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생각보다 빨라졌다, 80일간의 세계일주



반응형

 


아동용 도서로 오해받는 대표적인 고전이다. 우리는 제목 정도는 익히 알고 있지만 정작 읽어본 기억은 희미하다. 어쩌면 영화로 먼저 만났을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얼개는 단순하다. 멋진 신사 포그, 약간 우둔하지만 충직한 하인 파스파르투, 우연처럼 등장하는 여인 아우다, 그리고 그들을 뒤쫓으며 위기를 만들어내는 무능한 경찰 픽스. 이 네 인물이 위기와 모험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런던으로 돌아온다. 세계일주는 당연히 80일 만에 성공한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여행하도록 하여 마지막 하루를 만들어내는 반전은 작가의 풍부한 지식과 계산에서 나온 장치다. 물론 치밀한 포그라면 이런 착각을 했을 리 없지만, 독자를 위한 장치라고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포그는 런던 중심가 상류층 사교모임인 개혁클럽의 회원이다. 돈도 있고 체면을 명예처럼 여기는 영국 신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1872년 가을, 이 클럽에서 사소한 논쟁이 벌어진다. 영국은행에서 발생한 5만 5천 파운드 도난 사건이 계기가 됐다. 도둑이 이미 먼 나라로 도망쳤을 것이라는 의견과, 이제는 교통이 발달해 오히려 잡기 쉬워졌다는 의견이 맞섰다.

“아무리 세계일주라 해도 세 달은 걸리겠지.”
누군가 이렇게 말하자 한 신사가 정색하며 대답한다.
“80일이면 됩니다.”
이 한마디로 포그의 세계일주가 시작된다.
“원한다면 내기를 하죠. 2만 파운드를 걸겠습니다.”
출발은 언제냐는 질문에 그는 말한다.
“오늘 당장 떠나죠.”

포그는 숫자와 시간에 집착하는 인물이다. 하루 일과는 분 단위로 정해져 있고, 물의 온도도 일정한 수치만 사용한다. 심지어 클럽까지 걸어가는 발걸음 수까지 계산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늘 같은 장소만 오가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세계지도가 들어 있다. 세상을 떠돌아본 적은 없어도 지리에는 누구보다 정통한 괴짜다.

포그의 세계일주가 가능했던 이유는 소설 속 상상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2~3년 전 세계 곳곳에서 거대한 교통 인프라가 완성됐다. 1869년 미국 대륙 횡단철도, 같은 해 개통된 수에즈 운하, 1870년 완공된 인도 반도 철도다. 쥘 베른은 이 새로운 교통망을 이용해 런던에서 출발해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아오는 80일 여행을 설계했다. 소설이면서도 철저히 현실 위에 세운 상상이다.

이 소설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여행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간을 계산하는 이야기다. 포그가 집착하는 대상도 거리보다 시간이다. 마지막 반전, 하루를 앞서가는 장치 역시 지구 자전과 시간 계산에서 비롯된다. 세상이 좁아졌다는 말보다, 세상이 빨라졌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이 왜 영국인을 주인공으로 삼았는지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당시 세계 질서와 관련이 있다. 19세기 후반 세계의 교통과 금융의 중심은 런던이었다. 해운과 철도, 무역 네트워크가 이 도시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세계일주라는 설정을 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영국 신사가 가장 자연스러운 인물이었을 것이다.

소설이 쓰인 시기 영국은 지구 곳곳에 식민지와 항로를 가진 제국이었다. 인도, 홍콩, 요코하마, 미국 등 주요 경로가 모두 영국의 교통망과 연결되어 있었다. 영국인을 주인공으로 두면 이런 세계 네트워크를 자연스럽게 이용할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은 단순한 모험 이야기가 아니라 19세기 영국 중심의 세계 시스템 위에서 작동하는 이야기다. 프랑스 작가가 영국 신사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꽤 계산된 선택이었다.

쥘 베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팬덤을 가진 작가다. 미국과 유럽에는 그의 세계를 추종하는 ‘베르니안’이 있다. 베르니안은 쥘 베른의 이름에서 나온 말로,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미지의 세계가 실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을 가리킨다. 지구 내부 세계를 과학적으로 탐구하거나 소설 속 장소를 찾아 탐험을 떠나는 이도 있다.

이 책에는 여러 장점이 있지만 읽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지점도 있다. 아시아 여러 나라를 미개한 지역처럼 묘사하는 부분이다. 생활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미개한 민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당시 서양인이 가진 편견이 그대로 드러난다. 물론 이런 한계가 있다고 해서 작품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전을 읽을 때 우리가 함께 바라봐야 할 그림자이기도 하다.

 


쥘 베른의 작품 제목을 나열해 보면 그는 마치 미래에서 온 사람처럼 느껴진다. 순수한 상상만으로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의 작품을 모두 읽어보고 싶지만 이미 절판된 책도 많다. 더 아쉬운 점은 쥘 베른의 작품이 여전히 아동용 공상과학 소설 정도로 취급된다는 현실이다.

번역자 김석희 선생의 말은 이런 현실을 정확히 짚는다.

“고전, 고전하는데 재미없는 고전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재미있는 것을 읽게 만들어야지요. 서울대에서 추천하는 고전 목록을 보면 기가 차요. 선생들이 자기 전공만 추천하지요. 제가 번역한 『해저 2만 리』 같은 작품은 대학에서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그걸 아동도서라고 하니 천만의 말씀이지요.”

대학에서 밥벌이하는 사람이 어떤 책을 고전이라 부르는지 생각하게 된다. 동시에 고전은 결국 재미있어야 한다는 말에도 공감하게 된다.
재미없는 고전은 고전이 아니라 단지 오래된 책일 뿐이다.

—80일간의 세계일주, 쥘 베른, 김석희 옮긺, 열림원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