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읽고 오래 생각할) 긴 부고가 필요한 까닭”
어떤 이의 죽음을 맞아 그의 삶을 알리고 기억하려 쓰는 글을 부고라 한다. 죽음은 모두 같지만 그곳에 이르는 삶은 각기 다르기에, 남다른 삶을 돌아보려는 시도다. 보통 짧은 부고에서 전하는 망자의 직위와 성과는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에서 통용되고 공인받은 남다름이다. 이와 달리 긴 부고가 필요한 까닭은, 앞선 방식으로는 정리할 수 없는, 그가 사는 동안 상식으로 여겨지지 않았거나 그가 생명을 다한 지금까지도 상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남다름, 즉 직위와 성과가 아니라 태도와 지향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한국일보 최윤필 기자는 지난 2년 동안 매주 이런 남다름을 찾아 부고를 썼다. 대부분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다. 그만큼 그들의 삶이 만들고 표현한 가치가 한국사회와 더 먼 곳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여성 할례 금지, 동성혼 법제화, 조력자살, 내부고발 등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누군가는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를 가치에 평생을 던진 이들의 삶을 읽다 보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지 돌아보게 되고, 앞으로 이 세계를 어디로 밀고 나가야 할지 고민하고 짐작하고 움직이게 된다. 그렇다, ‘가만한 당신’이 뜨겁게 우리를 흔드는 순간이다.
책소개
①
2014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동명의 기획물 중 서른다섯 편을 선별, 개작하여 묶은 책이다. 상식이어야 할, 그러나 여전히 상식으로 자리 잡지 못한 가치를 위해 온몸으로 투쟁했고 스러져간 이들의 삶을 오롯이 담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도 우리를 뜨겁게 흔드는, 가만한 서른다섯 명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기록이기도 하다.
한국일보 선임기자인 저자 최윤필은 현시점에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논의되고 있는 사안, 인권과 자유, 차별 철폐와 페미니즘, 조력 자살과 동성혼 법제화 등을 위해 우리보다 앞서 헌신했던 이들을 환기하고자 국내 최초로 부고 기사 연재를 시작했다. 덜 알려졌기에 더 알려져야만 하는 사람. 이들이 겪은 억압과 불합리한 삶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생을 거의 완전히 연소한’ 서른다섯 명을 추모할 수 있을 것이다.
②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다 조용히 떠난, 그러나 거대한 동공처럼 큰 빈자리를 남긴 서른다섯 명의 삶을 담담하게 써 내린 부고. 한국일보 선임기자인 저자는 지금 우리가 상식으로 여기는 가치를 일구려고 노력했던 사람, 그러나 떠난 뒤 기억에서 사라져 ‘잔물결도 일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을 편파적으로 주목했다. 그들의 덜 알려진 삶을 애정을 담아, 영웅주의로 쉽게 재단하지 않고, 그 삶의 결대로 곱씹는다. 억압과 불평등과 편견에 맞섰던 삶 또는 자유와 해방을 추구했던 삶의 복잡다단한 맥락과 질감이 선명하다.
<함께 가만한 당신>에 수록한 서른다섯 명은 전작의 인물과 비슷한 결을 띠지만 이번에는 분야가 조금 더 두드러지거나, 조금 더 통쾌한 삶이거나, 조금 더 대중에 익숙한 인물이 더해졌다. 다른 지면에서 가십처럼 다루어지기도 했지만 분명 세상을 더 살 만하고 즐겁게 만든 인물이 책 곳곳에 포진해 있다. 세상을 바꿔나가는 데는 투지와 저항 말고도 여러 수단과 방식이 있음을 알려준 사람. 저자는 이들의 삶을 급히 지나치지 않고, 인생의 순간순간에 있었을 체념과 오기, 안도와 웃음까지 느리고 깊은 눈길로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
③
2016년 나란히 출간되었던 『가만한 당신』 『함께 가만한 당신』을 잇는 책 『가만한 당신 세 번째』가 6년 만에 돌아왔다. 한국일보 최윤필 기자가 연재 중인 동명 칼럼 「가만한 당신」은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했지만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지키고 끝끝내 살아낸 사람의 부고이다.
