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기억을 회상의 복사물이라고 했다. '인상'을 보관하는 밀랍판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후 철학자들도 그 은유의 대상을 파피루스, 양피지, 책, 사진, 하드디스크 등으로 바꾸어갔을 뿐 같은 인식을 공유했다. 기억이란 보존, 저장, 기록 혹은 뭔가를 보관하는 것이라는 인류의 오랜 믿음이 있었다.
이 책은 그러한 믿음을 반박한다. 기억이란 망각의 지배를 받는 메커니즘이라는 주장을 통해서다. 세상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인간은 망각하기 시작한다. 기억은 우리의 5가지 감각을 통하지 않고는 금세 사라진다. 미국 심리학자 조지 스펄링의 실험이 있다. 0.05초 동안 3줄에 걸쳐 쓴 알파벳 12개를 보여준 뒤 즉시 숫자를 물으면 실험자들은 평균적으로 4분의 3을 기억했다. 하지만 즉시 다시 물으면 다른 줄의 숫자를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했다. 시각적 자극은 0.25초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는 증거다.
소리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2~4초 정도는 대부분 기억하지만, 이후 기억은 번개처럼 사라진다. 오히려 정보가 오래 입력되어 있으면 이후의 정보 입력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영화를 볼 때 1초당 24개 장면을 보지만, 우리가 움직이는 장면으로 인식하는 것은 입력하는 속도만큼 망각의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기억은 깔끔하게 정리된 도서관 서고가 아니다.
네덜란드 흐로닝언대 심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망각'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들려준다. 정신의학·신경학과 관련한 '마음의 혼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장' 등 책을 써온 저자는 망각이야말로 기억의 본질이며 도구임을 다양한 학설과 사례를 통해 증명한다. 이 책이 다루는 두 가지 망각의 부류는 '자서전적 기억의 망각'과 '병리학적 망각'이다.
필리프 르죈은 1975년 이렇게 썼다. "우리 모두는 자기 인생을 끊임없이 수정한 이야기를 지니고 다닌다." 우리 기억은 체험의 반복이 아니라 재구성이며, 이는 과거의 우리에게서 영향을 받는다. 오래전 일기를 읽을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체험이 사라졌는지 깜짝 놀라지 않는가. 또한 기억은 과거의 사실에서부터도 유리된다. 한때 아버지와 나눈 대화, 어머니가 만들어준 수프, 세 살 딸아이와 했던 산책의 기억은 각색되기 십상이며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스쳐간 찰나의 순간이 꿈속에 생생히 나타나는 예를 들며 "우리가 일단 정신적으로 소유했던 것은 완전히 상실될 수 없다"고 했다. 절대적 기억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말이다. 동시대 많은 의사와 심리학자 등은 우리 기억은 현상되지 않은 사진처럼 모든 흔적을 뇌 속에 기록한다고 믿어왔다. 1000억개 뇌세포를 지닌 인간은 뇌를 10%밖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신화도 이런 믿음에 기초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뇌는 그렇지 않다.
코르사코프 증후군이란 병이 있다. 이 뇌손상을 입으면 기억상실로 고통받는다. 기억을 저장하지 못하기에 끊임없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들에게도 학교에서 배운 것, 전문지식 등 의미론적 과거의 흔적은 남아 있는 걸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코르사코프 증후군을 앓고 있는 Z교수의 실험을 통해 이 같은 생각은 뒤집어졌다. 그는 병이 심각해지기 전 자서전을 집필했는데, 시간이 흐른 뒤 기억의 잔재들을 대조해보니 의미론적 기억조차도 각색되었음을 발견했다. 기억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으며, 심지어 누군가에게 듣거나 어딘가에서 읽은 내용도 자기 경험으로 기억하는 것이 많았다. 절대적 기억에 대한 신화는 망각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근거 없는 믿음에 가깝다는 얘기다. 망각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열정적인 노력이 사진이다. 우리는 사진이 기억을 지지해주길 기대하고, 아울러 언젠가는 우리 기억을 대체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초상화가 특히 그렇다. 사랑했으나 이미 죽은 사람 사진은 우리를 기억이라는 아련한 섬으로 밀어보낸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은 '제2의 죽음'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의 공포 정치 시기, 다음날이면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지인들에게 작별 편지를 쓰곤 했다. 편지를 통해 그들이 자신을 잊지 않으리라는 것에 큰 위안을 얻었다.
