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6) 썸네일형 리스트형 아, 리영희 선생 - 백기완 리영희(李泳禧), 1929년 12월 2일~2010년 12월 5일 아, 리영희 선생—백기완리영희가 도대체 누구인데 그의 죽음을 두고 그리 시끄러운 거요 이름도 처음 듣는다는 이의 말에 시끄러운 게 아니지요 또다시 목숨을 걸고 한마디 하시는 거지요 그러구선 나는 먼 날을 더듬었다 어느덧 서른 해가 지났는가 선생이 내 병문안을 왔다가 백선생, 나 대포집이요, 나오시오 그때 일어서지도 못하고 죽도 못 삭이는 날 불러내던 그분은 뉘시던가한살매 목숨을 걸고 불러내던 분이다 분단이 쇠벽이 될 땐 겨레 넋을 불러대고 온몸을 묶을 땐 자유혼을 불러대고 되는 마을엔 새벽을 여는 이가 있듯이 내리친 어두움은 우주가 아니라고 외치고 날강도의 거짓부리기는 우상이라 외치고 할 말을 버린 붓끝은 곧.. 리영희 선생 영전에… 진정한 자유인과 함께한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리영희(李泳禧), 1929년 12월 2일~2010년 12월 5일 리영희 선생 영전에… 진정한 자유인과 함께한 우리는 행복했습니다리영희 선생님,초겨울의 우중충한 아침에 선생님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병환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으셔서 오래가시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막상 비보를 접하고 보니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이렇게 낙엽 지고 스산한 겨울에 무엇이 그리 바빠 서둘러 떠나셨습니까?선생님은 고은 시인의 말처럼 ‘어둠의 시간, 아픔의 시간’에 계셨습니다.1970~80년대 군사독재의 터널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던 저희 세대 한국 청년들의 영원한 스승이셨습니다. 대학의 강의실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사표였으며, 만년필 한.. 이땅의 메마른 사상 지평 넓힌 전환시대의 지식인, 리영희 리영희(李泳禧), 1929년 12월 2일~2010년 12월 5일리영희(81). 5일 타계한 그는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이름 석자로 통하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기자·교수·사회운동가 등 여러 직함이 있지만 ‘지식인’이란 호칭이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1970∼80년대는 그의 시대이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필두로 대한민국의 산업화가 속도를 내던 시절, 대한민국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민주화운동 진영에 리영희가 있었다. 기자 출신의 대학 교수였고, 가진 것은 펜밖에 없었지만, ‘약한 펜’으로 군사독재의 ‘강한 벽’을 허무는 데 앞장섰다. 네 번의 해직, 세 번의 투옥을 겪었다. 고통이었지만 영광이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우리 현대사에 그가 기록해 놓은 공적으로 평가된다.한국 현대사의 명암고인의.. 시대의 실천적 지식인 리영희 선생 별세 리영희(李泳禧), 1929년 12월 2일~2010년 12월 5일 시대의 실천적 지식인 리영희 선생 별세 우리 시대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이자 ‘큰 언론인’이었던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2010년 12월 5일 별세했다. 향년 81.지병으로 서울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에 입원했던 리 교수는 이날 오전 0시30분께 병원에서 가족과 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그의 평생은 ‘반지성에 맞선 치열한 싸움의 역정’이었다. 근무하던 언론사와 대학에서 각각 두 번씩 해직됐고, 모두 다섯 차례 구속됐다. 1980년 신군부가 ‘광주소요 배후 조종자’ 중 한 명으로 그를 지목 · 투옥했을 때 프랑스 일간지 는 리 전 교수를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은사)라고 불렀다.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난 리 전 .. 리영희 부고기사에 드러난 「조선일보」의 이중성 리영희(李泳禧), 1929년 12월 2일~2010년 12월 5일「중앙」, ‘색깔’ 멀리하고 지식인의 삶 부각한 면을 모두 털어 전날 타계한 리영희 선생을 자세히 소개했다.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듯하다”는 한명숙 전 총리 반응까지 함께 전했다. ‘조중동’이란 표현에서 「중앙일보」를 빼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6일 자 「중앙」이 그러했다.‘양(量)’보다는 ‘질(質)’에서 더욱 돋보였다. 그 제목부터 ‘이 땅의 메마른 사상 지평 넓힌 전환시대의 지식인’이었다. “『전환시대의 논리』 저자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별세했다”는 「조선」이나 「동아」와는 확실히 격이 다른 제목이었다.그 내용에서도 「중앙」은 ‘색깔’을 멀리했다. 그보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부각하는 데 주력했다. 처음부터 “민주화운.. 리영희, 내가 할 역할은 다 했고, 남은 역할은 내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어주는 것뿐 리영희(李泳禧), 1929년 12월 2일~2010년 12월 5일 내가 할 역할은 다 했고, 남은 역할은 내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어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성한 백발에 인자한 팔자 주름, 세로줄이 들어간 청색 양복을 단정히 갖춰 입은 영정 사진이 조문객을 맞았다. 2010년 12월 5일 0시 40분경, 리영희 선생이 향년 81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차남 건석 씨는 “지병인 간경화가 악화됐고, 3주 전부터는 의식이 거의 없었다”라고 말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병세가 깊었던 탓인지 장례식장은 차분했다. 뇌출혈로 인해 펜을 들 수조차 없어 임헌영 선생과 함께 구술로 적어내린 자서전 〈대화〉(2005)의 마지막 장. 선생은 “내가 할 역할은 다 했고, 남은 역할은 내가 변치 ..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