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철(朴南喆), 1953년 11월 23일 ~ 2014년 12월 6일
박남철 시인이 어제 아침 죽었다. 낮 12시쯤 후배 시인에게서 온 연락을 받고 난 멍해졌다. 문단 최고의 깡패인 그를 안 본 지 20여 년 지난 것 같다. 지난해 말인가 페북 친구 요청이 왔길래 묵살했다. 며칠 뒤 살펴봤더니 그 스스로 철회를 했다. 난 알고 있다. 그와 엮이는 순간 내 인생이 피곤하고 힘들어질 거라는 걸. 그는 내 대학 1년 선배다. 방위를 마친 그와 나는 대학 4년을 같이 보냈다. 그와 지긋지긋하게 싸운 날은 셀 수도 없다. 등판도 거의 같은 시기에 했고 내가 3년 후배인 류시화 박덕규 이문재와 시운동 동인을 시작했을 때 그는 나를 엄청 시기했고 괴롭혔다.
그가 문단에서 벌인 깡패짓은 영원히 한국문학사에 남을 것이다. 그는 자타공인 문단 천하제일의 깡패였다. 어제는 일이 가장 많이 겹치는 날 중 하루다. 원래 새벽 3시에 끝나는 일정이었지만 솔땅 생일파티에 잠깐 들렀다가 서울의료원 영안실로 갔다. 평소 그에게 괴롭힘을 당한 문단의 엄청난 시인 작가 문학지 편집자 출판사 관계자 문학기자 그의 죽음에 안도감을 느끼며 시끌벅적할 줄 알았다. 그의 대학동기이자 역시 내 1년 선배인 고원정, 그리고 박덕규 김요일 김이듬 시인 등 6명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박남철이 죽었는데 영안실에 6명이라니. 김사인 시인과 작가 인홍도 잠깐 들렀다 갔지만, 이럴 수는 없다.
난 생각보다 그가 오래 살았다고 생각한다. 진심이다. 그는 대학때부터 정신질환도 앓고 있었고 약도 한 움큼씩 먹었다. 그와의 일화는 10권짜리 대하소설로도 모자라다. 교회식으로 꽃을 바치는 영안실 한쪽에 도봉교회가 새겨진 깃발이 있었다. 영정사진이 마음에 안 들었다. 박남철인데 그답게 삐딱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봐야 되는데 너무나 따뜻하고 평온한 표정이었다.
잘가라 박남철, 당신과 살았던 순간들 정말 지긋지긋했다. 이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런데 조금 아니 많이 쓸쓸하다. 왜 눈물이 찔끔거릴까. 속 시원하고 후련해져야 하는데. 잘가. 박남철. 나는 한번도 그를 선배라 부르지 않았다. 항상 그와 부딪칠 때는 전투적으로 싸우려고 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막무가내 함부로 깡패짓을 했지만 나한테는 그러지 못했다. 우리는 철없던, 문학적 패기가 하늘을 찌르던 대학 4년 그 긴 시간을 함께 보냈으니까.
잘가 박남철 선배. 거기 가서는 싸우지 마라. 내가 아주 나중에 가서 또 싸움꾼 노릇하고 있으면 정말 디지게 패버릴 테니까.
—시인 하재봉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추모글
박남철은 많은 사람에게 골치 아픈 인간이었으나, 재능은 있었다
박남철(朴南喆), 1953년 11월 23일 ~ 2014년 12월 6일 문학에서, 한 작가를 후대의 역사는 영향력으로 평가하고, 당대의 비평은 재능으로 평가한다. 박남철은 많은 사람에게 골치 아픈 인간이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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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철 시인, 영면에 들다
박남철(朴南喆), 1953년 11월 23일 ~ 2014년 12월 6일 박남철 시인, 영면에 들다—문계봉 시인한 시대를 다소 거칠고 위악적인 모습으로(친한 지인은 격정적이라고 표현하겠지만...) 통과해 온 시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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