저자는 고대에서부터 '기억술'은 전해져 오는데, 뭔가를 의도적으로 잊어버리고 싶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망각의 기술'은 남겨 놓지 않았음에 주목한다. 유감스럽게 망각의 기술도, 방지하는 안전장치도 없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2004)에서 주인공은 불행한 사랑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컴퓨터회사 라쿠나의 도움을 받는다. 이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을 지우더라도 인연의 본질은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줬다. 1976년 나온 봄멜 씨에 관한 책 '망각에 관한 소책자'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을 억압하는 기억을 지우는 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음을 알려주는 이야기다.
사람들이 가장 보호하고 싶은 기억은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들에 관한 기억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 기억은 말을 듣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한다.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우리의 노력은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을 잃고 기억을 보존하거나 잊으려고 애를 써도 그 노력은 무용하다. 언젠가는 잊히도록 인간은 설계되어 있으니, 망각이라는 축복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망각 |
당신의 기억, 어디까지가 진짜일까
기억과 뒤섞인 망각, 그 사이에는 뭐가 있을까
왜 어떤 일은 기억하고 어떤 일은 쉽게 잊을까
기억은 말을 듣지 않는 어린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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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내게 읽는 법과 쓰는 법, 바느질하는 법, 살림하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내가 이 필요한 것들을 거의 다 배우자 나를 은퇴한 대령의 집에 보조 하녀로 취직시켜 주었다. 이 대령은 매년 여름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콩포르 근처의 황폐화된 작은 성을 찾아왔다. 그들은 분명 친절하기는 했지만 늘 얼마나 침울했는지! 그리고 편집광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르는 법이 없었고, 고집스러울 정도로 늘 검은색인 그들의 옷에서는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138쪽)
"논의와 모욕적인 조사와 더 모욕적인 흥정을 거쳐 탐욕스러운 부르주아들 중 한 사람과 합의를 본다 해도 1년 치 급료의 3센트를 직업소개소에 줘야만 한다. (중략) 칼같이 계산해 수수료를 챙겨 간다. 오! 직업소개소는 아주 요령이 좋다. 하녀들을 어디로 보낼지를 알고, 하녀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4개월 반 만에 일곱 군데를 옮겨 다녔다. 우울함의 연속이었다.""(406쪽)
프랑스 작가 옥타브 미르보(1848~1917)의 장편소설 '어느 하녀의 일기'가 국내 번역출간됐다.
이야기는 19세기 말 프랑스 노르망디의 한 시골 마을 메닐-루아에, 파리에서 온 하녀 셀레스틴이 부유하지만 인색하기 그지없는 랑레르 부부의 집에 취직돼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브르타뉴 해안의 오디에른 출신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알코올 중독자인 어머니의 학대를 받으며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낸 셀레스틴.
수녀원의 도움으로 어머니 손에서 벗어난 그녀는 언니, 오빠와도 소식이 끊긴 채 혈혈단신 수많은 일자리를 전전하며 인생의 쓴맛과 단맛, 환멸을 두루 맛본다.
하녀로 일하면서 자신이 모시는 주인은 물론, 동료 하인들과 자신을 스쳐가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꿰뚫어 보는 비상한 관찰력을 가진 셀레스틴은 매혹적인 용모와 언동으로 모든 남자가 추근거리는 욕망의 대상이 되곤 한다.
자신을 한시도 가만두지 않는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랑레르 부인 때문에 지쳐가는 가운데, 부인에게 주눅 들어 있으면서 하녀를 통해 욕정을 분출하려는 랑레르의 추파를 받기도 한다.
그녀는 이내 시골의 단조로운 일상에 따분함을 느낀다. 퇴역 군인인 모제 대령을 모시는 이웃집 하녀 로즈의 주선으로 나가기 시작한 마을 하녀들의 모임이 그녀의 지겨움을 잠시나마 해소해주는 유일한 오락거리다.
매주 일요일 미사가 끝난 뒤 구앵 부인의 식료품점에서 열리는 이 모임에서는 마을에 떠도는 온갖 풍문과 추문이 화제에 오르고 우스갯소리와 험담이 오간다.
셀레스틴은 왠지 수상쩍은 마부 조제프의 거동에 호기심과 불안함을 함께 느끼며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2년간 12개의 일자리를 거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그동안 주인으로 모셨던 부르주아들의 민낯을 낱낱이 까발린다.
