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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술 사주는 읽고쓰기

자투리 시간 독서법 효과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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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려고 가방에 항상 책을 넣고 다닌다. 그것도 2권씩이나 들고 다닌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멍한 시간과 무료함을 달래려 책을 읽는다. 혹 읽던 책이 눈에 안 들어오면 다른 책으로 바꾼다. 자투리 시간을 아껴 책을 읽으려 한다. 물론 5분이나 10분 정도의 자투리가 아닐 때가 많다.

장정일은 이런 나의 자투리 시간 활용법을 비웃는다. 하지만 자투리 시간을 합치면 책을 좀 더 많이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이 있었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장정일의 말이 옳다. 책은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저자와의 공감을 이뤄내는 작업이다. 단순히 글자를 읽고 것이 독서가 아니다. 책이 지닌 열정, 저자의 열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못한 독서는 책 읽기가 아니다. "어떤 책을 3일 이상 뭉그적거리면 그 책은 당신 손에서 죽은 거"라 하는데 이 또한 맞는 말이다. 내 손으로 책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나 아니어도 많은 이들이 책을 죽였을 것이고 앞으로도 많은 책이 죽어나갈 것이다. 나까지 죽여서야 하겠는가.

장정일은 늘 책에 대해 나에게 부러움과 시기심을 유발한다. 장정일 자신이야 책을 보며 살아가는 일이 직업인이다. 전업이 아닌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독자는 장정일과 같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저자의 열정과 조우하라.'라는 장정일의 말에 공감하고 뜻을 같이하려 한다. 설령 그것이 쉽지 않다고 하더라도 열정으로 저자의 열정을 받아들여야겠다.

그렇다고 자투리 시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런 열정이 한달음에 책을 읽는 힘을 만들어 준다. 볼테르는 "아무리 유익한 책이라도 그 반은 독자가 만든다"고 했다. 저자의 열정과 나의 열정이 진정한 책을 만든다. 그렇게 만든 책들이 나를 진정한 나로 만들어 줄 것이다.


제딴에는 독서에 대한 좋은 방법을 권해준답시고 '자투리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그 방법은 진정한 독서에 대해 그릇되게 말하는 사람들이다. 예컨대 출퇴근 시간에 버스나 지하철에서 5분씩만 책을 읽어도 한 달이면 웬만한 책 한 권을 읽는다는 '자투리 독서법'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런 열악한 환경은 당신의 멀쩡한 눈을 버릴 뿐이고 당신이 선택한 책이 지닌 고유한 열정을 식혀버린다.
 
내가 보기에 바른 독서란, 이인삼각二人三脚 경기와 같다. 때문에 독자는 저자가 그 책을 쓰기 위해 펜을 내어 달렸던 그 열정의 속도와 같은 속도로 읽어 내려가야 한다. 어떤 저자도 아침에 5분, 저녁에 5분 하는 식으로 책을 쓰진 않았으므로 그런 식의 독서는 이인삼각 경기를 파탄낸다. 똑같은 책을 '자투리 독서'로 한 달이 걸려 읽은 독자와 한달음에 읽어 치운 독자는, 엄밀히 말해 다른 책을 읽은 것이다. 동일한 책이되 두 사람이 받은 임팩트가 틀리는 것이다. 폭풍처럼 읽어야 한다. '나는 그 책을 밤새도록 읽었다'라든가 '나는 이 책을 들자마자 손에 놓지를 못했다'는 경험은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우리 인생은, 특히나 청춘은 그렇게 응축된 몇 개의 경험만을 나열할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어떤 책을 3일 이상 뭉그적거리면 그 책은 당신 손에서 죽은 거라고 봐야 한다. '피로 쓰여진 책은 게으른 독자를 거부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던 니체의 생각에 나는 동감하고 있다.
 
독서란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의 주제를 발견하거나 구성을 파악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런 방식의 독서는 삭막한 신체해부 작업과 다르지 않다. 진정한 독서는 책의 내용과 형식에 구속됨이 없이 곧바로 저자의 열정과 조우하는 것이다. 글쓰기에 있어 1급의 주제와 최상의 형식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다만 저자의 금강석 같은 열정과 대면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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