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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향기로운 시와 소설

남의 속도 모르면서, 우주를 말할 것인가? 남의 속도 모르면서, 섹스를 논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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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의 글을 구독하고 있다. 그의 책도 보았다. 그와 나와의 관계는 이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글에서 通함을 전달된다. 진정성을 느끼는 몇 안되는 글쟁이다.

<남의 속도 모르면서>라는 단편집에 관한 율려국의 섹스문학상이라는 포스트이다. 도발적인 제목이라 읽어나갔다. 율려와 섹스라 멋진 궁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율려라고 하니 김지하가 떠오른다. 율려와 섹스가 잘 어울리는 이유는 김지하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김지하의 한 마디

율려는 치유다. 우선 병든 인간, 그를 둘러싼 사회적 예절, 그 다음에 정치, 경제적 구조, 지구생태계, 우리를 둘러싼 태양계와 은하계의 여러 이변들의 전체적 변화의 이치를 깨닫고 그 이치의 구조에 합당하게 삶을 치료, 개혁할 수 있는 기본 출발점을 인간 내면에 있는 춤성과 음악성으로부터 찾는 것이다.


이제 한기호의 글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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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젊은 작가8인의 아주 특별한 섹스 판타지’인 『남의 속도 모르면서』에 실린 김종광의 소설 「섹스낙서광 4 - 낙서나라 탐방기 4」를 읽었다. 율려국 최고의 문학상 ‘섹스낙서상’의 종신심사위원들에 대한 설명을 읽다보면 작가가 국내의 여러 문학상에 대해 조롱과 야유가 대단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에서 종신 심사위원이란 제도 자체가 무리다.

스카이대 낙서학과는 비평가 사관학교라 불릴 만큼 젊은 비평가를 무수히 배출했다. 하지만 작가는 배출하지 못했다. “창작은 열등아들이나 하는 쪼잔한 짓거리라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 학과 출신의 비평가들은 다른 이의 작품을 까대는 데는 천재적인 능력과 드높은 열정을 발휘하곤 했다. 하지만 그 학과 출신의 ‘상많이’(65세)가 『섹스기행』이란 작품으로 데뷔하자, 그 학과가 배출한 명석한 비평가들은 일제히 찬사를 퍼부었다.

“교미에 불과했던 섹스를 인간해방으로 승화했답.” “지성과 감성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영롱한 섹스적 문체답.” “ 섹스를 변증법적인 플롯으로 포스트모더니하게 재구성한 실존 판타지답.” “율려국 섹스 문장의 혁명이답.” “1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문학 천재의 등장이답.” “당장 달려가서 섹스 한판 때리면서 문학 대화 나누기를 충동하는 작품이답.”

이렇게 화려하게 등단한 ‘상많이’는 20011년 6월 현재까지 127개의 크고 작은 상을 거머쥐었다. 작가는 “상복을 타고난 작가 상많이”라고 표현했지만 국내의 문학상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낄낄거리고 웃으며 이 소설을 읽었지만 문학상에 대한 특집을 한 번 꾸려야겠다는 생각은 굳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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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가장 멋진 면은 현실에서 말하지 못하는 빗댐이다. 누구와 견주어 말하는 것이다. 절대로 그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읽는 이는 모두 그를 연상한다. 이것이 문학의 참 묘미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50점 이상은 먹고 들어간다. 해학이 없는 드문 세상에 해학이라니. 그 말만으로도 즐겁다.


남의 속도 모르면서
김종광.김도언 외 지음/문학사상사


출판사는 자기 책을 좋게 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우리는 거기서 진위를 가려 읽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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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변

섹스를 주제로 한 테마소설집 《남의 속도 모르면서》가 문학사상에서 출간되었다. <젊은 작가 8인의 아주 특별한 섹스 판타지>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8명의 작가들은 명상과 사유로서 ‘섹스’라는 주제를 가지고 소설을 펼쳐보였다.

주제는 같지만 내용은 판이하다. 김종광의 <섹스낙서상 -낙서나라 탐방기 4>는 우화 소설이다. 율려국 최고의 문학상 ‘섹스낙서상’의 이면과 종신심사위원들의 위악적인 삶에 조롱과 야유를 보내고, 섹스(혹은 낙서나 문학)의 진정성을 묻는 소설이다. 조헌용의 <꼴랑>은 노인 부부의 애틋한 삶 속을 통해 ‘몸과 마음의 소통’이라는 의미에서 섹스를 조망한 정통 소설이다. 전라도 사투리와 남녀 주인공의 위악적 태도가 불러오는 재미가 쏠쏠하다.

