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전하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되고, 자신만의 시각과 관점으로 그것을 대해야 한다.”
조조에 대한 이런 새로운 해석에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이 이 책 『삼국지를 읽다』의 저자 여사면이다. 역사학자 여사면은 『고사변』(古史辯)으로 대표되는 의고파(擬古派)의 한 사람으로, 옛것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답습하기를 거부하고 과거의 문헌을 고증해 진실을 찾아내고자 하는 학자 중 하나였다. 그는 『삼국지』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문헌을 바탕으로 새롭게 자기의 견해를 피력했다. 이 『삼국지를 읽다』는 그의 이러한 관점을 요령 있게 잘 담아낸 책이다.
통상 조조에 대한 평가를 언급할 때면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조조는 지략이 많고 원대한 뜻을 가졌으며 때를 보고 행동할 줄 알고 용병에 능하지만, 도덕관념이 부족하고 행위에 구애받지 않으며 군신의 대의를 가벼이 여기는 사람으로 흔히 여겨진다. 그런 그에 대해 여사면은 조조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도겸을 공격한 일이나 원소와의 관도대전에서 이기게 된 까닭, 진궁이 조조를 떠나게 된 원인이었던 여백사 가족 몰살 사건, 유명한 의대조 사건 등에 대해 여러 가지 관련 자료를 인용해 기존에 독자들이 알고 있던 내용이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반박한다. 여사면이 본 조조는 한 왕조에 집착한 충성스러운 신하이자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증거로, 여사면은 조조가 건안 15년 12월에 내린 포고령을 예로 들고 차근차근 짚어 내려간다(「조조를 위한 변명」).
여사면은 『삼국지』를 간결한 어조로 ‘다시’ 읽는다. 후한의 멸망을 불러온 환관과 외척에 대한 정밀한 정의로 시작해, 진 왕조 시기의 사치까지 각종 문헌을 오가며 자신만의 시선으로 한 시대를 훑어 내리는 것이다. 그의 이런 관점은 이후 학자들에게도 전해져 『삼국지』가 재해석될 때마다 인용되곤 했다. 근간에 『삼국지』 다시 읽기 열풍을 불러일으킨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에서도 여사면의 논조는 자주 발견된다. 『삼국지』를 재해석하고자 할 때 피해갈 수 없는 책이라는 점에서, 여사면의 『삼국지를 읽다』는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삼국지』를 읽고 좀 더 깊이 있는 내용을 알고 싶어 하는 독자에게 이 많지 않은 분량의 『삼국지를 읽다』는 『삼국지』 자체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역사를 어떤 식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삼국지를 읽다 |
+
'피로사회 비판''느린 삶''휴식속의 행복'이 요즘 출판의 키워드였다. 그에 대한 일대 반격이다. 강력하다. 뇌과학·진화인류학·행동경제학의 박학다식에다 백악관 경제정책보좌관까지 지낸 경험으로 무장한 저자는 목하 맹활약 중인 '행복전도사들'을 상대로 일당백 기세로 글을 풀어간다. 펜 끝은 이른바 '에덴주의'를 향한다. 그리고 일갈한다. "뜬구름 잡기나 사탕발림으로 사람들을 섣불리 위안하려 들지 마라.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다 낭만적인 허구다. 인류학 연구 성과를 보면 야생은 비참했고 인류는 인정사정없는 지상의 삶과 포식자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분투해야 했다. 자연의 출발점은 가난이었고 경쟁은 삶의 숙명이자 조건이었다. 에덴주의자들은 경쟁이 불평등을 낳았다고 하지만 경쟁 시대 이후에야 생필품 값은 사상 최저로 내려갔다. 평균 수명은 지난 150년 사이 2배 이상 늘었다.
오히려 팽팽한 경쟁과 긴장감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뇌를 보면 분명하다. 사랑, 새로운 지식, 부와 지위, 무엇이든 맹렬히 추구할 때 도파민(쾌락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된다. 인간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뭔가를 성취하려 한다. 아이들을 공중에 띄워보라. 처음엔 떨다가도 짜릿함에 웃는다.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들도 쉴 새 없이 모험에 나선다. 보행기에도 가짜 운전대를 달아주는 이유다.
행복은 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몰입에서 나온다. 영국 연구에 따르면 미용사가 변호사나 회계사보다 만족도가 높다. 신경심리학자 도널드 헵이 학생들 수백명을 상대로 실험했다. 수업 태도가 나쁘면 밖에 나가서 놀아야 하며, 수업 태도가 좋은 학생만 교실에 남아 공부할 수 있다고 했다. 얼마 안가서 다수가 공부하는 쪽을 택했다. 성적도 올랐다. 톰 소여는 담장 페인트칠을 하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친구 벤에게 "이런 행운이 날이면 날마다 오는 줄 알아?"라고 튕긴 후 이렇게 읊조린다. "어른이나 아이나 뭔가 열심히 하게 하려면, 그걸 쉽게 얻을 수 없게 하면 된다구."
