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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하늘로 떠난 민중시인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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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申庚林), 1936년 4월 6일~2024년 5월 22일

 

 


가난한 사랑 노래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농무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 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 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서른일곱에야 자비를 들여 벼르던 첫 시집 500권을 찍었다. 하지만 도통 팔리질 않았다. 대신 사람 만날 때마다 선물처럼 책을 건넸다. 점차 입소문이 났다. 시집을 찾는 서점도 생겼다. 그러던 2년 뒤, 1975년에 시집이 재출간된다. ‘창비시선’ 1호가 된 ‘농무(農舞)’ 얘기다.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의 원로 시인 신경림(본명 신응식)이 22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평생 빈자와 노동자들의 삶을 대변했던 고인의 장례는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치러진다.

● “내 가슴속 뭔가를 얘기하고 싶었다”



1935년 충북 충주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고인은 어려서부터 문학에 두각을 나타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시 ‘목계장터’에 등장하는 목계의 풍경을 담은 일기를 써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시인’이란 별명도 얻었다. 고인은 생전 인터뷰에서 “중학교 3학년 때 김영랑 시인의 ‘언덕에 바로 누워’를 읽고 무척 감동을 받았다”며 “이 시를 읽고 나도 무언가 먼 데 있는 것, 먼 데 있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말하자면 내 가슴속에 뭔가 얘기하고 싶은 게 있다는 걸 느꼈다”고 술회했다.

문단에 이름을 알린 건 1956년 동국대 영문과 2학년 때 시 ‘낮달’ 등을 문학예술지에 실으면서다. 그러나 당시 문단의 행태에 실망해 약 10년간 절필하고 귀향해 농사, 광산 일, 공사장 노동 등에 종사했다. 이는 그가 농민의 삶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민중 시인’으로 서는 밑거름이 됐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농무’ 중)

고인의 대표작 ‘농무’에는 산업화로 황폐해진 농촌의 쓸쓸한 분위기가 담겼다.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는 버려두고 신명 나게 춤추는 이들의 공허한 심정을 그려냈다. 유자효 전 한국시인협회장은 “고인은 한국인의 정서를 시로 가장 잘 표현한 시인이었다. 쉬운 생활어로 깊은 내용을 담아낼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10년간 시골에 박혀 살면서 ‘사람은 남과 더불어 혼자 산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 고인은 사회 현실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1975년 평론가 백낙청 등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세운 데 이어 1980년 7월에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 한국 사회 ‘인정’과 ‘소통’ 필요하다

대표작 ‘가난한 사랑노래’에도 엄혹한 시대의 아픔을 담아냈다. 고인은 2013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가난한 사랑노래’에 ‘기계 굴러가는 소리’라는 대목은 원래 ‘탱크 굴러가는 소리’였다”며 “(시대 상황을 고려해) 출판사에서 수정하는 게 좋다고 해서 고쳤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더욱 양극화되고 배타적으로 변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2015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은 안 바뀌면서 다른 사람만 바꾸려고 한다. 세상의 변화는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인정할 건 인정하는 동시에 그 사람이 지적하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성찰하는 데서 이뤄진다고 생각한다”며 ‘인정’과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제가 한 일은 시 몇 편을 쓴 것일 뿐”이라며 “제 시가 세상의 쓰레기 하나 더하는 시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고인은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병진 씨, 병규 세스코 상무, 딸 옥진 씨, 사위 최호열 전 동아일보 여성동아팀장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발인은 25일 오전 5시 반. 02-2072-2010

대장암 7년 투병에도… 말년까지 창작 의지  

동료들 “소탈하고 편안한 사람”  
“장례는 간소하게” 유언 남겨

22일 별세한 신경림 시인은 말년까지 창작 의지를 보였지만 대장암이 심해지면서 긴 투병 생활을 주로 이어갔다. 2017년부터 대장암 치료를 받았고 최근 병색이 급격히 악화됐다고 한다.

고인이 마지막 치료를 받았던 국립암센터의 서홍관 원장은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고 매일 5000보씩 걸을 정도로 정정하셨는데 한 달 전쯤 폐 부위에 암이 재발하면서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고 말했다. 이달 초 고인을 면회한 안종관 극작가는 “자꾸 잠이 들어 말씀은 못 하셨지만 건강하실 때 늘 빙긋 웃고 계시던 얼굴 그대로였다”고 전했다. 고인은 병세가 위중해진 최근에 “장례는 격식을 차리지 말고 간소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평소 고인과 교류해 온 문단 동료나 후배들은 소탈하고 편안한 사람으로 그를 기억했다. 곽효환 시인(한국문학번역원장)은 “문단의 다른 어른들한테는 꺼내기 힘든 불만이나 고충을 선생님께는 곧잘 털어놓을 수 있었다”며 “속 깊고 후배들을 잘 챙겨 주셨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고인의 충주고 1년 선배인 유종호 전 연세대 교수(문학평론가)는 “당시 국어 교사셨던 부친이 고인의 문학적 재능을 칭찬하시면서 문예지에 그의 작품이 실리도록 해준 게 기억난다”면서 “(고인은) 아주 소탈하고 어깨에 힘을 안 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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