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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 영전에… 진정한 자유인과 함께한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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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李泳禧), 1929년 12월 2일~2010년 12월 5일

 

 

리영희 선생 영전에… 진정한 자유인과 함께한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리영희 선생님,

초겨울의 우중충한 아침에 선생님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병환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으셔서 오래가시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막상 비보를 접하고 보니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이렇게 낙엽 지고 스산한 겨울에 무엇이 그리 바빠 서둘러 떠나셨습니까?

선생님은 고은 시인의 말처럼 ‘어둠의 시간, 아픔의 시간’에 계셨습니다.

1970~80년대 군사독재의 터널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던 저희 세대 한국 청년들의 영원한 스승이셨습니다. 대학의 강의실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사표였으며, 만년필 한 자루로 권력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기자이셨으며, 반공이라는 우상에 맞서 이성과 진실의 힘을 몸으로 보여준 비판적 지식인이셨습니다. 친일·친미·독재·부패·특권·반인도주의·성장지상주의와 안보지상주의 진영에 박정희가 있었다면, 민족·통일·민주·평화·인권의 진영에 선생님이 계셨고, 그 기울어진 저울의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선생님이 버텨왔습니다. 저 캄캄한 유신독재의 어둠 속에서 그것과 감히 맞서 싸울 이유를 제공해 주었던 분이셨으며, 선생님의 존재 자체가 청년들의 희망이었고, 기댈 수 있는 큰 언덕이었습니다. 군사독재라는 야만은 자유인·상식인으로 살고자 하는 선생님을 투사로 만들었고, 전쟁과 분단의 서슬은 평화와 인간의 격조를 지키고자 했던 선생님을 철없는 이상주의자로 몰았습니다.

어두운 시절에 어둠을 대면하지 않으려 했던 언론인들은 선생님의 뜻과 글을 애써 모른 채 하였고,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후배 언론인들은 선생님의 실존이 갖는 의미 자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한양대에 가신 후 중국 연구를 처음으로 제창하셨지만, 학계는 선생님이 중국·미국·일본, 분단문제 등 특정 학문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고 배척했고, 이산의 고통을 안고 있으면서도 북진통일의 신화에 사로잡힌 이북 고향의 친구들은 그것이 통일의 길이라 생각하면서 선생님을 멀리했습니다.

허구와 냉전의 우상, 독재를 향해서는 그렇게 매섭고 엄한 채찍을 휘둘렀지만, 선생님은 원래 자유인이셨습니다. 선생님의 열정과 분노도 차가운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상식과 자유에 대한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이라고 말씀하셨으며 파시즘을 자유라고 강변하는 이 거짓 자유주의에 맞서서 무엇이 진정한 자유인지, 자유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다른 동료 기자들이 고관대작들과 술 마실 때, 선생님은 열심히 자료를 찾고 책을 읽으셨으며, 여러 언어를 학습하셨고, 그칠 줄 모르는 탐구열과 끝까지 사실을 밝히고자 했던 언론인으로서의 근성은 부지기수의 특종기사를 만들었습니다. 선생님은 후배 제자들의 주장도 언제나 경청하셨으며, 남을 비판은 하되 결코 냉소적으로 말하지 않았으며, 좋은 일과 음식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셨습니다. 제가 신간을 보내주면 언제나 만년필로 꾹꾹 눌러쓴 편지지에 날인을 해서 답장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런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과 배려, 격려와 관심을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선생의 명문을 지으며 우리 후학들에게 권면하노니 왜 선생의 저서를 읽지 않으려 하나(銘先生而勉吾黨 與讀先生書)”라는 채제공이 성호 이익 선생의 쓸쓸한 묘지를 둘러보고서 쓴 시를 오늘 선생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북한의 연평도 포격이 있자 정국은 오직 대북 적대의 한목소리만이 살아남고, 황해에 미 조지 워싱턴호가 뜨자 곧바로 한·미 FTA가 밀실에서 일사천리로 타결되어 버리는 이 한반도 상공의 냉전 찬바람을 여전히 맞고 있는 우리는 앞으로 누구를 만나 남북화해와 자주외교의 길에 대해 시원한 충고를 들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인류의 모든 불의와 부정에 대한 개선 열정과 고통당하는 이들의 처지에 대한 뜨거운 공감을 가지셨던 선생님과 함께했던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했습니다. 리영희 선생님, 저 상식과 이성이 판치는 세상에서 편안히 쉬소서. 2010년 12월 5일

후학 김동춘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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