지난 6년 동안 우리 사회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페미니즘 리부트’가 연 문을 통해서 장애인, 퀴어 같은 소수자에 대한 환대의 시선이 조금씩 생겨났다. 그러나 그만큼 저항하는 움직임도 커졌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정상성을 규정하려는 이들이 있다. 『가만한 당신 세 번째』 속 인물은 경계라는 벽을 높이려는 움직임에 유유히 저항한다.
앞선 책과 달리 『가만한 당신 세 번째』에는 한국인의 부고가 실렸다. 게이의 생각을 풀어낸 잡지 〈뒤로〉의 창간인 이도진을 필두로 ‘여성의 전화’를 이끌었던 이문자, 한국 문인의 사진을 찍고 기록한 김일주가 소개된다. 동물의 언어 능력을 연구하기 위한 대상으로 관심을 끌었던 고릴라 코코의 부고도 담겨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①
동시대를 살아 고맙고 오래 아로새겨질” 서른다섯 명의 부고
그들의 뜨거운 생애와 근대적 가치를 이룬 순간의 포착
『가만한 당신』은 2014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동명의 기획물 중 서른다섯 편을 선별, 개작하여 묶은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이자 한국일보 선임기자인 최윤필은 현시점에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논의되고 있는 사안, 인권과 자유, 차별 철폐와 페미니즘, 조력 자살과 동성혼 법제화 등을 위해 우리보다 앞서 헌신했던 이들을 환기하고자 국내 최초로 부고 기사 연재를 시작했다. 저자는 “떠난 자리에 잔물결도 일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을 편파적으로 주목”했고 “그들 중 특히 기억하고 싶은 이들의 이야기를 어렵게 골라”서 이 책을 엮었다. 덜 알려졌기에 더 알려져야만 하는 사람들. 이들이 겪은 억압과 불합리한 삶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생을 거의 완전히 연소한” 서른다섯 명을 추모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저자의 아름답고도 담담한 문체는 ‘부고’라는 형식을 넘어 따스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세상을 뜬 이들을 추억하려고 한다. 동시대를 살아 든든했고 또 내내 고마울 이들을 기억하자는 취지다. 문패는 김완수 시인의 시 ‘들꽃’에서 얻어왔다.
“꽃을 꺾어내면 / 들 한쪽이 가만히 빈다 / 아무도 모르게 저를 키워와선 이렇게 꺾인다 / 어쨌든 이렇게 꺾어지고 나면 / 애초에 없던 약속마저 애처롭다.”
그렇게 빈자리에 또 아름다운 것들이 ‘가만히’ 자리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 ‘가만한 당신’ 연재를 시작하며
인권, 페미니즘, 표현의 자유, 존엄사 옹호……
덜 알려졌기에 더 알려져야 할, 가만한 당신
『가만한 당신』은 전쟁의 무참함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한 ‘콩고의 마마’ 레베카 마시카 카추바로 시작, 모성 신화의 허구성을 지적한 바버라 아몬드, 여성 할례 금지 운동에 앞장선 에푸아 도케누, 뉴욕 중심부에서 최초의 여성 전용 섹스토이숍을 연 델 윌리엄스 같은 인물을 통해 페미니즘의 발전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페미니즘이란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사랑에 빠지듯 여성운동에 매료됐고, 페미니즘은 내 생애의 퍼즐을 풀어주었다. 나는 민권운동, 반전운동 등등을 해왔지만 내게 그것은 의무감과 분노의 소산이었지 내 자신의 싸움은 아니었다.
-172쪽
또한 1960년대 흑인 인권 투쟁 현장을 누빈 존 마이클 도어, 개인 프라이버시의 중요성을 언급한 카스파 보든, 군대 민주화 운동의 기점인 앤드루 딘 스태프 등을 통해서는 인권과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재현하기도 한다.
