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포를 입고 갓 쓴 남자가 밥을 먹고 있다. 개다리소반에는 밥과 국, 반찬 6개가 놓였다. 그런데 밥그릇 크기가 엄청나다. 높이 9㎝, 지름 13㎝, 용량 900㏄. 요즘 가정에서 사용하는 밥그릇 용량이 보통 270㏄다. 약 120년 전에 찍은 이 사진의 주인공<가운데 사진>은 현대 한국인이 세 끼에 걸쳐 먹을 양을 한 끼에 먹은 것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밥을 많이 먹었고, 식자층에선 이걸 경계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1681~1763)이 '성호사설' 제17권 '인사문(人事門)'에 쓴 '식소(食少)'라는 글을 보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식(多食)에 힘쓰는 것은 천하 으뜸이다. 최근 표류돼 유구(琉球·지금의 오키나와)에 간 자가 있었는데 그 나라 백성이 '너희의 풍속은 항상 큰 주발에 쇠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실컷 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 하고 비웃었다고 한다." 이익은 중국 고전에 나오는 '식소'라는 문구를 내세워 "밥을 적게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음식을 인문학, 역사학의 맥락에서 해석해온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펴낸 이 책은 '메뉴로 본 20세기 한국 음식 문화사'다. 장국밥·설렁탕·육개장·신선로·어묵·김밥 등 지난 100여년간 한국인의 식탁에 오른 대표 메뉴 34가지의 기원을 추적했다. 음식마다 얽혀 있는 시대 이야기가 풍성하다.
비빔밥은 가장 오래된 외식업 메뉴 중 하나. 조선 후기부터 서울 골목에는 설렁탕, 장국밥과 함께 비빔밥을 파는 식당이 꽤 있었다. 비빔밥이 근대적 메뉴로 정착한 것은 1920년대 육회 비빔밥이 서울·진주 지역 식당의 주요 메뉴가 되면서부터. 서울과 진주의 근대적 도시화, 우(牛)시장의 성장, 고추 품종의 개량으로 '육회'와 '고추장'이 비빔밥의 간판이 됐다. 반면 1890년대에 필사된 한글 조리서 '시의전서·음식방문'에서는 비빔밥에 육회를 올리지 않고 고추장도 넣지 않는다.
식(食)문화의 변화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변동의 총체적 결과물. 본래 음력 11월부터 먹는 '겨울 한정 음식' 냉면이 여름 음식으로 변신한 시기는 1910년대. 근대적 제빙(製氷) 기술과 겨울에 캐낸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할 수 있는 냉장시설의 탄생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조선왕조 궁중음식의 대표 메뉴인 구절판은 음식을 담는 그릇이면서 동시에 거기에 담긴 음식 자체를 가리킨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조선시대 궁중과 양반가에서 음력 6월 유두절 때 먹었던 세시음식"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저자는 "조선 후기에 나온 조리서를 아무리 뒤져도 구절판이 없다"고 말한다. 일제강점기, 그것도 1935년이 돼야 신문에 구절판이란 음식이 등장한다. 어찌 된 일일까.
저자는 "구절판 그릇은 중국에 기원이 있을 가능성이 크고, 먹는 방식은 20세기 한반도의 식탁에서 이뤄진 다문화적 교섭의 결과"라고 추정했다. "중국 음식인 춘쥐안(春卷), 조선 후기의 전병인 연병, 일제강점기의 밀쌈 등이 점차 어우러져 1930년대에 조선 버전의 구절판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204쪽)
또 다른 궁중음식인 탕평채의 기원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탕평채=영조의 탕평책에서 비롯된 음식'이란 인식도 일제강점기의 산물이라는 것. 저자는 "조선 후기 문헌에선 영조와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여러 가지 재료를 골고루 섞었다는 뜻에서 탕평채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했다.
이같은 흥미로운 추적을 통해 저자는 한식의 고유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소비하는 한국 음식에는 다종·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는데 오래된 음식만 꼽아 '한식'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느냐." 20세기 한국 음식은 식민주의, 전통주의, 민주주의, 국가주의, 세계화 담론이 '혼종'된 결과라는 것이다.