"나는 나이가 많지 않다. 그렇지만 많은 것들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완전히 벌거벗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의 속옷과 살갗, 그들의 영혼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거렸다. 향수를 뿌렸음에도 그들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나지 않았다. 존경받는 가정과 정직한 가족이라는 덕행의 외관 아래 얼마나 많은 추잡한 언행과 수치스러운 악행, 저열한 범죄를 감출 수 있는지! 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부자여도 소용없고, 비단과 벨벳으로 된 옷을 입고 있어도 소용없고, 금박 입힌 가구들을 갖고 있어도 소용없다."(140쪽)
"가난한 사람들이란, 삶의 수확물과 즐거움의 수확물을 키우는 인간 비료나 다름없으며, 부자들은 이 수확물을 추수하여 너무나 잔인하게 우리에게 악용한다. 더 이상 노예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주장한다. 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억지다. 하인들이 노예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노예 제도가 정신적 비열함, 필연적 타락, 증오를 낳는 반항심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노예 제도는 지금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인들은 악덕을 주인에게 배운다. 순수하고 순진한 상태에서 하인 일을 시작하는 그들은 사람을 타락시키는 습관과 접촉하면서 금세 타락하게 된다. 그들은 오직 악덕만을 보고, 악덕만을 호흡하고, 악덕만을 만진다."(367~368쪽)
작가는 소설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탐욕과 부패, 타락을 고발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하인들이 보이는 비굴한 노예근성과 주인을 따라 악덕을 저지르는 비열함도 풍자한다.
실직한 셀레스틴에게 임시보호소이자 직업소개소 역할을 한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노동 착취를 그림으로써 성직자들의 거짓과 위선을 꼬집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주인들의 우스꽝스러운 행태를 비웃으면서도 그들의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동경하고, 자신이 불행해질 줄 알면서도 때때로 자기도 모르게 파멸에 몸을 맡기는 셀레스틴의 이율배반적인 모습도 드러낸다.
각계각층의 기묘한 인물들을 여럿 등장시켜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와 시골의 뒤틀린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전지적 시점의 화자가 아닌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만 서술하는 셀레스틴를 화자로 내세워, 수수께끼로 남은 부분에 대해서는 독자의 상상을 이끌어낸다.
어느 하녀의 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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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에는 스물네 권의 오래된 일기장이 보관되어 있다. 약 200년 전 서울 남대문 근방에 살던 사대부 지식인 유만주(兪晩柱, 1755~1788)라는 이가 이 일기의 주인이다. 만 스무 살에 시작하여 서른네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쓴 일기이니 길지 않은 그의 생애가 오롯이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일기는 개인의 사적 기록이면서 동시에 18세기 서울 사대부의 일상과 조선 사회의 여러 면모들을 매우 소상하게 담아내고 있어, 조선 후기 문학사와 사상사, 풍속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이제 이 오래된 일기를 한글 번역본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재야 역사가와 자유로운 몽상가를 꿈꿨던 200년 전 젊은이의 일기를 들여다보자.
18세기 조선, ‘개인’의 발견
옛날 사람들에게 일기는 보편적인 글쓰기였을까? 현재 전하는 일기는 모두 조선 시대의 것이다. 그것도 조선 전기의 것은 3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 후기의 것이다. 익히 잘 알려진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가 바로 조선 전기의 것이다. 이 일기에는 유희춘의 개인사는 물론이고 선조 임금 당시 조정에서 일어난 사건까지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본격적인 일기 쓰기는 18세기 이후 뚜렷이 나타는데, 이는 시헌력(時憲曆)이라는 동아시아의 역법 체계 및 책력(冊曆)의 대중적 보급과 맞물린 사회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노상추(盧尙樞, 1746∼1829), 정원용(鄭元容, 1783~1873) 등 사대부 지식인 남성의 일기를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일기로 꼽을 수 있는데, 이 일기들은 개인의 일생과 결부된 장편의 저술로서 짧게는 13년, 길게는 91년에 이르는 하루하루를 세심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유만주가 스물한 살이 되던 1775년의 첫날에 쓰기 시작하여 서른네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죽기 한 달 전까지 13년간 쓰고 스스로 책으로 엮어 이름붙인 일기 『흠영』(欽英)은 매우 특별하다.
노상추와 정원용이 의젓한 가장이나 관인으로서 자신에 대해 별다른 회의를 표하지 않음에 비해, 유만주는 공사(公私) 영역을 떠돌며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자기 존재에 의문을 갖고 심지어 자기 부정의 언술마저 시도하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흠영』이 없으면 나란 존재도 없으며, 나는 역사책・지도・여행・주렴・다래를 좋아하며, 역사가가 되고 싶다. 하지만 스스로 돌아보고 헤아려 보아도 이미 어긋버긋하고 두루뭉술하고 물정을 몰라, 나긋나긋하고 세련되게 꾸미기를 요구하는 세상의 규율에 너무나 맞지 않다. 숲에서 나오지 않는 사나운 호랑이가 되어야 할 따름이다.’
