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벅찬 책이다.
첫 성공작이자 저자가 지속해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할 수 있게 한 《노동의 배신》의 기반이 된 첫 번째 칼럼 “열심히 일하셨나요? 더 가난해지셨습니다.”가 주는 무게는 이 책의 중량감을 더해준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미국’의 빈곤과 노동 문제에 대해 꾸준히 ‘지지 않기 위해 쓰고 있’는 저널리스트이자 사회 운동가이다. 저자가 30여 년 간 쓴 칼럼을 모았다. 저자의 그동안 ‘불평등’에 관한 현장에 겪은 ‘체험적 글’을 볼 수 있다.
2001년 《노동의 배신》이 출간되어 미국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영문 제목 《Nickel and Dimed》는 “야금야금 빼앗기다”, “근근이 살아가다”라는 뜻이다. 적절한 표현이다.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로 최저 임금만으로는 절대 먹고살 수 없음을 몸소 증명했다. 악순환의 구조를 보여 주였다. 이 책으로 미국에서 ‘최저 임금 인상 운동’의 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2007년 7월 미국 연방정부는 최저 임금을 인상하기 위한 근로기준법(Fair Labor Standards Act: FLSA) 개정에 이른다. 책이 나온 지 20년이 지난 2021년 4월 바이든 대통령은 최저임금을 38% 인상한 15달러를 2022년 3월부터 적용하도록 서명했다. 바이든의 정책이 이 책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지 않기 위해 쓰는’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작은 날갯짓이 나비효과로 나타났음은 분명하다.
이 책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거침없는’ 글이다. 현장 체험을 바탕으로 담백하게 풀어낸 글이 경탄스럽다.
《노동의 배신》도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1986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두 개의 미국이 온다”에서 양극화를 말하면서 저자는 “최저 임금을 인상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떨까”라고 제안한다. 양극화로 인한 미국 중산층의 몰락을 우려한다. 중산층의 몰락으로 인한 미국의 몰락을 염려하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중산층’이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미국 사회가 점점 더 양극화되고 있다는 징후가 쏟아지고 있다. 지난 10여 년에 걸쳐 부자는 더 부자가 되었고, 빈곤층의 숫자는 급증했으며 그 중간에 자리한 계층도 예전보다 상황이 좋지 않다.
궁지에 몰린 미국의 중산층이 어디로 향할지 확실히 예측할 길이 없다. 중산층에서 탈락한 일부는 좌경화되는 것 같긴 하다. ··· 재시 잭슨(침례교 목사이자 민주당 정치인)의 진보적 포퓰리즘에 반응하는 사람도 있고, 극단적인 비주류 우파에 경도되는 사람도 생겼다. ··· 주머니가 궁핍해진 중산층 베이비붐(1946년 1964년의 20년 동안 태어난) 세대는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추측이 난무하지만, 사회 문제에 있어서는 진보적이고, 경제 성향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다.
미국 사회의 양극화를 피하고 싶다면 공공 정책을 통해 부와 기회를 아래쪽으로 재분배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린든 존슨(미국 36대 대통령)이 ‘위대한 사회’ 정책에서 지향했던 ‘중산층에서 가난한 사람의 향한 재분배’가 아니라 ‘극 상류층 부자에서 사회 모든 계층을 향한 재분배’를 목표로 한 정책이 필요하다. ··· 최저 임금을 인상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사실 현재 부유한 사람의 입장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은 계층 의식을 갖춘 좌경 정치 세력이 부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력이 부상하지 않는 것이다. 강력한 정치적 대안이 없으면 ··· 기울어가는 중산층의 좌절감이나 최하층의 절박함을 평화적으로 배출할 정상적인 정치 통로가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대신 범죄가 늘고, 정치적, 종교적 분파주의가 더욱 극단화되어서 결국 한 나라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두 나라에서 살게 될 거라는 예측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가장 기본적인 생리 활동마저 할 수 없는 미국인이지만 ‘불법 이민자’처럼 생활하는 것에 대해 “정치적으로 중요한 소변 문제”에서 말하고 있다. 미국의 일반 시민이나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는 절대 이해하기 어렵다.
미국의 도시에는 공중화장실이 드물다. “마치 화장실을 써야 할 필요 자체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방광의 압박에 굴복한다는 것은 체포될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 가장 평범하고도 생물학적으로 필요한 행위마저 미국 거리에서는 불법이 된다는 것. 소변을 보는 것뿐 아니라 앉고, 눕고, 자는 것 모두가 불법이다.
··· 다른 어디에도 살 곳이 없는 상태인 사람이 조리를 하거나 불을 피우거나 자는 것도 금지 항목이다. 다시 말해 집이 없는 것을 포함한 여러 이유로 야외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다.