오래된 한국 음식으로 여기는 '당면 잡채'도 한·중·일의 합작품이다. 한국에 들어온 중국 식당에서 당면이 들어간 중국식 잡채가 인기를 끌면서 전국 각지에 당면 공장이 들어섰고, 일본인들은 양조간장 공장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1930년대에 당면이 들어가고 양조간장으로 간을 맞춘 한국식 잡채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음식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안목을 기를 수 있는 책. 챕터별로 골라 읽어도 되니, 572쪽의 방대한 분량에 압도될 필요는 없다.
식탁 위의 한국사 |
삼계탕은 옛 문헌에 없는 이름
삼계탕 한 그릇, 보쌈 한 점에도 구구절절한 사연 차고 넘치네
1900년 김서방, 냉면 먹으려 음력 11월을 기다렸다지
200년전 선비들 개고기 논쟁… 육개장이 대안
국밥부터 패스트푸드까지 20세기 한국음식 사회사 ‘음미’
맛의 근원을 찾아 역사와 버무린 `음식의 인문학`
설렁탕·김밥에 담긴 역사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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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빠’
글로벌 IT(정보기술) 기업인 애플의 제품에 열광하는 ‘애플 마니아’들을 지칭하는 속어다. 팬덤(fandom) 문화에서 비롯된 ‘빠순이, 빠돌이’와 IT업체의 이름이 결합된 것이다. 부정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지만 이들은 ‘애플빠’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다. 다른 어떤 전자업체도 이처럼 충성스런 고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애플 마니아들에게 애플은 단순한 IT기업이 아니라 혁신을 의미한다. 현실을 바꾸고, 미래를 앞당기는 선구자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처럼 IT기업이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와 비슷한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제품 때문만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인 가이 가와사키(Guy Kawasaki)는 마케팅의 마술을 통해 애플을 ‘영혼의 구원자’로 바꿔 놓았다.
저자는 일명 ‘에반젤리즘(Evangelism, 복음주의) 마케팅’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종교를 전하는 전도사처럼 특정 기업이나 상품의 절대적 매력을 전파하는데 집중해 왔기 때문이다. 1983년 애플의 개인용 컴퓨터인 매킨토시에 매료돼 입사한 이후 그는 25년여 동안 열정적인 애플 전도사로 활동해 왔다. 그 덕에 애플 뉴욕 매장은 ‘글래스 애플 템플(사원)’으로 불리고 애플 매니아들은 앞장서서 애플 제품을 주위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마케팅 전략의 핵심은 명료하다. 상대를 매료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천, 수만 개의 제품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현실에서 소비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는 쉽지 않다. 저자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루한 설명보다 진정한 ‘매혹’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상대방의 마음과 머리, 행동을 모두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책의 원제가 매혹(enchantment)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먼저 한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하고, 호감으로 시작하되 나중에는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9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모두를 내편으로 만들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포기할 것을 먼저 정한 뒤 가까운 사람부터 움직이라는 것이다.
또 최고의 전략은 사람이며, 파워포인트 등 실무 기술도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디테일(세부사항)이 승부를 가를 수 있고, 소비자가 가슴으로 따르게 해야하며 상사를 자기편으로 생각하고 나쁜 성공은 피해야 한다는 원칙도 제시했다.
풍부한 사례와 간결한 문체는 부담 없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돕는다. 각 챕터 끝에 ‘나는 이렇게 매료되었다’는 사례 위주의 꼭지를 끼워 넣은 것도 읽는 재미를 더하는 요소다. 다만 ‘쉬운 단어를 사용하라’, ‘칭찬하라’ 등과 같이 군데군데 등장하는 뻔한 내용은 아쉬움을 남게 한다.
가이 가와사키의 시장을 지배하는 마케팅 |
가이 가와사키의 시장을 지배하는 마케팅
애플 마케터 출신이 알려 주는 끌어당김의 기술은 '매혹'
모든 소비자를 매혹시킬 순 없다…추종자를 만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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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두 개의 얼굴을 지녔다. 여행자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거나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산업으로서의 관광은 환경을 더럽히고 관광지화한 공동체에서 원주민을 내몬다.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인 저자는 오늘날 지상에서 가장 각광받는 여행지를 골라 다니면서 그 속에 도사린 관광의 두 얼굴을 들춰낸다. 각 장(章)의 앞부분마다 여행지의 아름다운 풍경과 즐거운 오락을 보여주지만 이는 이어지는 산업으로서 여행의 어두운 이면과 날카롭게 비교될 뿐이다.
