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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소

폰지 게임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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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지 게임

1919년 잡지 사업을 한번 해볼까 하고 스페인의 관련 회사에 편지를 보낸 찰스 폰지(Charles Ponzi·1882~1949)는 답장에 동봉된 국제우편회신 쿠폰을 바꾸러 우체국에 갔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스페인에서 미국 돈 1센트에 사보낸 쿠폰이 미국에서는 6센트나 했던 것이다. 이미 위조죄로 캐나다에서, 밀입국을 도와준 죄로 미국에서 한 번씩 옥살이를 한 그의 머리에 기발한 생각이 스쳤다. “값이 싼 나라에서 쿠폰을 대량으로 사다가, 값이 비싼 나라에서 현금으로 바꾸면 큰돈을 벌 수 있겠다!”

뒷사람의 돈을 앞사람에게 떼주다

폰지의 생각은 그럴듯했다. 국제우편회신 쿠폰은 1906년 미국을 비롯한 60여 개국이 맺은 협약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쿠폰을 보낸 사람이 회신우편 요금을 미리 대신 치르게 한 것이었다. 쿠폰을 받은 사람은 그것을 우체국에 가지고 가서, 회신에 필요한 우표로 바꿀 수 있었다. 협약 초기에는 어느 나라에서나 쿠폰값이 비슷했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을 거친 뒤 각국 통화의 가치가 크게 변했음에도 쿠폰요금 체계는 바뀌지 않은 게 폰지의 눈에 띈 것이다.

45일간 투자하면 50% 수익을 보장한다.” 폰지는 그해 12월 쿠폰사업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며, 회사를 차리고 투자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처음 그의 계획을 의심하던 사람들은 그가 실제로 투자자들에게 높은 수익을 안겨주자 태도를 바꿔, 그의 사무실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1920년 7월이 되자, 일주일 사이에 100만달러가 모일 정도였다. 나중에 집계한 것을 보면 그에게 투자한 사람은 1만여 명, 투자금은 980만달러나 됐다.

폰지는 사실 아무런 수익사업도 벌이지 않았다. 그저 나중에 투자한 사람의 돈에서 먼저 투자한 사람에게 수익을 떼주고, 나머지는 자신이 챙길 뿐이었다. 투자자들이 그에게 맡긴 돈으로 쿠폰 거래를 해 돈을 벌었다면, 쿠폰 1억 장 이상을 현금화해야 했으니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동안은 모두가 행복했다. 그러나 그해 여름 주정부와 연방정부가 폰지의 사업을 조사하면서 사람들은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보스턴포스트>가 그의 사업계획의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사를 1면에 싣자 불안해진 투자자들이 돈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폰지는 여러모로 투자자들을 안심시켜봤지만 조사가 계속되자 자금 이탈은 더욱 거세졌다. 폰지는 8월이 되자 결국 파산하고, 체포됐다.

폰지의 사기극은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큰돈을 빌린 뒤 떼먹고 달아나는 사람들의 수법과 별 차이가 없다. 단지 그럴듯해 보이는 수익모델을 내세웠다는 게 다를 뿐이다. 사기극이 일찍 탄로남으로써 투자자들은 그나마 199만달러를 뺀, 782만달러는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폰지의 이름은 이때부터 ‘사기’의 동의어가 됐고, 오늘날 ‘폰지 게임’이란 경제용어로 남았다. 폰지 게임은 빚의 이자를 갚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빚을 얻어야 하는, 지속 불가능한 경제행위를 뜻한다.

폰지는 돌아온다, 바보가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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