··· 루디 줄리아니(107대 뉴욕시장)가 이끄는 뉴욕을 시작으로 수많은 도시가 차례로 ‘깨진 유리창’ 혹은 ‘삶의 질’ 조례를 통과시켜서 노숙인이 거리를 배회하는 것, 심지어 공공장소에서 ‘가난하게 보이는 것’ 자체를 위험한 일로 만들어 버렸다. … 절박하게 가난한 사람은 합법적인 미국 본토박이 시민이지만 생존하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활동마저도 금지당한 채 ‘불법 이민자’처럼 살아가고 있다.
… 노숙인의 문제는 금권주의, 탐욕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다. 노숙인 문제는 우리 모두, 미국인의 99%, 아니 적어도 70%가 결국 직면할 문제이다. 지금 벌이고 잇는 혁명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학자금 융자 빚에 허덕이는 대학 졸업생, 해고된 교사, 빈곤한 노인, 우리 모두가 노숙인의 운명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노숙인(?)뿐 아니라 노동자에게도 생리적인 문제는 해결하기 위한 유식 시간은 법으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산업 혁명 시대가 아니라 20세기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 나라 미국은 거리의 노숙자만을 위한 법이 아니라 노동자에게 1998년 4월까지 용변을 보기 위해 휴식 시간을 갖는 것이 연방법에 의해 보장되지 않았다. 일터에서 휴식을 취하고 용변을 볼 수 있는 권리는 전문직이나 경영직 종사자가 지지하는 사회적, 정치적 명분의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그들은 수백만 명의 공장 노동자가 꿈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의 자유를 일터에서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용변을 볼 법적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당황했지만, 노동자는 오히려 이 기본적인 신체 기능을 수행할 필요가 있을 때 고용주가 그것을 당연히 허용할 것이라고 추정하는 외부인의 순진함에 놀랐다. 여섯 시간 내내 전혀 휴식을 취할 수 없었던 한 공장 노동자는 유니폼 안에 패드를 넣고 소변을 봤다. 그리고 보조 교사 없이 아이를 돌봐야 했던 유치원 교사는 20명의 아이를 모두 화장실까지 데려가 화장실 문 앞에 줄지어 세워 놓고 소변을 봐야 했다.
2008년 경제 위기에서도 백인과 흑인은 동일하게 오지 않는다. “경기 침체도 인종을 차별한다.” 사실 살기 어려운 흑인이 더 불황을 몸으로 받았지만, 누군가에게 그 원인을 넘겨야 했다. 백인에게는 만만한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이 있다.
대공항 이후 최악의 불황과 첫 번째 흑인 대통령을 합치면 과연 무엇이 나올까? 백인의 인종적 적개심이 하늘을 찌르는 현상이 탄생한다. 폭스뉴스의 한 기사는 건강보험이 개혁안이 노예제에 대한 배상금을 비밀리에 지급하려는 음모라는 이론을 내놓았다. 개혁에 필요한 돈은 백인이 내고 모종의 메커니즘을 통해 수혜는 흑인 몽땅 보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폭스 뉴스는 루퍼트 머독의 보수적인 뉴스 채널이다. 과도한 친 공화당 보도와 오바마 행정부와의 갈등을 빚었다. '폭스 효과'는 폭스 뉴스가 정치적 지지(공화당)를 등에 업고 대중의 의견을 조작한다 여기는 관점이다. 한국에서는 조중동의 행태와 같다고 볼 수 있다. )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사람은 추락의 원인이 지신의 등을 밟고 누군가가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상상하기 쉽다.
… 그럼에도 경기 침체로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주택 압류와 실업을 경험하고 있는 흑인이다. 흑인 실업률은 백인보다 항상 2배가량 높았다. 경기 침체 또한 인종별로 동등한 효과를 발휘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시작점부터 명백하다.
오스틴 같은 목사가 “주님이 좋지 않은 내 신용평점을 은행이 무시하도록 만드시고 내 생애 첫 주택을 사도록 은총을 내리셨다.”라고 믿게 만들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2000년대에 범한 집단적인 실수가 있다면 그것은 백인 문화를 너무 전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흑인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있다는 우파의 불안과는 달리 경기 침체로 인해 흑인은 이전보다 더 경제적으로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있다. 양당주의를 표방하는 흑인 대통령은 흑인 중상층의 몰락 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용기가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종을 불문하고 미국 시민을 대상으로 한 모종의 경제적 구제책이 빠른 시일 내에 나오지 않는다면 고통은 더 늘어날 일만 남았고, 불행한 역설이지만 그와 함께 백인의 근거 없는 인종적 불만도 깊어질 것이다.