유만주의 일기에는 유만주 ‘개인’이 보인다. 근현대의 시각에서 볼 때 개인의 일기에 ‘개인’이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지만, 유만주 당대의 일기들을 일별해 보면 이것이 매우 이례적인 경우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면모는 상당 부분 유만주가 경험한 정체성의 혼란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의문으로 이어지며, 『흠영』은 이 의문에 대한 여러 층위의 탐구 및 해명을 시도한다.
『흠영』에 담긴 내용은 상당히 광범위하다. 유만주가 직접 창작한 시문에서 독서한 책의 내용, 문장론, 중국과 우리나라의 서화에 대한 논의, 조보(朝報)의 내용, 집안 대소사 등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생활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흠영』은 학계에서 18세기 사회·경제·문화사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여태껏 『흠영』은 우리말로 번역된 적이 없었고, 이 책 『일기를 쓰다 1, 2』가 『흠영』을 우리말로 번역 소개하는 최초의 책이다. 이 책의 번역자 김하라 박사는 우리나라의 『흠영』 전문 연구자다. 박사학위 논문(『유만주의 ‘흠영’ 연구』)뿐 아니라 「『흠영』 일기에 재현된 경험적 시간의 의미」, 「한 주변부 사대부의 자의식과 자기규정」 등 유만주와 『흠영』에 대한 소논문을 꾸준히 발표하며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일기를 쓰다』는 『흠영』의 전체 글 중 현대의 우리에게 유의미한 글들을 선별하여 두 권으로 묶은 것인데, 1권은 일기를 통해 자기를 응시하며 스스로와 대화를 나누는 한편, 책과 지식에 대한 무한한 열의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유만주 개인의 면모와 관련된 내용을 주로 수록했다. 그야말로 ‘개인’ 유만주의 발견이며 탐구이다.
2권은 18세기 조선의 아름답고도 비참한 면면을 가감 없이 기록한 글들을 모았다. 글 속에 묘사된 조선, 조선 사람들의 모습은 개인의 기록인 동시에 미시사, 풍속사의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18세기 조선 강역도와 한양 도성도에 유만주의 발자취를 표시하고 이것을 본문에 함께 수록함으로써 독자가 좀 더 공간적으로도 생생하게 18세기 조선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유만주의 생애와 『흠영』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담은 해설과 연보는 2권에 수록했다.
“밤에, 사관(史官)이 되는 꿈을 꾸었다.” [1787년 3월 11일 일기]
일기를 쓰기 시작한 1775년, 유만주는 서울의 남대문 근방에 거주하는 21세의 사대부 남성으로 세 살 난 아들을 둔 기혼자였으며, 별다른 공적 직분이 없는 거자(擧子: 과거 시험 응시생)로서 수시로 과거에 응시하고 낙방하던 처지였다.
유만주는 과거 급제 여부로 그 사람의 인간성을 판단하는 사회의 통념이 부당하다고 지적했지만, 이는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과거 시험 실패자를 바보 멍청이에 파락호로 여기는 그 통념적 시선은 이미 그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다.
시간이 흘러도 일기를 쓰는 그의 외적 사항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처지의 그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한 것은 누군가의 남편이나 아버지라는 가정에서의 위치나 관료 예비군의 처지가 아니라, 자신이 독서인이자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유만주가 자기 길을 가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책이었다. 유만주는 몹시 아플 때나 일이 있어 외출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한 순간도 책을 놓은 적이 없을 정도로 책을 좋아했고, 그가 본 책은 경전과 역사책은 물론 제자백가의 기이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책들, 지리서, 패관잡설, 온 세상 구석구석의 숨어 있는 괴이한 일들에 대한 기록에 이르기까지 5천 권이 넘었다고 한다.
좋아하는 독서에 탐닉하며 풍요로운 내면세계를 일구어 가던 중 유만주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발견하여 거기에 집중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학(史學)이었다.