저자는 관광이 '양날의 칼'이 된 대표 사례로 베네치아를 든다. 16만명을 넘던 베네치아 인구는 5만명으로 줄었다. 치솟는 집값과 임대료가 문제였다. 빈집이 나올 때마다 세계적 호텔 체인이 차지하고, 정육점과 빵집 등 주민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게가 임대료를 내지 못해 쫓겨났다. 주민이 사라지자 병원과 학교도 문을 닫았다. 세계 각국에서 2000만명 넘는 관광객이 이 도시를 찾아든다. "베네치아가 물에 잠기면 관광객만 위험에 빠진다"는 우스개가 나돌 정도다.
이어 찾아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또 다른 관광의 역설을 만났다.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립은 1960년대 캄보디아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주였다. 이곳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해마다 수십억달러가 쏟아져 들어왔다. 2009년 유엔개발계획의 조사에서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시엠립은 캄보디아에서 가장 가난한 주로 전락했다. 관광의 과실을 투자자들이 싹쓸이해 갔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 쇼핑 천국으로 부상한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는 외국인 노동자의 임금과 여자의 성을 착취해 쌓은 소비와 환락의 성채다. 두바이의 단기 비자는 성매매 여성을 주기적으로 물갈이하는 데도 악용됐다. 아프리카 초원의 야생동물은 '짐승답게 살' 권리를 박탈당했다. 바다에선 승객 2000명을 태운 유람선 한 척이 매일 자동차 3110만대분의 매연을 쏟아낸다는 수치도 든다.
오늘날 여행은 개인의 권리로 보호받고 있으며, 각국은 관광객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 2020년쯤엔 중국에서만 해외여행 1억건 시대가 도래한다는 전망도 있다. 저자는 현재로선 개선책을 찾기도 어렵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관광산업의 폐해를 주목하는 게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지속 가능한 여행법'을 찾는 고민의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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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가 물에 잠기면 위험한 건 관광객뿐?
관광산업의 추악한 이면
거대 산업이 된 관광의 빛과 그림자…여행자에겐 힐링, 자연엔 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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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에 '시한부 3개월'은 쌔고 쌨다. 이야기에 긴장과 통증을 싣는 장치다. 시한부 3개월은 현실의 병원에서도 암 환자에게 종종 '선고'된다. 말 그대로 날벼락이다. 그런데 이 책은 "시한부 3개월이 남발되고 있다"면서 "의사가 권하는 암 치료가 시한부 3개월을 만들 뿐"이라고 말한다.
일본 의사인 곤도 마코토는 방사선 치료 전문가다. 저서 '암과 싸우지 마라'는 일본에서 50만부 팔리며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번 책에서는 시한부 선고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항암제의 정체가 무엇인지, 암 진단을 받으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등을 사례와 더불어 설명한다. "의사는 환자가 예상보다 빨리 사망하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시한부 기간을 짧게 말한다" "항암제는 효과가 없다" "위암, 폐암, 대장암, 자궁암 등 덩어리를 만드는 고형암은 치료를 하든 하지 않든 생존 기간은 다르지 않다" 같은 주장이 충격적이다.
의사는 '시한부 3개월'이라는 말로 환자를 절망에 빠뜨리고 나서 "수술과 항암제로 치료하면 2년은 살 수 있다"는 식의 '희망 고문'을 한다. 수술과 항암제가 병원과 제약회사에 이롭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 게이오대학병원에서 암을 치료하지 않고 생활하는 환자 150여명을 길게는 23년간 정기적으로 진찰해 온 저자는 "말기 암에서 기적적으로 완치됐다는 말은 진행 암이 아니라 '유사암(전이되지 않는 암)'에 관한 이야기"라면서 "진통제로 증상을 다스리면서 치료하지 않고 관리하는 게 삶의 질을 유지하며 장수하는 길"이라고 결론짓는다. '시한부 3개월'이라는 공포 산업에 정면으로 메스를 들이댄 책이다.
시한부 3개월은 거짓말 |
시한부 3개월 암환자, 항암치료 안 받더니 23년을 더 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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