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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권총 로고를 만든 디자이너 조 카로프 향년 103세 별세



 

조 카로프(Joe Caroff), 1921년 8월 18일 ~ 2025년 8월 17일

 

 

이름 내세우는 데 평생 초연했던 007 로고 디자이너 조 카로프  
“마감 지키려 애쓰며 일했을 뿐” 묵묵한 일꾼이 세상을 움직인다

2025-08-22

뉴욕타임스는 지난 일요일 103세로 별세한 미국 그래픽 디자이너 조 카로프(Joe Caroff)의 부고 기사에서 고인을 ‘조용한 거인(quiet giant)’이라고 표현했다. 오랜 세월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은 작품을 발표하면서도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디자이너에게 어울리는 수식어라고 생각했다.

디자인 전문 매체도 그의 부고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카로프는 ‘잊힌’ 디자이너였다. 그러나 그가 디자인한 영화 007 시리즈 로고는 누구나 기억한다. 숫자 7의 가로선을 오른쪽으로 길게 늘여 제임스 본드의 ‘발터 PPK’ 모델 권총처럼 묘사한 이 로고는 시리즈의 시작인 ‘살인 번호’(1962) 개봉 당시 영화 홍보 자료의 레터헤드(문서 상단에 인쇄한 단체명이나 로고)를 의뢰받아 디자인한 것이다. 스파이의 세계를 시각적 상징으로 집약해 낸 디자이너에게 지급한 보수는 300달러였다. 그 외엔 수익을 배분하지 않았고 디자이너를 거명하는 일도 없었다. 007이 첩보 영화의 영원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하는 동안에도 카로프라는 이름은 드러나지 않았다.

 

숫자 ‘7’을 권총 모양으로 표현한 007 시리즈 로고.



카로프는 영화 포스터 분야에서 주로 활약했다. 뮤지컬이 원작인 ‘웨스트사이드 스토리’(1961), 비틀스의 동명 앨범을 바탕으로 한 ‘어 하드 데이스 나이트’(1964)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 ‘카바레’(1972) 같은 영화 포스터가 그의 작품이다. 영화는 명작 반열에 올랐지만 카로프는 디자인계에서조차 명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슨 거창한 은둔 예술가여서가 아니라 그가 자신을 “서비스 제공자일 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300종이 넘는 포스터를 디자인하면서도 뉴욕 맨해튼 자택엔 평생 한 점도 보관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 카로프가 디자인한 영화 포스터들. 왼쪽부터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카바레’,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디자이너는 구체적 쓸모를 위해 의뢰받고 작업한다는 점에서 자아 표현에 집중하는 순수 예술가와 구별된다. 한 분야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디자이너도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카로프는 이례적이다.

자기 현시(自己顯示)라는 오늘의 시대정신을 생각하면 더 그렇게 느껴진다. 국제 뉴스에는 노벨 평화상을 탐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쟁 종식이라는 성과를 자기 것으로 하려고 우크라이나에 ‘희생을 통한 평화’를 강요할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하다. 며칠 전 트럼프는 “나는 지난 여섯 달 동안 여섯 전쟁을 해결했다”라고 소셜미디어에서 호언했다. 그가 말한 여섯 전쟁이 각각 무엇인지 금방 떠오르지 않지만, 트럼프가 중재하는 우크라이나 종전(終戰) 논의를 둘러싼 우려가 그저 기우가 아니라는 건 확실해 보인다. 트럼프 같은 권력자만이 아니다. 숱한 ‘인플루언서’가 영향력을 다투고 더 많은 사람이 인플루언서를 꿈꾼다. 세계 최강대국 대통령도, 평범한 사람들도 자신을 한껏 드러내야 하는 세상이다. 겸손은 이런 세태와는 거리가 멀다.

카로프는 대중 앞에서 자기 작품을 대할 때도 자신이 작가라는 사실을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일생과 작품 세계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바이 디자인, 조 카로프 이야기’(2022)에 그런 태도를 짐작하게 하는 언급이 나온다. “나는 그 사실을 부각한 적이 없다. 일이었을 뿐이고, 완성해야 했다. 항상 마감을 지켰다.”

카로프의 이 말은 여느 번뜩이는 천재의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울림을 준다. 결국 세상은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이 움직인다. 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날 것은 드러나며, 빛내지 않아도 빛날 것은 빛난다. 카로프도 그렇게 믿었기에 초연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꾸준함과 성실함의 가치를 돌아보게 해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에스프레소] ‘조용한 거인’의 訃告가 말해주는 것

에스프레소 조용한 거인의 訃告가 말해주는 것 이름 내세우는 데 평생 초연했던 007 로고 디자이너 조 카로프 마감 지키려 애쓰며 일했을 뿐 묵묵한 일꾼이 세상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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