유만주는 소년시절부터 역사에 흥미와 열의를 보였다. 특히 그는 일관된 시각으로 중국의 고대사부터 근대사까지를 아우르는 대규모의 역사서를 편찬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졌고, 이런 문제의식 아래 집필한 책을 『흠영삼강』(欽英三綱)이라 이름 붙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환인씨(桓因氏)의 시대로부터 자신의 당대인 조선까지를 포괄하는 자국의 역사 편찬도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그는 자국의 역대 인물을 38개의 인간형으로 분류한 인물전 형식의 역사서를 기획하며 이것이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넘어서는 시도가 되리라는 야심찬 포부와 자신감을 드러냈다.
미완의 저술 『흠영삼강』은 그 실존 여부를 확인할 수 없고 자국의 역사인물전은 기획에서 그친 것이 확실해 보이는 상황에서, 재야 역사가 유만주의 의도나 계획은 어쩌면 잠꼬대 같은 혼잣말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13년간 그의 일기에 지속된 역사가로서의 정체성은 그 자체로 지금의 독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으며, 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그가 지녔던 역사 서술자로서의 방향성과 가능성이다. 일례로 그는 생애 말년에 이르러, 교훈과 가치평가에 견인된 중세적 사관을 탈피해 사료 중심의 객관적 역사서술로 나아가야 한다는 전망을 제시한 바 있다.
직분 없는 사대부 지식인이라는 처지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해명하기 위해 자신의 재능과 원하는 직업, 취향과 욕망의 문제를 평생 탐구해 온 유만주가 도달한 지점은 어디일까.
말년의 유만주가 응시하고 있는 자신의 내면은 그 자체로 모순상태에 가깝다. 그는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일을 하고, 범부(凡夫)의 마음으로 학자의 일을 하며, 부유(腐儒: 케케묵은 선비)의 식견으로 영웅의 말을 하고, 무뢰(無賴)의 식견으로 품격의 말을 한다. 참으로 얼룩덜룩하기가 오추마나 표범 같다. 온 세상에 오직 이 한 사람만 그런 것 같다”며 자기 내면의 소인과 군자, 범부와 학자, 부유와 영웅, 무뢰배와 품격 있는 사람이 빚어내는 모순을 희고 검은 털이 섞인 오추마나 얼룩덜룩한 표범의 박잡(駁雜)으로 형상화했다.
이와 같은 자기형상화는 우선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괴리를 직시한 데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자신의 현상태를 범부와 부유라 한 것은 아마도 학문적인 성취를 거둔 비범한 역사가라는 이상과 겉보기로는 그저 홀로 역사서 읽기를 즐기는 일개 평범한 사인(士人)이라는 현실 사이의 격차를 염두에 둔 자기규정일 것이다.
역사가로서의 정체성은 확고했지만 이 점과 관련해 자신의 존재의의를 공식적으로 확인할 기회를 평생 얻지 못한 그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대단히 고통스러워했고, 자신의 현상태를 과소평가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몸”이라는 그의 말은 그와 같은 현실인식 및 자기규정방식을 가장 간명하게 보여준다.
팔팔 살아 숨쉬는 18세기 조선, 조선 사람들
유만주의 『흠영』에서 빛나는 부분은 무엇보다도 중세의 틀 속에서 유만주 ‘개인’을 찾았다는 점을 첫 번째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중요한 부분은 바로 조선과 조선 사람들에 대한 촘촘한 기록이다.
조선의 다재다능한 사람들
아홉 살짜리 철이와 일곱 살짜리 석이는 재주가 뛰어나고 해서와 초서를 큰 글씨로 잘 썼다 한다. 특히 아홉 살 난 철이는 과거 시험에 쓸 만한 시도 잘 짓는다며 기이하다고 기록하고 있다.포도를 잘 그리는 월성 김씨, 거문고 음률을 잘 알아듣는 청풍 김씨 집의 어린아이, 미인도를 잘 그린 화가 최북의 젊은 아내, 수를 잘 놓았다는 정철조의 기록도 있다.
유만주가 기록한 인물 중에는 그와 동년배인 조정철(趙貞喆, 1751~1831)이라는 이가 있다. 정유역변(丁酉逆變: 1777년 정조 시해 미수사건)의 연루자로 제주도로 귀양 와서 양대(=갓양태)를 엮어 먹고 사는데, 재주가 매우 좋으며 당시 호남 곳곳에서 ‘정철 양대’라고 하면 아주 인기가 좋았다고 기록했다.