저자도 경쟁만능주의는 경계한다. 문제는 삶이 얽혀 있다는 것. 역사상 언제라도 '그만, 이 정도 발전했으면 됐어'라고 할 수 있는 시점은 없다. 그 시점은 누가 정한단 말인가. 또 아직 경쟁의 과실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저자는 말한다. "세상은 계속 회전하고 발전한다. 행복도 그 속에서 찾아야 한다."
따뜻한 위로의 차 한 잔이 아니라,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냉수 한 사발 같은 책.
Rush 러쉬! |
에덴은 어디에도 없다… 태초부터 경쟁이 있었을 뿐
‘경쟁’이 있어야 당신의 심장도 뛴다
행복해지고 싶은가 … 경쟁하라!
+
류짜이푸는 "반란은 정당하다"는 '수호전'의 논리가 폭력을 정당화한다고 비판한다. 양산박의 '호걸'들은 "하늘을 대신해서 도를 행한다"는 기치를 내걸었기에 모든 악행까지 정당하다고 믿었다. 예컨대 주동(朱仝)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가 돌보던 지방관의 네 살배기 아이를 죽여버린다. 어쩔 수 없이 양산박에 가담하도록 내몬 것이다. 송강이 병에 걸리자, 의사 안도전을 데리고 오기 위해 하룻밤에 무고한 사람을 네 명이나 죽이기도 했다.
양산박이 다른 사람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하지 않고, 강제적인 '개조'를 추진했다는 비판은 고전에서 현재의 문제를 포착해내는 류짜이푸의 통찰이 빛나는 대목이다. "송강의 봉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는 줄곧 제3의 공간이 없었다." 타인을 핍박하여 자기들의 생각과 입장, 방식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가장 강조되는 ‘의리’란 가치는 형제 관계 등 소집단에 충실한 사사로운 의리로만 변질되어 보편적인 ‘책임윤리’는 아예 외면받는다고 비판한다. 제갈량의 지혜 역시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는 지혜가 아닌, 권모술수를 일상생활과 인간관계 속으로까지 끌어들인 가짜 지혜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여성은 <수호전>에서처럼 ‘물건’이 되어 권모술수의 도구로 이용당한다.
지은이의 논의를 압축해보면, “<수호전>은 암흑적인 수단(폭력)의 집대성이고, <삼국지>는 권모술수·음모·교활한 심보의 집대성”이다. 두 소설은 공통적으로 ‘집단 바깥에 속한 사람, 여자, 아이 등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것은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라”는 중국의 원형 문화가 변질된 위형 문화라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이 두 소설이 “진정으로 중국인의 마음을 통치해왔다”는 사실에 있다. 중국에서는 마르크스주의마저도 <수호전>의 기본 사상이었던 ‘반역은 어떤 수단을 써도 정당하다’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여러 차례의 정치운동에서 등장한 폭력과 권모술수, 음모도 쌍전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곧 쌍전 자체가 중국 민족의 “집단적인 무의식”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은이는 현재 중국의 문화와 국민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당신들이 이 두 권의 ‘위대한 고전 명저’에 심취해 있을 때,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를 대신하여 <홍루몽>과 <서유기>로부터 중국의 원형 문화를 찾으려는 노력도 기울인다.
쌍전 雙典 |
삼국지·수호전 읽지 마…지옥을 볼터이니
살인 일삼는 '수호전'·기만술 대결 '삼국지'가 중국인 망쳤다
유비는 천하의 사기꾼일뿐
부자들이 왜 더 끊임없이 일할까?
삼국지·수호전, 중국인에겐 지옥의 문
삼국지의 ‘권모술수’와 수호전의 ‘폭력성’을 고발
+
프라이드 치킨은 햄버거와 더불어 미국음식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고 대중적인 음식이다. 그런데 프라이드치킨은 원래 흑인들의 음식이란다. 왜 프라이드치킨이 '소울푸드(미국 남부 흑인들의 전통음식)'가 되었을까.
구운 닭(로스트 치킨)은 백인 요리인데, 튀기면 흑인의 요리가 된다니. 그건 과거에 흑인 노예들이 백인 농장주가 내다버린 닭 날개나 발, 목 등을 먹기 쉽게 튀겨서 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차별받은 식탁 |
프라이드치킨이 흑인만 먹는 음식이었다?
백인이 버린 닭날개, 프라이드 치킨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