당시 우리는 혁명이나 전쟁이 아니라 법적 절차를 통해 카스트제도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항상 느꼈던바, 당시 현장에는 언제나 강하고 진취적이고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미국인이 있었다. 그들이 법에 근거한 민주적이고 헌법적인 절차를 완성해 냈다.
-139쪽
뿐만 아니라 장애 편견과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스텔라 영, 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동성혼 법제화 문제에 직접 맞선 니키 콰스니, 문학작품의 외설성 논란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언급한 앨버트 모리스 벤디크처럼 경직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남몰래 애쓴 이의 삶도 담겨 있다.
저는 단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침대에서 일어나 제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칭찬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저는 장애인이 지닌 참된 성취로 평가받는 세상, 휠체어를 탄 선생님이 새로 부임해 왔다고 해서 멜버른의 고등학생이 조금도 놀라지 않는 그런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33쪽
그리고 마리화나 합법화를 위해 잡지를 발행한 마이클 존 케네디, 세계적인 군비경쟁 실태를 폭로한 루스 레거 시버드, 삶에 대한 결정권은 본인에게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엘리자베스 리비 윌슨을 통해서는 근래에 비로소 논의가 시작된, 앞으로 신중히 검토하고 결정해야 할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 볼 기회를 준다.
나는 윤리적 관점에서 내 입장에 반대하는 이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왜 그들은 내 생각을 짓밟으려고만 하느냐는 거다. 사람은 삶을 어떻게 끝맺을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340쪽
“부고는 끊임없이 새로 쓰여야 한다”
결코 잊지 않겠다는 뜨거운 마음을 담은 기록
2016년 6월, 저자 최윤필은 그의 오랜 독자이자 번역가인 김명남을 만나 신문 연재와 책 출간에 관하여 「가만한 대화」(전자책 수록)를 나누었다. 저자는 먼 이국에서 살다 간, 이름도 생소한 이의 부고를 한국 독자가 읽어야 할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최윤필 예전의 어떤 글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그게 부고는 끊임없이 새로 쓰여야 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잘 알지 못하더라도 얘기를 해야 할 때가 있고, 잘못 얘기할 때가 있으니까 그것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거였지요. 그래서 여기 있는 이 분들도 고유명사가 아니라 그냥 이런 일을 했던 사람들로서, 또 다른 어떤 의미를 만 들어가는 사람이 언급될 때마다 다시 환기되어야 할 분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죠. 그럼 매번 새로운 맥락에서 다른 의미들이 나올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는 부고의 기능이 ‘환기’이며, 우리는 반복을 통해 그들의 삶을 매번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고 보았다. 말 그대로 잊지 않는 것, 중요한 가치를 위해 헌신했던 이들을 거듭 추모하는 행위만으로도 사회적 퇴행을 막고 미약하나마 진보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이다.
김명남 그 말씀을 들으니까 전체를 관통하는 콘셉트가 머리에 들어오는 느낌이에요. 정말 그런 근대적 가치에 하나씩 돌을 놓았던 분이잖아요. 어떻게 그 시대에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운동을 하셨을지 놀라운 부분이 많아요. 지금의 저한테는 너무 당연하지만 그때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을 가치들, 하나를 얻어내려면 정말이지 폭력적인 수준에 가까운 투쟁을 해야만 했던 시기.
이처럼 『가만한 당신』은 상식이어야 할, 그러나 여전히 상식으로 자리 잡지 못한 가치를 위해 온몸으로 투쟁했고 스러져간 이들의 삶을 오롯이 담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도 우리를 뜨겁게 흔드는, 가만한 서른다섯 명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기록이기도 하다.
