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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 교수의 <또 한 권의 벽돌 : 건축가 서현의 난독일기>에 있는 "자연계와 인문계"라는 한 토막의 글이다. "분류는 대상에 대한 이해의 기본이다. 분류할 수 없다면 이해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분류가 분류대상에 개입하려고 하는 순간 그 분류는 폭력적이 된다"는 말을 반은 이해하고 반은 분노한다. 즐긋기를 한다. 내 편 니 편으로 나눈다. 내 편이 아니면 나쁜 놈이 된다. 한번 정해진 잣대를 벗어나기가 어렵다.
문병란은 자유가 아니라 자유라는 말때문에 철조장이 쳐진 우리의 역사를 노래한다.
너는 모르지
자유라는 말이 생긴 그날부터
그 자유때문에 감옥이 생기고
철조망을 친 인간의 역사
이 땅은 하나의 거대한
사상의 감옥이 되었다.
- 문병란 <땅의 연가>, 동물원 中
서현 교수의 글처럼 얼마 살지않은 아이들에게 인생을 정하라고 강요한다. 자연계와 갈래 인문계로 갈래. 말도 안되는 것을 당해온 기성세대들은 또 그것을 강요한다. 분류가 또 다른의미의 폭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넓은 스펙트럼을 우리는 검은 색과 흰색으로 나누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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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계와 인문계
사람은 무엇인가?
대답해보라. 그 대답의 방식은 대답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준다. 가장 걸맞아 보이는 학문, 철학하는 이라면 대답은 생각의 주체 혹은 그 언저리에 있을 것이다. 생물학자에게 그 대답은 돌연변이를 통해 자연에 신기하게 적응한 생물의 한 종이요, 패션 디자이너에게는 옷걸이요, 식당 주인에게는 입 달린 돈일 것이다. 자동차 엔지니어에게는 싣고 다녀야 할 덩어리이며 화가에게는 그려야 할 입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역시 사람이 무엇이냐는 질문의 대답처럼 구분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철학자는 몸과 정신으로 구분할 것이다. 식당 주인은 자기 식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과 먹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할 것이요 자동차 엔지니어는 무거운 사람과 가벼운 사람으로 나눌 것이며 화가는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구분할 것이다. 인종주의자는 백인과 유색인으로 나눴을 것이다.
다시 물어보자. 그렇다면 너는 무엇이며 어떤 갈래에 들어가 있느냐. 이 질문에 답하기 곤란한 것은 이런 질문과 분류가 폭력적으로 단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자. 요즘은 인터넷이라는 이상한 공간 안에서 뭔가를 하려면 일단 회원가입을 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이름, 주민번호, 주소는 정확히 적을 수 있다. 그러나 항상 주저하게 하는 것은 사회 안에서 나의 위치를 묻는 질문이다. 직업이 무엇이냐. 너는 누구냐.
건축학부 교수로서 내가 들어가야 할 부분은 항상 모호하다. 나는 건설과 교육의 어느 부분에 속해 있는 것인가. 종합소득세 신고를 하는 나는 자영업자인가 근로소득자인가. 건물도 짓고 책도 쓴 나는 건축가인가 저자인가. 입국신고서에 주관식으로 적게 되어 있는 직업란에 내가 적어야 할 단어는 교수인가 건축가인가 저자인가. 문제는 이 중 하나만 선택하라는 요구의 폭력성이다.
대한민국에서 사람을 갈래짓겠다는 첫 번 째 폭력이 등장하는 시점은 고등학교다. 인문계와 자연계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소수의 예술계가 있지만 양분법에서 삼분법으로 나뉜다는 점을 빼면 폭력적 분류는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자연계를 선택했다. 건축과가 자연계에서 진학해야 하는 학과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물리학자, 의사, 엔지니어가 되겠다거나, 뭘 하겠다는 것인지 아직 정하지 못한 수 많은 자연계 고등학생들 속에서 화학, 생물, 물리, 지구과학을 공부해야 했다. 건축과는 별 관계가 없었지만 자연계의 시험과목은 단호한 이분법 체계를 강요했다.