유만주가 지켜본 동시대인 중에는 이주애(李珠愛, 1761~?)라는 여성도 있다.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서예가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막내딸인 이 여성은,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아름다운 글씨를 곧잘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서출인 탓에 공식 기록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유만주의 기록에 따르면 이주애는 부친상을 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섬을 떠나 상경했으며 이후 낮은 신분의 별 볼일 없는 남편을 얻은 끝에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주애의 초라한 후일담에 적잖이 실망한 유만주는 그 천재 소녀의 재능이 좌절된 이유를 조선의 특수한 상황에서 찾고자 했다. 즉 중국의 유여시(柳如是, 1618~1664)는 기녀(妓女)였지만 전겸익(錢謙益, 1582~1664)이라는 대문호를 배우자로 만나 남편의 창작활동에 영감을 주면서 자기 재능을 실현할 수 있었던 반면, 조선의 서녀(庶女) 이주애는 중인․서얼(庶孼) 계층의 무뢰배이자 잡류(雜類)인 자에게 시집가는 것으로 모든 여지가 차단된 것이라고 그는 분석했다. 결국 신분과 성별이라는 두 가지 질곡이 서얼 여성 이주애의 날개를 꺾었다는 그의 통찰은 당시 조선 여성의 삶 깊숙한 곳에 닿은 것이라 여겨진다.
이외에도 여종 미정, 여종 정월, 안과 의원 이 노인, 잔인한 인간 이명, 치질 의원 장 씨 등 다양한 조선 사람들을 기록에 담았다.
걸어다니는 양반
일제 치하의 경성을 산책하던 스물여섯 살의 무직자 구보씨처럼 유만주도 사대문 안팎을 특별한 목적 없이 걸었다. 양반이라면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말이나 나귀를 타고 부리는 사람을 데리고 다녀야 체면을 구기지 않는다는 통념이 있던 당시에, 유만주는 양반이지만 직분도 경제력도 없었으므로 탈것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그는 걸어 다니는 양반이 되었다. 걸어 다니되 글을 쓰는 양반으로서 그가 접사(接寫)한 서울 풍경은 특유의 구체성과 생동감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초록빛 미나리가 이들이들한 안암동, 드문드문한 초가집 사이로 복사꽃이 환하게 만발한 성북동,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밝은 달이 비추는 서늘하고 깨끗한 청계천 등 그의 묘사는, 지금의 서울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옛날 서울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커다란 횃불을 나란히 벌여 놓고 붉은 비단 등불을 양옆에 달고 환궁하는 정조의 행차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남대문 천막 아래로 모여들었고 이날 『일성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정조가 구경하는 사람들이 날이 저물어 서로 밟히는 사고가 날 것을 염려해 남대문과 소의문을 잠그지 말고 야간 통행금지도 해제하라 한 지시도 있다. 유만주의 일기와 『일성록』의 기록을 아울러 살펴보면 이날의 서울 모습이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또한 서울의 길거리에서 만난 한 노파는 “양반은 부처님이라면서, 어째서 사람들의 사정을 잘 헤아리지 못한대요?”하고 묻는다. 유만주는 ‘양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사는 것이 참 부끄럽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만주는 ‘남들은 여행이 고달프다지만 나는 여행이 편하다’고 선언한 다소 특이한 취향의 소유자였다. 홍대용의 『연기』나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을 탐독하며 중국 여행의 원대한 꿈도 꾸지만, 현실에서는 5박 6일 여정에 돈 1천 푼이면 된다는 금강산 구경조차 가볼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던 그였기에, 다닌 곳이라곤 경상도 군위와 황해도 해주, 전라도 익산 등 아버지의 부임지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서울까지 길게는 보름씩 걸리는 그 길 위에서 그는 맘에 드는 풍경들을 수없이 발견하고 행복해했다.
군위까지 가는 길에 상주를 지나치면서는 그곳 특산물인 붉은 감이 주렁주렁 열린 사소한 풍경에 신기해했고, 익산에서 돌아오다 수원의 어느 주막에 묵을 적에는 먼 들판까지 나가 봄나물을 캐는 그 주모를 보고, 손님의 저녁 찬거리를 마련하는 조촐한 정성에 마음이 따뜻해져 시(詩)를 쓰기도 했다.
여행길은 ‘나’에게로 가는 길이기도 했으니, 자신이 정말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가 번쩍 떠오른 장소도 해주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 있는 어느 주막이었다. 아픈 아이와 산적한 집안일 걱정으로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 채 울적한 귀경길이 끝나갈 무렵 묵게 된 고양의 그 주막집에는 좋아하는 해당화가 무덕무덕 피어 있었다. 그는 이 꽃송이들을 흐뭇이 바라보다 뜬금없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세상의 숨은 이야기들을 찾아다니고, 그걸 글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의 꿈은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붙박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떠돌이 이야기꾼이 되는 것이었음이 또렷해지는 순간이었다.