저자의 ‘흑인 대통령’이란 표현은 흑인 중산층에 대한 대책을 말하기 위한 것일지 모르지만, 유색 대통령이라고 유색인을 위한 정책을 하는 것은 아니다. ‘흑인 대통령‘이란 표현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근원적인 문제, ‘근거 없는 인종적 불만’을 해결하기보다는 경제적 구제책으로 넘기려 하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미국인 지식인이 보기에도 특이한,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으로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 계층, 아니 적어도 백인 노동자 계층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수수께끼로 부상했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자였던 그들이 현란할 정도로 과시적인 억만장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저러지?” 진보 지식인들은 계속 그렇게 묻곤 한다. 도대체 왜 트럼프가 내건 약속을 믿는 것일까? 멍청한 것일까, 아니면 한탄이 나올 정도로 인종 차별적인 것일까? 왜 노동자 계층이 자신의 이익과 상반되는 세력에 동조하는 것일까? 이 땅에서도 부자를 위한 법이나 정책을 가진 정당이나 보수 꼴통의 헛소리(?)를 가난한 사람에게도 좋은 것이라 착각하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러지?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이 이민자에 대해 관대하지 못하다. 특히 앵글로 색슨이 아닌 유색인에게 너그럽지 못한 백인 이민자 후손에게 쓴 소리도 서슴지 않고 있다. “모든 게 불법 이민자들의 탓이라면”, “높은 담이 정말로 당신을 보호해 줄까”
밀입국자와 비자 만료 후에도 불법 체류하는 사람을 추방하면 곧바로 수백만 개의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다. 미국이 겪는 경제 문제의 51%는 불법 이민자의 탓으로 돌리곤 한다.
··· 하지만 미국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의 4분의 3이 불법 이민자이다. 저소득이며, 건강보험은 꿈도 꿀 수 없으며, 절반이 한번 이상 고용주에게 보수 떼인 적이 있다. 이것이 양심 없는 고용주가 불법 이민자를 좋아하는 이유다. 반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도 똑같이 상황이 벌어지고 있고, 이때마다 피해는 불법 체류자로 그들은 추방당하고 있다.
불법 이민자를 고용하는 사람은 자영업자나 소기업도 아니라, 대기업은 더욱 더 아니다. 고용주의 49%는 미국의 일반 가정이다. 불법 이민자를 고용해 페인트칠을 하거나 잔디를 깎고 있다. “위선이 너무 심해서 구역질이 날 것 같다.”라고 말한다.
“미국 언론은 빈곤층 문제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다. ‘아메리칸드림’으로 상징되는, 미국은 약속의 땅이고 기회의 땅이란 편견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드림이 없는 곳(한국이라는 반도의 땅)에도 빈곤이 사회적 관심을 받는 곳은 드물다. 열심히 일한 자에게만 자격이 있다는 믿음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게으른 자에게 빈곤이라는 대가는 당연하다. “저자는 가지지 못한 자의 고통은 가진 자의 특권에서 비롯하며, 기울어진 현실을 반전시킬 수 있는 것은 곧 현실에 직접 개입하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글로 ‘불평등’을 바꾸려 한 그의 글이 여기에 담겨있다.
Don’t forget to have a good time while you’re doing things.
Political work should not be work.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양극화와 편향에 빠져 버린 한국 사회를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한국적 맥락에서 ‘중산층’은 사회 담론과 레거시 미디어의 정제된 뉴스가 전파되고 향유되는 마지막 마지노선이 되고 말았다. 진보주의자의 입은 더 이상 세상의 가장 밑바닥을 향하지 않는다. 젊은 수도권 고학력 여성의 전유물이 된 페미니즘은 지방의 억압당하는 여성에게 가 닿지 않는다. 노동조합은 정규직 울타리를 벗어난 파견 비정규 노동자를 끌어안지 않는다. _이혜미
책의 미덕은 사회 변화에 대한 통찰이다. “오일을 반지레하게 먹인 원목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서, 마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디지털 활자로 담론을 쥐락펴락하는 책상머리 엘리트를 향한 어퍼컷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인식의 사각지대를 밝히기 위해 삶의 가장자리에서 누군가는 ‘치열하게 쓰고 있다’.” 그 누군가가 바로 당신이며 우리일 수 있다. “Had I Known.” 이미 알고 있듯이 이 땅에 “지지 않고 위해 쓴다”라는 저자의 근본적인 질문을 곱씹어보아야 한다. 이 책, 읽어보아야 한다.
덧_
나는 저자의 시각과 글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번역에 문제인지 아니면 뉘앙스의 차이인지 ‘좌경화’, ‘좌경 정치 세력’ 등 좌파를 바라보는 시각은 동의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