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깊이 꿰뚫어 보지 못하면서 남을 공격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은 본디 괴상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만, 숙헌(叔獻)의 고명하고 초탈한 견해로도 이 그림을 보는 데 이렇게 구애되고 막힐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1570년(선조 3년), 70세의 노인은 35세의 후학(後學)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답답한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어떻게 그렇게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느냐'며 꾸짖는 듯하다. 편지를 쓴 사람은 퇴계 이황(1501~1570), 수신자인 '숙헌'이란 율곡 이이(1536~1584)의 자(字)다. 당시 서울에서 관직에 있던 율곡은 안동으로 귀향한 퇴계와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때의 편지는 12년째 이어지는 중이었다.
퇴계의 분노는 원나라 학자 정복심(程復心)이 그린 '심학도(心學圖)'를 율곡이 비판한 것에서 비롯됐다. 주자학 중 심학(心學)의 기본 설계도를 축약해서 그린 이 도상은 한마디로 '마음의 지도'였다. 퇴계는 자신의 저서 '성학십도'에 이것을 채택했고, 그걸 본 젊은 율곡이 이의를 제기했다.
율곡의 긴 생각을 풀이하면 이렇다. 〈자, 보시라! '대인심(大人心)'이란 인간 마음의 최고 경지인데, 어떻게 이것이 마음의 기본 조건인 '본심'이나 '양심' 같은 것들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가? 아래쪽에 있는 '구방심(求放心)'이란 것은 또 무엇인가. '집 나간 마음을 찾아온다'는 것이니 배우려는 자들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것인데, 고작 '극복'보다 서열이 낮다니? 이건 공자가 안회에게 말한 '극기복례(克己復禮·자신을 극복해 예로 돌아감)'의 준말인데 솔직히 말해 좀 시시한 개념이 아닌가?〉
요즘 말하는 '극기훈련'의 '극기'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율곡에게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것이다. 도대체 이 그림은 체계가 없어요, 체계가…. 율곡은 이미 성현으로 추앙받던 만년의 퇴계에게 마침내 이런 돌직구를 날린다. "별로 의미가 없으니 아마도 반드시 취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 책에서 빼라'는 얘기다. 당시의 35년이라면 조손(祖孫)의 격차인 집안도 많았다.
퇴계가 다시 붓을 든다. 이것은 마음의 개념을 모두 힘써야 한다는 뜻에서 바둑판처럼 배열한 것이지, 선후의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지금 그대가 보내온 편지에서 운운한 것이 어찌 정씨(정복심)의 실소를 받지 않겠습니까?" 혀를 끌끌 차는 퇴계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퇴계와 율곡이라는 조선 중기 성리학의 양대 철학자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퇴계전서'와 '율곡전서'에 실린 이들의 편지는 모두 14통(퇴계 9통, 율곡 5통)으로, 무척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내용이다. 이광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는 이 편지들과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詩)를 처음으로 모두 번역했다. 각주와 해설이 많지만, 오히려 책 분량을 늘이더라도 좀 더 일반 독자 눈높이에서 친절한 설명을 했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두 사람의 성리학 사상에서 드러나는 이질성은 라파엘로의 벽화 '아테네 학당'을 연상케 한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플라톤이 퇴계라면, 손을 앞으로 뻗어 지상을 가리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율곡이 아닐까. 퇴계의 삶은 '궁극적 진리'인 하늘을 향해 있었던 반면, 율곡은 땅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자는 이렇게 말한다. "퇴계에겐 율곡이 도덕의 본원에 충실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며, 율곡은 퇴계가 세상에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물러나기만 좋아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이 지향하는 종착점이 같았다.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 도(道)가 실현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 "소박하고 성실하게 공부하라"(퇴계) "(은거하지 말고 서울로) 올라오셔서 나라의 뿌리를 북돋워 달라"(율곡)는 등, 편지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충언은 그들이 비록 생각은 달랐어도 서로 존중하고 아끼는 관계였음을 알게 한다.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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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문화는 계몽적 성격이 강했다. 지배계급과 지식 엘리트는 민중을 기르는 일, 즉 계몽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밭을 경작하듯 민중을 기르는 일(cultivating)이 문화의 본분이었다. 문화라는 것은 결국 민중에게 규범을 주입해 사회질서를 견고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왕정시대 프랑스에서 등장한 ‘문화 정책’은 근대까지 국민 계몽이 주임무였다.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 문화는 식민지의 문명화를 일컬었는데 문명화는 열등 시민을 계몽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 혁명의 시대에서 문화는 사회 계급을 선명히 드러내고 유대를 다져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바우만의 전매특허 개념인 ‘유동하는 현대’에 문화는 더 이상 계몽도, 사회질서 유지의 도구도, 계급의 창도 아니다. 문화가 사회적 차원을 벗어나 개인화됐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유동하는 현대사회의 문화에는 계몽하거나 고상하게 할 ‘민중’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유혹할 고객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유혹은 온전히 욕구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행위에 관여한다. 물론 소비 시장이 욕구 창출을 주도한다. 문화는 이제 시장의 손에 넘어갔다.
시장은 유행을 통해 문화를 요리한다. 유행을 따르는 것은 ‘소비하는 시민’의 공통 의무가 됐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왜 유행을 좇을까. 바우만은 유행을 사냥에 비유하며 이에 답한다.
사냥꾼은 사냥감을 잡았다고 사냥을 멈추지 않는다. 사냥의 쾌감과 흥분, 즉 욕구야말로 사냥꾼의 진정한 목적이기 때문에 사냥꾼은 끊임없이 사냥감을 찾아 나선다. 그에게 과업의 완수, 사건의 종결 같은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냥을 멈춘다는 것은 삶의 실패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사냥을 마약과 같다고 했다. “한 번 맛보면 습관이 되고, 내적 필연성이 생기며,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유행의 속성과 똑같다.
바야흐로 우리는 사냥꾼 사회를 살고 있다. 씁쓸하지만 이것이 우리 시대 유토피아의 모습이다. 유행의 시대에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곰곰이 따져 물을 겨를은 없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묻는 행위는 부질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유동하는 현대는 세계화가 촉발한 디아스포라(이주)의 시대다. 우리는 세계 각지에서 온 이주자에게 둘러싸여 산다. 이 과정에서 다문화주의가 뿌리내렸다. 하지만 바우만은 다문화주의를 비판적으로 본다. 다문화주의는 사회적 불평등을 문화적 다양성으로 포장해 보편적 가치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권력층과 부유층은 다문화주의가 뿌리내릴수록 그들만의 특권을 지켜내기가 쉬워진다고 한다.
유행의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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