김도언의 <의자야, 넌 어디를 만져주면 좋으니>는 유년 시절에 성폭행을 당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양성애자로 살 수밖에 없었던 화가가 결국 더 깊은 상처를 입고 섹스의 상대를 ‘의자’라는 사물에 전이함으로써 현실 속에서 몰락해가는 인물상을 그리고 있다. 김종은의 <흡혈귀>는 평범하고 서민적인 한 인물이 구조조정을 당하는 과정에서 섹스와 청소년 시절에 겪은 기억을 통해 물신주의의 비뚤어진 세태를 ‘흡혈귀’라는 존재를 격퇴함으로써 희망을 찾는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작가 특유의 능청스런 입담이 압권이다.

김태용의 <육체 혹은 다가오는 것은 수학인가>는 형식의 파괴와 실험을 시도한 소설이다. 남녀 간의 섹스를 퍼즐처럼 조각내어 하나씩 하나씩 이미지화하여 형체를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서 섹스에 대한 사유를 웅숭깊게 만들어낸다. 박상의 <모르겠고>는 성악으로 말하면 테너다. 판타지적 성격을 띠면서 주인공 네오가 일본 AV배우 아키를 만나 지중해의 한 섬에서 유성쇼를 보며 섹스에 몰입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는 내용이다.

은승완의 <배롱나무 아래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다 가지고 있다는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도 아닌 배설 기능만 가지고 있는 여성을 사랑한 남자와 그 남자의 상담을 맡은 정신과 의사의 비교된 삶을 통해 섹스와 사랑의 상관관계를 캐묻는 소설이다. 권정현의 <풀코스>는 르포 성향을 띠면서 평범한 삶을 영유하던 주인공이 친구를 만나 인형방, DVD방, 대딸방, 안마방 등 인간의 섹스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퇴폐적인 ‘방’과 관련된 업소에서 일하는 과정, 그리고 가족의 실체를 깨닫는 내용을 담았다.

성이 사람의 영혼보다도 높고 생명보다도 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섹스낙서상 -낙서나라 탐방기 4>(김종광)의 메타적 언어들이 드러내는 풍자를 한번 접해보아야 한다. 삶 자체가 성과 동일시되는 현실을 놓고 <모르겠고>(박상)라는 일종의 허사(虛辭)로 위장해야 할 필요가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꼴랑>(조헌용)은 소비되는 성을 거부한다. 예측할 수 없는 쾌락의 성과 아직도 실현되지 않는 그 에로틱한 잠재성에 대해 <의자야 넌 어디를 만져주면 좋으니>(김도언)라고 묻는 일도 필요하다. 성의 문화사를 그 연원을 찾아 새롭게 적어보고자 하는 글쓰기의 욕망을 놓고 파괴적인 육체를 고심하는 <흡혈귀>(김종은)도 있다. 그런데 <육체 혹은 다가오는 것은 수학인가>(김태용) 라는 질문은 성에 관한 모든 담론의 언어적 해체를 꿈꾼다. 물론 언어의 밑바닥에 육체가 가로놓인다는 사실을 타이포그래피의 물질성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감지하도록 한다. 성이 아름다움인가, 공포인가, 쾌락인가를 묻고자 한다면 <배롱나무 아래에서>(은승완) 서 있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풀코스>(권정현)의 과정을 거친 후에 침묵 여부를 택하는 것이 옳다.

바야흐로 섹스가 범람하는 시대이다. 《남의 속도 모르면서》는 섹스에 대해 젊은 작가 8명이 어떻게 사유하고 명상하고 있는지 훔쳐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준다. 젊은 작가 8인의 아주 특별한 섹스 판타지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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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_
알라딘에 있는 서평 중 흥미로운 것 하나. http://blog.aladin.co.kr/nabijune/4985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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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
그리고 즐겁다.
좋아하는 섹스를 소재로 늑대같은 남자들이 풀어놓는 섹스 이야기.
나도 이런 소재를 던져주면 잘 쓸 수 있다.
-고 생각한다. 사실, 섹스는 실전이다. 아니 그런가? 낄낄.

덧붙임_둘
섹스는 OO다!… 8인 8색 작가들의 발칙·무한한 상상 2011.08.24

어느 술자리에서 소설가 김도언(39)씨는 흥미로운 게임을 제안했다. '끝말 잇기'였는데, 특정 키워드를 정한 뒤 그 키워드와 관련된 단어만 댈 수 있다는 조건을 단 것. '하늘'이라 정하면 하늘을 연상시키는 단어로만 끝말 잇기를 하는 식이다.

게임을 가장 달뜨게 하는 키워드는 무엇이었을까. 단연코 '섹스'였다고 한다. 세상의 기원이자 종말일 수 있으며, 에덴이자 소돔이기도 하며, 억압이자 해방, 혹은 입구이자 출구일 수 있는 그것은 연상의 수레바퀴를 쉼 없이 굴리는 동력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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