분류의 폭력은 끝나지 않았다. 대학에서 건축과는 공과대학 안에 들어있었다. 공대는 공대이기 때문에 모두 공업수학을 공부해야 했다. 라플라스 변환과 푸리에 전개를 나는 공부해야 했고 학기말 고사가 끝나면서 그 내용은 내가 시험준비에 들인 시간과 함께 말끔히 증발해버렸다.
공과대학 건축학부 교수로서 내가 쓴 책들에는 방정식이 나오지 않는다. 원소기호도 나오지 않으며 유효숫자, 변수, 벡터와 같은 단어도 나오지 않는다. 대신 르네상스, 세한도, 칸트, 그림자, 역사와 같은 단어가 등장한다. 그럼에도 이 책은 서점에 가면 공학서적으로 분류되어 있다. 인터넷서점들에서는 주로 예술/대중문화 서적으로 분류되어 있다. 드물게 인문학 서적으로 분류된 경우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어디에나 해당된다. 단 한 분야에만 속해있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의 시작점이다.
2002년 말에 나는 서울시청 앞 광장 현상설계 공모에 당선되었다. 이 천 대 남짓의 모니터를 광장바닥에 깔아놓는다는 발상이었다. 여기 시민들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올려놓자는 것이었다. 어떻게 구현하느냐의 문제로 말이 많으면서 결국 당선안은 포기되고 지금의 타원형 잔디밭 광장이 되었다. 갈래의 질문은 여기서도 나왔다. 조경가가 아니고 건축가가 광장 공모에서 당선되었다는 것이 조경 전공자들이 의아해 하는 내용이었다.
광장 바닥에 모니터를 깔아놓았을 때 생기는 문제에 대한 우려가 높았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우며 덮은 유리가 긁히고 낮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 등. 해결은 분류된 직업을 통해서는 나올 수 없었다. 건축가는 컴퓨터 엔지니어가 아니었고 컴퓨터 엔지니어는 유리 제조업자가 아니었다. 유리제조업자는 기계공학자가 아니었고 기계공학자는 그래픽 디자이너가 아니었다. 따로 이야기해서는 해결책을 낼 수 없었다. 모여서 이야기하니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서을시청 앞 광장 공모 당선작 ‘빛의 광장’은 조경작업이냐 건축작업이냐는 갈래로 구분되지 않았다. 건축작업인지 공학작업인지, 미술작업인지로 구분할 수도 없었다.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 했다.
건축과 도시공학, 도시공학과 환경공학, 환경공학과 물리학, 물리학과 천문학, 천문학과 수학, 수학과 논리학, 논리학과 철학, 철학과 역사, 역사와 미술사, 미술과 건축. 과연 이들은 어디서 무슨 기준으로 나눠 놓을 수 있을까.
분류는 대상에 대한 이해의 기본이다. 분류할 수 없다면 이해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분류가 분류대상에 개입하려고 하는 순간 그 분류는 폭력적이 된다. 조류학자가 철새를 어떻게 분류하든 철새들은 종의 유전자가 새겨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날아간다. 철새 중 한 종을 텃새로 분류하여 가둬 기르려 하면 그 순간 분류가 폭력적이 된다. 그물처럼 엮인 세상을 재단하고 분류하면서 우리는 폭력 행사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 넓은 스펙트럼을 우리는 검은 색과 흰색으로 나누려고 하게 된다.
다시 처음 질문을 살펴보자. 사람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백인과 유색인으로 나누던 방식이 폭력적이었다면 고등학생들을 인문계와 자연계로 나눠놓는 것은 덜 폭력적인가. 그 분류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이지 않은가. 요즘 학생들이 고등학교 시절 미적분 공부를 하지 않아 수학능력이 떨어진다는 불만은 오만한 판단은 아닌가.
- <또 한 권의 벽돌 : 건축가 서현의 난독일기>에서 읽고 SALT에서 옮겨오다.
또 한 권의 벽돌 서현 지음/효형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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