②
『가만한 당신』에 이은 『함께 가만한 당신』
기록과 증언을 넘어 ‘맵시’까지 담으려는 부고
『함께 가만한 당신』은 전작인 『가만한 당신』에 이은 책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다 조용히 떠난, 그러나 거대한 동공처럼 큰 빈자리를 남긴 서른다섯 명의 삶을 담담하게 써내린 부고. 한국일보 선임기자인 저자는 지금 우리가 상식으로 여기는 가치를 일구려고 노력했던 사람들, 그러나 떠난 뒤 기억에서 사라져 “잔물결도 일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을 편파적으로 주목했다. 그들의 덜 알려진 삶을 애정을 담아, 영웅주의로 쉽게 재단하지 않고, 그 삶의 결대로 곱씹는다. 억압과 불평등과 편견에 맞섰던 삶 또는 자유와 해방을 추구했던 삶의 복잡다단한 맥락과 질감이 선명하다. 저자는 열띤 삶 뒤에 큰 영예와 주목을 누리지 않고 사라져 간 인물들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그들의 소소한 면면, 그 ‘맵시’까지 담으려 노력했다.
서른다섯 명으로 인해 누군가는 힘을 얻고 누군가는 위로받고 누군가는 낭떠러지까지 갔던 발걸음을 되돌릴 것이다. 한 사람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것은 다른 한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이다. 『함께 가만한 당신』의 저자는 바로 이 일에 용맹정진하고 있다. (…) 학자나 작가라면 저서나 작품을 통해 사상과 개성을 가늠할 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그의 걸음걸이나 잠버릇 혹은 즐기는 달빛의 세기와 술잔의 크기는 파악하기 어렵다. 『함께 가만한 당신』을 읽고 있노라면, 나는 저자의 눈길이 자꾸 그 어려운 사소함으로 향하는 것 같아 흥미진진하다. 남겨진 기록과 증언을 넘어 한 인간의 맵시까지 담으려는 걸까. 죽음이 만든 불가능에 도전하는 글쓰기는 하루를 가꾸며 영원을 바라본 자의 눈망울처럼 맑고 아득하다.
-김탁환(소설가)
『함께 가만한 당신』에 수록한 서른다섯 명은 전작의 인물과 비슷한 결을 띠지만 이번에는 분야가 조금 더 두드러지거나, 조금 더 통쾌한 삶이거나, 조금 더 대중에 익숙한 인물이 더해졌다. ‘동물권’의 수호자로 야생동물 복지 시설 ‘티기윙클스’를 설립한 레스 스토커, 잡지 <맥심>의 발행인으로 여러 매체를 거느리다 전 재산을 숲 재단에 기부하고 떠난 펠릭스 데니스, 힐튼호텔 창립자 콘래드 힐튼과 자자 가보의 딸로 홈리스인 채 숨졌으나 자기 삶을 스탠딩코미디로 승화했던 프란체스카 힐튼, 귀족에 대한 통념을 비웃고 여든 넘어 새 결혼을 할 만큼 자신에게 충실했던 알바 여공작, 애완 돌 ‘펫록’을 대유행시켜 웃음을 주고 무용함의 유용함을 돌아보게 만든 게리 달 등, 다른 지면들에서 가십처럼 다루어지기도 했지만 분명 세상을 더 살 만하고 즐겁게 만든 인물이 책 곳곳에 포진해 있다. 세상을 바꿔나가는 데는 투지와 저항 말고도 여러 수단과 방식이 있음을 알려준 사람들. 저자는 이들의 삶을 급히 지나치지 않고, 인생의 순간순간에 있었을 체념과 오기, 안도와 웃음까지 느리고 깊은 눈길로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
편견, 차별, 억압, 소외, 쉽지 않은 삶에
함께 있어 든든했던 사람
『함께 가만한 당신』이 다루는 건 드러나지 않아 조용하고 은은했던 인물들의 완결된 삶이다. 살았을 때보다 난 자리가 크고, 모르고 지냈어도 돌아보면 동료이자 친구 같았던 사람이 저마다의 영역에서 ‘같은 목적’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흔적을 좇는다. 진실이 중요하고 상식이 바탕에 깔린,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 예컨대 억울한 사람을 사형대에 보냈다고 비난받았으나 40여 년 만에 진실을 인정받은 강간살인미수 피해자 발레리 스토리, 시골 의사처럼 송사를 가리지 않고 빈민 곁에서 권력기관과 싸운 ‘루저들의 변호사’ 마이런 벨덕, “사제니까 현실에 등 돌릴 수 없다”라며 독재에 저항하고 빈민 구제에 몸 바친 신부 페르난도 카르데날 같은 인물들이 삶을 바쳐 지키려던 것이 그런 삶이었다.
