% 이상의 악덕 고리업으로 전락했다. 소액 대출 중 성공 케이스는 4분의 1도 되지 않는다. 그라민은행 설립자인 무함마드 유누스 총재는 미소금융이 미래에 또 다른 형태의 악덕 사채업자들을 낳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뼈아픈 고백을 해야 했다.

책 전반에 걸쳐 개발과 성장 담론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 현실을 아프게 지적하면서 금융, 환경, 식량 위기에 맞서 일어선 전 지구적 대항운동과 담론을 소개한다. 인도의 칩코 운동, 멕시코 사파티스타 봉기, 탈성장이나 제로성장 같은 대안적 성장이 그것이다. 인도어로 껴안다라는 뜻의 칩코 운동은 1973년 4월 히말라야의 우타르 프라데시에서 원주민들이 전기톱을 휘두르는 벌목공들에 맞서 나무를 껴안으며 저항한 것을 일컫는다. 1983년 11월 신자유주의 반대와 원주민 권익보호를 요구하며 북미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여 결성된 멕시코 사파티스타 역시 정책결정자들 사이에 원주민 현안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했다.

개발은 인간에게 기회와 번영을 확대해주지만 불평등을 통해 이루어지고, 빈곤 퇴치를 목표로 삼지만 빈곤을 심화하기도 한다. 역자인 성공회대 조효제 교수는 책에서 "개발만큼 역설로 가득 찬 현상도 없을 것"이라며 "그저 좋은 개발은 없으며, 누구를 위한 개발인지 어떤 성격이 개발인지를 반드시 짚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600쪽의 방대한 분량에도 세계의 공장 중국,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에서 몰락한 디트로이트의 도시 농업 사례 등 풍부한 사례 분석으로 딱딱하지 않게 읽힌다.

거대한 역설
필립 맥마이클 지음, 조효제 옮김/교양인

정치적 산물 '개발'…그 불평등의 역사
개발은 정치적 기획… 누군가엔 개선, 누군가엔 개악
“지배자들이 기획한 프로젝트”…서구 주도 개발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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