일기를 쓰다 1 |
일기를 쓰다 2 |
18세기 ‘만년 과거 재수생’이 그린 서울 풍경
200년 만에 부활한 스물네 권의 오래된 일기장
200년 전 "서툴고 허술한" 청춘이 일기장에 남긴 영·정조 시대 실상
'시대의 변방인'이 쓴 13년간의 기록
18세기 한 서생 눈에 비친 조선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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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젖꼭지는 둘이다. 젖을 먹여 새끼를 양육하는 포유류의 젖꼭지 숫자는 한 쌍에서 열 쌍까지 제각각인데, 인간과 말·코끼리 등은 한 쌍의 젖꼭지를 갖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은 한 번에 낳는 새끼의 평균수와 일치한다. 즉 젖꼭지 한 쌍당 하나의 개체를 낳는다. 새끼 한 마리에 왜 한 쌍이 할당되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이 책에 따르면 인간도 발생 초기에는 여러 쌍의 젖꼭지를 지니고 많은 아기를 낳았지만,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한 명을 낳도록 적응해왔다는 것이다.
물론 예외적 사례가 있다. 쌍둥이 혹은 세쌍둥이 출산이 그것이다. 1952년 토머스 매커운과 레지널드 레코드는 태아의 수가 늘어날수록 출산 기간이 줄어든다는 기념비적인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에 따르면 한 명의 아기를 낳을 경우 임신 기간은 마지막 생리가 시작된 날로부터 40주다. 그러나 쌍둥이는 37주, 세쌍둥이는 35주로 줄어든다. 더 나아가 ‘젖꼭지 한 쌍당 한 아기’를 무색하게 하는 아주 드문 경우도 있기는 하다. 미국에서는 1998년 텍사스에서 여덟쌍둥이 출산에 관한 기록이 처음 등장했다. 한 아기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나머지 일곱 명은 무사히 열번째 생일을 맞았다. 바로 직후인 2009년에는 미국에서 두번째 여덟쌍둥이가 태어났다.
<우리는 어떻게 태어나는가>에는 이런 식의 사례들이 즐비하다. 인간의 성과 생식에 관한 책이다. 왜 하나의 난자를 수정시키는 데 2억개가 넘는 정자가 필요한 걸까? 왜 여성은 주기적으로 생리를 하는 걸까? 일부일처, 일부다처, 다부다처 중 가장 자연스러운 짝짓기 방식은 무엇일까? 인간의 아기는 왜 다른 포유류보다 미숙한 상태로 태어나 부모의 돌봄을 더 많이 필요로 하는가?
책은 소소해 보이지만 근본적인 질문들로 가득하다. 한국어판 표지에는 ‘사랑하기 전에 알아야 할 신비로운 성과학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어쩌면 약간의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겠다. 이 책의 핵심어는 ‘성’보다는 아무래도 ‘생식’에 가까워 보인다.
저자인 로버트 마틴은 40여년간 포유류의 생식행동을 연구해온 학자다. 영국 런던대 교수와 스위스 취리히 인류학연구소장을 거쳐 지금은 미국 시카고 필드박물관 명예 큐레이터로 있다. 그는 책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생식은 그 자체로 장엄한 역사다. 우리는 어떻게 생식하고 아이를 키울 수 있게 진화됐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지난 수백만년을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책은 엄연히 학술적이지만 쉽고 평이한 문체를 구사해 종종 실용서의 분위기마저 풍긴다. 거론되는 사실과 현상들 중에는 일반인들이 미처 모르고 있던 것들도 허다하다. 예컨대 임신 중에는 임신부의 뇌가 줄어든다. 저자는 핵의학자 안젤라 오트리지의 연구를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임신과 수유를 통해 전달되는 모계의 지원은 자식의 뇌발달을 위해 필수적이다. 우리는 뇌를 어머니로부터 얻는다. 안젤라 오트리지는 핵자기 공명 기법을 이용해 아홉명의 임산부 뇌 크기를 연구했다. 그들은 임신 기간 동안 산모의 뇌가 4% 줄어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출산하고 6개월이 지나야 원래의 크기를 되찾는다. 인간의 어머니들은 자신의 뇌를 제물 삼아 성장하는 태아를 길러낸다.”