2013년, 84세의 벨덕은 암 진단을 받았다. 당시 그는 열여섯 살 소녀를 유괴 살해한 혐의로 1992년 체포돼 실형을 선고받은 에버턴 웩스태프의 무료 변론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사건 당시 스물세 살이던 웩스태프는 제대로 읽고 쓸 줄도 몰랐지만 감옥에서 혼자 글을 익히고 법을 독학해 직접 재심 청구 서류를 작성할 만큼 죽을힘 다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고, 가석방 기회조차 죄를 인정하는 꼴이라며 거부한 채 각계에 탄원서를 썼다. 거기 응답한 이가 벨덕이었고, 뉴욕의 공익 법률 단체를 설득해 그의 변론에 가세토록 한 것도 벨덕이었다. 벨덕은 공판을 앞두고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도록 항암 진통제까지 끊은 채 재판에 매달렸다. 2014년 9월 항소법원은 경찰과 핵심 증인이 거짓말을 했다는 정황증거를 검찰이 감춘 사실을 들어 원심 판결을 기각했다.
-122쪽, 「루저들의 변호사」
이 밖에도 『함께 가만한 당신』에는 그 자신이 힘겹게 누명에서 풀려나 오심변호협회의 창립 멤버가 된 권투 선수 ‘허리케인’ 카터, 인권 사각지대인 관타나모 수용소와 미국의 야만을 폭로한 인권운동가 마이클 래트너, 이윤과 거리가 먼 고집스러운 출판으로 출판업의 본령과 지조를 지킨 피터 오언 등 때로는 낯설고 때로는 익숙한 인물의 삶이 담겨 있다. 사회운동, 정치, 종교, 출판, 학문, 예술 등 저마다 분야는 다르지만 함께 있어 든든했던 사람이 우리 곁에 있었음을 이 책은 말한다.
적의 전투원은 기소나 재판 절차 없이 무한정 구금될 수 있고, 국제법과 미국 헌법이 보장한 변호사 선임권 등 어떤 권리와 법익도 누릴 수 없었다. 전쟁 포로가 아니기 때문에 유엔 제네바협약(고문 금지 등)의 보호도 받을 수 없고, 가족에게 소재와 생사조차 알릴 수 없었다. 그들이 수감된 곳이 법과 인권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쿠바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수감 시설이다. 아프가니스탄 고아를 돕는 단체로 위장한 알카에다 지원 단체에 후원금을 낸 스위스의 노파도, 알카에다 요원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준 청년도, 취재원을 보호하기 위해 알카에다 요원의 소재를 밝히지 않는 기자도 적 전투원으로 분류될 수 있고 당연히 관타나모에 수감될 수 있다. (…) 관타나모의 야만, 미국의 야만을 폭로하고 수감자의 인권과 헌법적 권리를 되찾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권 단체 헌법적 권리센터의 의장 마이클 래트너가 2016년 5월 11일 별세했다.
-77~78쪽, 「관타나모의 인권운동가」
결론 내지 않는 긴 부고
타인의 삶을 돌아보는 가장 존중 어린 방식
누군가의 삶을 쉽게 요약하려면 그를 영웅으로 만들면 된다. 하지만 그러면 정작 그의 삶보다 그 삶을 대하는 이의 편견 또는 욕망이 앞서기 쉽다. 부고란 한 사람이 일구었던 고유한 세계, 다시없을 그 세계를 닫는 글이고, 그래서 존중이라는 문법이 필요하다. 함부로 결론 내지 않고 당사자가 살아온 길을 그 결대로 더듬어보는 것. 『함께 가만한 당신』은 서른다섯 명의 삶을 느린 호흡으로, 쉽게 휘발될 추측과 판단과 미사여구를 보내기보다는 있는 대로 섬세하게 짚어나가려 한다. 누군가의 삶이 큰 울림을 준다면 그것은 그가 무결점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결점을 딛고서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임을, 진정한 ‘영웅성’은 인생의 단면이 아니라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 수록된 서른다섯 개의 긴 부고가 좇는 것은, 영웅보다는 진솔한 인간으로 남길 원했던, 그러기 위해 끝까지 무기력하지 않았던 그 비범함이다.
