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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그 시간 끝에서 한 줄이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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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가르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안다. 시인은 학교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화가나 음악가처럼 시인도 어떤 본질을 타고난다. 그것은 분해해 설명할 수도, 다음 사람에게 조립해 건네줄 수도 없다. 거의 신비에 가깝다.

그렇다고 배움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본질은 가르칠 수 없지만, 시인이 되기 위해 익혀야 할 영역은 끝이 없다. 역사와 이론, 다른 시인의 언어. 타고난 불씨가 있다면 독서는 그 불을 키우는 산소다.

창작 교실에서 스스로 과제를 정하라고 하면 많은 학생이 다른 시를 읽기보다 자기 작품을 쓰는 데 시간을 쏟는다.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시인은 이미 충분히 많다. 그러나 잘 쓰려면 먼저 깊이 읽어야 한다. 좋은 시는 최고의 스승이다. 어쩌면 유일한 스승일지도 모른다. 읽기와 창작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는 읽기를 권하겠다.

자칭 현대적인 작품 상당수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한다. 이미 사랑받은 형식을 모방해 만들어진다. 그 안에서는 새로운 것이 좀처럼 태어나지 않는다. 진정 현대적인 작품은 화산처럼 과거를 뚫고 솟아오른다. 깊은 사유에서 생성된 열기만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낳는다.

우리는 모방을 부끄러워하지만, 모방 없이 배우는 길은 없다. 아이가 말을 배우듯 시인도 먼저 따라 쓴다. 리듬을 흉내 내고 문장을 빌리며 구조를 반복한다. 그 반복 속에서 미세한 어긋남이 생긴다. 그 차이가 자기 목소리다. 감정의 자유와 진정성, 독창성은 출발점이 아니라 도착점이다. 인내와 성실, 그리고 영감이 함께 닿아야 만나는 자리다.

시는 행으로 이루어진다. 어디에서 끊을 것인가. 행갈이는 단순한 배열이 아니라 의미를 만드는 선택이다. 문장이 이어지는 지점에서 끊으면 독자의 호흡이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긴장을 만든다. 시인은 평생 이 문제를 붙든다.

처음 쓴 글이 완성에 가깝기를 기대하는 일은 순진하다. 초고는 언제나 미완성이다. 더 어려운 일은 자신과 시를 분리하는 태도다. 경험이 생생할수록 시는 오히려 흐려진다. 시는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경험 그 자체는 아니다. 사실을 변형하는 용기, 더 큰 진실을 향한 선택이 필요하다.

고쳐 쓰기는 끝이 없다. 그러나 배움은 그 과정에서 일어난다. 아름다움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쓰고 지우고 다시 쓰는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시는 끝내 살아남지 못한다. 그것 또한 수업이다.

시는 언어유희가 아니다. 기교를 넘어 어떤 시선과 사유를 담는다. 연민과 호기심, 분노와 음악적 감각. 그런 감수성이 시를 가능하게 한다. 시는 삶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이며 하나의 비전이다.

결국 시는 단어의 집합이 아니다. 추위 속의 불, 길 잃은 사람에게 내려진 밧줄, 굶주린 주머니 속 빵과 같다. 평소에는 장식처럼 보일지 몰라도 절박한 순간에는 생존과 다르지 않다.

시가 강이라면 기술과 노력은 그 바닥이다. 바닥이 단단해야 물이 흐른다. 시 짓기는 사랑과 닮았다. 약속하고 기다리는 일이다. 책상 앞에 앉아 준비된 마음으로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어느 순간 시가 다가온다.

시는 타고나는지 모른다. 그러나 시인이 되는 과정은 읽기와 모방, 인내와 고쳐 쓰기, 그리고 기다림을 통과하는 긴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시간 끝에서 한 줄이 태어난다.

—『시 쓰기 안내서』, 메리 올리버,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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