저자가 견지하는 ‘생식’의 관점에 따르자면 자위행위는 일종의 권장사항이다. 서구사회에서 ‘하나의 정자=하나의 생명’이라는 믿음은 오래전에 등장한 관념이다. 3세기 전 현미경이 처음 등장했을 때 일부 연구자들은 정자의 동그란 머리 속에 축소된 인간이 들어 있다고 믿을 정도였다. 그것은 결국 자위를 ‘나쁜 짓’으로 보는 시각으로 이어졌다. ‘서툰 정원사가 씨를 그냥 버리는 것’을 뛰어넘어 생명을 죽이는 짓으로까지 여겨졌다. 그러나 저자는 모든 영장류가 보편적으로 자위를 한다고 설명한다. 같은 무리에 속한 누군가가 그 모습을 보더라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위도 “본질적으로 자연스러운 행위”일 뿐 아니라 “비정상적인 정자의 출현을 막는 방법”이며, 따라서 “정자의 질적 우수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찍짓기에서 임신과 출산을 거쳐 육아에 이르기까지, 생식생물학에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백과사전처럼 펼쳐놓고 있는 책이다. 어떤 독자에게는 진지한 학술서로, 또 다른 독자에게는 주변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면서 인용할 만한 ‘소소한 상식’의 창고처럼 읽힐 수도 있겠다. 저자는 이 책이 “우리 인류가 취할 자연스럽고 풍부한 성적 경험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
인간의 출산은 왜 힘들까… 생식의 진화에 답하다
탄생의 신비, 우리가 잘 몰랐던 性스러운 이야기
인간·말·코끼리의 젖꼭지가 한 쌍인 이유
사랑하는 몸·생명을 품은 몸… 인간 생식의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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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일기를 훔쳐보기. 타인의 은밀한 기록이 눈앞에 펼쳐질 때의 기분은 상상만 해도 짜릿합니다. 그래서 기회만 온다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임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유혹에 넘어가기 마련이죠. 그런데 여기 자신의 일기를 통째로 공개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 일기에는 열두 살 때부터 여든일곱 살까지 그 남자의 내밀한 기록으로 빼곡합니다.
그 남자의 첫 몽정(13세), 첫 섹스(23세), 첫사랑(26세), 첫아기(28세). 그의 첫 외과 수술, 즉 코 막힘과 코골이의 원인이 되는 코 안의 용종 제거 수술(27세), 오른팔 안쪽에 생긴 첫 검버섯(44세), 노안에 난생 처음 쓰게 된 안경(45세), 처음으로 본 손자(53세), 신용카드 비밀번호를 처음으로 망각한 일(62세).
이뿐만이 아닙니다. 49세 때 갑자기 찾아온 이명과 친구 되기, 60세가 넘어서면서 평생을 갈 것 같았던 아내와의 욕망이 사그라진 현상. 알츠하이머에 대한 공포, 손자의 동성애를 접한 70대 할아버지의 당혹스러움, 오랜 친구들과의 이별 그리고 갑작스런 손자의 때 이른 죽음. 그리고 시간 앞에 허물어져가는 자신의 육체. 마지막으로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기.
그렇습니다. 이 남자의 일기는 보통의 일기와 다릅니다. 우리가 그간 엿보았던 대부분의 일기는 내면의 정신 상태를 기록한 것이죠. 그런데 이 일기는 표면적으로는 철저히 '몸'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는 그 몸의 일기를 읽으며 비로소 알게 되죠. 그 남자의 몸에는 사랑, 갈등, 관계, 과학, 역사 등 세상의 온갖 것들이 가로지르고 있다는 사실을요.
우리는 그 남자의 몸의 일기를 엿보면서 한 남자의 자아를 찾아가는 긴 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얽히고설킨 온갖 등장인물의 이야기는 덤이고요. 이 특별한 일기를 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나크가 <몸의 일기>(조현실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로 펴냈습니다. 페나크가 누구냐고요?
페나크는 '말로센 시리즈', 어린이 책 '까모 시리즈', <소설처럼>, <학교의 슬픔> 같은 소설, 에세이 등을 통해서 프랑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적지 않은 팬을 가지고 있는 작가입니다. 이 페나크가 일기 형식을 빌려서 '소설인 든 소설 아닌 소설처럼' 써내려간 작품이 바로 <몸의 일기>입니다.
몸의 일기 |
277쪽부터 섬뜩했다!
남자의 몸이 궁금한 여자를 위한 일기장
이런 남자,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
젊은 날로 돌아가라면, 난 죽어버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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