“삶의 원칙은 돈과 직장 생활의 매트릭스 속으로 사라졌다.” (…) 하지만 그는 “그래도 우리는 ‘오늘’을 잃었을 뿐 모든 걸 잃지는 않았다”라고, “40주년을 기념하는 까닭도 지금 우리가 여기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선은, 뭔가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선이기에 좇을 가치가 있다. (…) 성경이 선의 결실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나는 오직 내가 믿는바 선을 능력껏, 조심스럽게, 비폭력적으로 실천하는 것에만 마음을 썼고, 그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왔다.”
-55쪽, 「형제는 용감했다」
문고본 <번외 편> 동시 출간
일곱 명의 ‘그늘을 남기고 간 사람들’
『함께 가만한 당신』과 함께 <번외 편>도 출간되었다. 해석이 분분한 삶을 산 사람, 그래서 완벽한 비난도 완벽한 지지도 보낼 수 없기에 본편에 싣지 못한 일곱 사람을 따로 묶었다. 킬링필드의 학살자로 말년에 치매에 걸려 제 과오를 머리에서 지우고 간 이엥 티릿, 폭군과 애국자로 의견이 갈리는 군인정치가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순수한 호기심으로 마약을 연구한 ‘엑스터시의 대부’ 알렉산더 슐긴, 전쟁과 도덕 사이에서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임무를 수행한 테오도어 반 커크, 전과 누범의 범죄자로 무용담을 팔아 엔터테이너로 변신한 프랭키 프레이저, 인종 혐오를 조장한 극우 인종주의 전도사 윌리스 카토, 그리고 매너와 교양을 갖춘 거물 마약상 하워드 마크스. 이렇게 일곱 명을 수록한 <번외 편>은 112쪽의 문고본 비매품이다.
③
6년 만에 돌아온 『가만한 당신』 세 번째 이야기
세상의 조명 없이도 스스로 이름을 지킨 서른 명의 부고
경계를 지우며 나아간 소수자의 고유한 삶
2016년 나란히 출간되었던 『가만한 당신』 『함께 가만한 당신』을 잇는 책 『가만한 당신 세 번째』가 6년 만에 돌아왔다. 한국일보 최윤필 기자가 연재 중인 동명 칼럼 「가만한 당신」은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했지만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지키고 끝끝내 살아낸 사람의 부고이다.
죽은 이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삶을 기록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윤리적인 선택이다. 최윤필 기자의 시선은 주로 소수자에게 향한다. 소수자는 경계에 서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자 분투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생을 빚어내는 에너지를 뿜어내기도 한다. 『가만한 당신 세 번째』는 경계를 지우면서 가능성의 공간을 넓힌 소수자의 역동성을 포착한다. 책에 등장하는 트랜스젠더 과학자 벤 바레스, 아프리카에 대한 클리셰를 깨부순 작가 비냐방가 와이나이나, 지적장애인으로서 ‘스페셜올림픽’ 창설에 큰 역할을 한 마이클 큐잭 같은 인물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지난 6년 동안 우리 사회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페미니즘 리부트’가 연 문을 통해서 장애인, 퀴어 같은 소수자에 대한 환대의 시선이 조금씩 생겨났다. 그러나 그만큼 저항하는 움직임도 커졌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정상성을 규정하려는 이들이 있다. 『가만한 당신 세 번째』 속 인물들은 경계라는 벽을 높이려는 움직임에 유유히 저항한다.
