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철 (7) 썸네일형 리스트형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박남철 10주기 쓸쓸함 박남철(朴南喆), 1953년 11월 23일 ~ 2014년 12월 6일 지난 6일을 아무도 기억하거나 기록하지 않는다. 문단의 괴짜 사고뭉치 이단아를 생각하기 싫은 까닭이다. 그가 절정기를 살았던 중랑천변을 나 홀로 걷는다ᆢ. 강은 얼지 않았지만 시인은 여전히 꽁꽁 언 겨울강에 돌을 던지고 있다. 쩡쩡쩡쩡쩡ᆢ그의 초기 시 ‘시인의 집’을 떠올린다스승 조병화께서 악수로써 껄껄껄 세배를 받으신 다음 구라파적 술잔에 꼬냑을 따라주시면서, 스승의 연구실을 따뜻했습니다.얘 남철아, 시인에겐 집이 없지 여기 장영자씨도 계시지만 평론가에겐 집이 있지 소설가에게도 집은 있고 극작가에게도 집은 있고 심지어 수필가에게도 높은 집은 있는 법이지 그러나 얘야 남철아, 시인에게는 집이 없지 그냥 사람 인자 시인이지 뭐, 헐헐헐... 잘가 박남철 선배. 거기 가서는 싸우지 마라 박남철(朴南喆), 1953년 11월 23일 ~ 2014년 12월 6일박남철 시인이 어제 아침 죽었다. 낮 12시쯤 후배 시인에게서 온 연락을 받고 난 멍해졌다. 문단 최고의 깡패인 그를 안 본 지 20여 년 지난 것 같다. 지난해 말인가 페북 친구 요청이 왔길래 묵살했다. 며칠 뒤 살펴봤더니 그 스스로 철회를 했다. 난 알고 있다. 그와 엮이는 순간 내 인생이 피곤하고 힘들어질 거라는 걸. 그는 내 대학 1년 선배다. 방위를 마친 그와 나는 대학 4년을 같이 보냈다. 그와 지긋지긋하게 싸운 날은 셀 수도 없다. 등판도 거의 같은 시기에 했고 내가 3년 후배인 류시화 박덕규 이문재와 시운동 동인을 시작했을 때 그는 나를 엄청 시기했고 괴롭혔다. 그가 문단에서 벌인 깡패짓은 영원히 한국문학사에 남을 것이다.. 박남철 시인, 그가 갔다 박남철(朴南喆), 1953년 11월 23일 ~ 2014년 12월 6일 지난 1980년대 중반부터 해체시의 선두 주자로 불리고 있는 박남철 시인, 투병 끝에 사망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겨두고 시세계를 영원히 떠나1979년 『문학과 지성사』로 등단한 박남철 시인은 황지우와 더불어 해체시의 선두 주자로 불리고 있는 시인이다.1980년대 중반부터 모든 금기를 해체하는 ‘해체시’로 유명해졌다. 그의 작품은 수사나 시의 구조보다는 형태 파괴, 풍자, 분노 등을 여과 없이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독자놈 길들이기」라는 시는 시인과 독자의 관계까지 파괴하는 파격을 보여주었으며, 문학평론가 김수이는 박남철을 “문법 해체를 통해 억압에 저항하려는 문학적 시도”라고 평가했다. 여섯 번째 시집인 『바다 속의 흰.. 박남철 시인이시여, 분노와 핏대 없는 그곳에서 영원히 안식하시라 박남철(朴南喆), 1953년 11월 23일 ~ 2014년 12월 6일 박남철 시인과의 짧은 인연 6년 전 어느 초가을날 지성찬 시조시인과 함께 박남철 시인을 처음 만났다.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민경환 시인과 같이 안성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식당을 공동운영(적어도 형식적으로는)하고 있었다. 마을의 한 식당에서 술을 마셨고 다른 테이블의 손님과 시비가 붙었으며 그 시비는 고래심줄처럼 끈질기게 이어졌다. 여차하면 몸싸움이라도 벌어질 일촉즉발의 험악한 분위기였다. 물론 처음엔 뜯어말렸으나 상대편의 기세도 만만찮아 만약 집단패싸움으로 번질 경우 나도 거들기 위해 예비동작까지 머릿속에 그려 넣고 있었다. 다행히 마침 경찰이 출동하는 바람에 구체적인 몸싸움까지 가진 않았지만 덕택에 밤새 통음으로 시달려야 했다... 야수의 피를 지닌 한 시인이 영면했다 - 박남철 박남철(朴南喆), 1953년 11월 23일 ~ 2014년 12월 6일 최근 야수의 피를 지닌 한 시인이 영면했다. 박남철 시인이다. 박남철은 이성복, 황지우와 함께 80년대 해체시의 선두주자로 평가되는 시인이다. 1980년대는 리얼리즘적 민중시가 유행하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그는 모든 금기에 도전하는 과감한 시를 보여주었다. 전통적 수사나 구조를 파괴함으로써 냉소, 분노 등을 여과 없이 표현했다. 해체를 통해 모든 억압에 저항하려는 문학적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독자놈들 길들이기」라는 시는 시인과 독자의 전통적 관계를 부정하는 파격을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기본적인 불문율을 깨뜨린 하나의 사건이라 할 만하다. 독자놈들 길들이기 —박남철 내 詩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 놈들에게— 차렷.. 박남철은 많은 사람에게 골치 아픈 인간이었으나, 재능은 있었다 박남철(朴南喆), 1953년 11월 23일 ~ 2014년 12월 6일 문학에서, 한 작가를 후대의 역사는 영향력으로 평가하고, 당대의 비평은 재능으로 평가한다. 박남철은 많은 사람에게 골치 아픈 인간이었으나, 재능은 있었다. 여러 사람이 그의 부고에 날 괴롭힐 일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과 안쓰러움이 교차했을 것이다.-황현산 박남철 시인, 영면에 들다박남철(朴南喆), 1953년 11월 23일 ~ 2014년 12월 6일 박남철 시인, 영면에 들다—문계봉 시인한 시대를 다소 거칠고 위악적인 모습으로(친한 지인은 격정적이라고 표현하겠지만...) 통과해 온 시인이maggot.prhouse.net 박남철 시인, 영면에 들다 박남철(朴南喆), 1953년 11월 23일 ~ 2014년 12월 6일 박남철 시인, 영면에 들다—문계봉 시인한 시대를 다소 거칠고 위악적인 모습으로(친한 지인은 격정적이라고 표현하겠지만...) 통과해 온 시인이 있었다. 그가 있는 자리에서는 늘 활극이 벌어졌고, 피가 튀었고, 술상이 엎어졌다. 그를 아는 지인은 그를 피했고, 그를 모르던 사람조차 만난 적도 없는 그를 ‘미래의 기억’으로부터 단절시켰다. 그럴수록 세상과 사람에 대한 그의 ‘발길질’은 더욱 그악스럽고 집요해졌고, 곧이어 사람과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켰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고 박영근 형(시인)의 빈소에서였는데, 그날도 그는 앞자리 동료 시인의 코뼈를 부러뜨렸고, 경찰이 왔으며 빈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물론 그에게도 재..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