앞선 책과 달리 『가만한 당신 세 번째』에는 한국인의 부고가 실렸다. 게이들의 생각을 풀어낸 잡지 〈뒤로〉의 창간인 이도진을 필두로 ‘여성의전화’를 이끌었던 이문자, 한국 문인들의 사진을 찍고 기록한 김일주가 소개된다. 동물의 언어 능력을 연구하기 위한 대상으로 관심을 끌었던 고릴라 코코의 부고도 담겨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몸으로 물을 미는 동안, 그의 장애는 장애가 아니었다. 극복해야 할 제약도, 도움받아야 할 결핍도 아니었다. 장애는 타고나거나 후천적으로 생기지만, 어떤 제약과 불편은 세상이 만들고 사회가 강요한다는 것, 폄하와 차별이 그렇게 시작된다는 것을 그를 보며 깨달아갔다.
—47쪽
정복이 아닌 회복을 선택한 보통의 영웅
그들을 우러르지도 동정하지도 않는 끈질긴 시선
『가만한 당신 세 번째』 속 인물은 위인전에 나올 법한 위인과는 다르다. 기존의 위인들이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려고 한다면, 가만한 ‘당신’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회복하려고 한다. 이들은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뛰어들지 않는다. 자신이 마주한 걸림돌을 넘기 위해 용기를 그러모은다. 그런데 작은 용기가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낸다.
룰라 콰워스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19세기 여성 작가 케이트 쇼팽을 다루고 싶다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해 요르단 내 최초의 페미니즘 강좌를 열고 한 세대의 페미니스트를 양성했다. 샤론 머톨라는 다큐멘터리영화 촬영을 하며 함께했던 동물을 차마 버릴 수 없어서 동물원을 열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눈을 밝히다 보면, 어느새 그 빛이 타인에게로, ‘우리’에게로 번져나간다.
“그들은 모두 비범한 일을 선택한 평범한 시민이다. (…) 내전 전 제빵사였고, 건설 인부였고, 택시 기사였고, 학생이었고, 교사였던 이들이지만 (…) 총을 들거나 피난을 떠나는 대신, 부상자를 위해 들것을 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 그들은 정부군 병사들을 구조하기도 한다. 그들의 일은 목숨을 구하는 것이지 목숨을 판단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125쪽
책 속 인물들을 가만히 응시하는 최윤필 기자의 시선은 한결같다. 그는 인물을 우상화하지도, 동정하지도 않는다. 개인적인 해석은 자제한 채 사실만을 엮어냄으로써 객관성에 다가선다. 그의 담담한 문장 덕분에 독자는 인물들과 눈높이를 맞추어 그들의 삶에 스며들게 된다.
“인간에게 인권은 과분하지 않은가.”
인류에 대한 회의로 가득 찬 시대
타자의 얼굴을 통해 인간다움의 가능성을 다시 생각하다
현재 인류는 수많은 위기와 마주하고 있다. 이미 심각한 수준인 기후 위기뿐 아니라 극우주의로 대표되는 정치 위기, 멸종하는 동식물로 인한 생태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가만한 당신 세 번째』에는 그린란드 빙하가 무너지고 있음을 최초로 목격한 과학자 콘라트 슈테펜, 영국 극우 세력의 핵심 인물에서 내부고발자로 변신한 레이 힐, 멸종위기종을 새롭게 정의한 조지나 메이스처럼 당대의 문제를 몸으로 겪고 돌파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삶이라는 이야기를 경유해 인류의 시급한 현안과 대면할 수 있다.
『가만한 당신 세 번째』에는 다양한 타자의 얼굴이 있다.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누구보다 뜨겁게 질문하고 삶을 빚어낸 이들은, 무엇이 윤리적인 삶이고 인간다움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인간성에 대한 회의가 만연한 시대, 답이 잘 보이지 않는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남아 있음을, 가만한 ‘당신’은 꿋꿋하게 보여준다.
가만한 당신 | 가만한 당신 | 최윤필
2014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동명의 기획물 중 서른다섯 편을 선별, 개작하여 묶은 책이다. 상식이어야 할, 그러나 여전히 상식으로 자리 잡지 못한 가치를 위해 온몸으로 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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