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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새로 나온 책

2012년 8월 4주 새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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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 원광대 석좌교수는 이른바 '안철수 현상'에 대해 "도무지 인류사에서 유례가 없는 기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20일 공개된 철학 에세이 '사랑하지 말자'에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 대해 "우리 민중의 진실 표출의 상징"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김 교수는 "스펙이 좋다거나, 컴퓨터 백신을 개발해서 무상으로 나누어주었다든가, 또 청춘콘서트에서 말을 잘한다든가 하는 따위의 인기나 진실이 대통령 권좌와 곧바로 연결된다는 것은 도무지 인류사에서 유례가 없는 기현상"이라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그러나 안 원장이 "새 시대의 네트워크 속에서 컴퓨터 백신이라는 뚜렷한 공익사업을 창출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그가 "국민에 의하여 추대된" 인물이라고 분석했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에 대해서는 "오늘의 승자"라는 평가를 내렸다. "지난 총선에서 반드시 이명박의 실정에 대한 심판이 이뤄졌어야" 했지만 심판 시점이 대선으로 미뤄지면서 박 후보가 "이명박 정권의 모든 죄악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는 것. 김 교수는 "박근혜는 이미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으므로 이명박 정권이 저지르는 모든 행위에 대한 책임을 모면할 길이 없다"고 덧붙였다.

'사랑하지 말자'에는 청춘, 역사, 조국, 대선, 사랑, 음식 등을 주제로 김 교수가 청춘 독자에게 전하는 철학 메시지가 문답 풀이 형식으로 담겼다.

사랑하지 말자
도올 김용옥 지음/통나무

안철수 현상은 유례없는 기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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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해변으로 가는 차 속에서 두 딸이 좌파 아빠와 나누는 첫 번째 이야기도 이에 관한 것이다. 나야 프랑스 대혁명에 관한 책에서 이미 읽은 이야기이지만, 프랑스인 앙리 베베르가 딸들에게 들려주는 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아빠 : 200년 전, 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 당시 국민을 대표하는 (…) 제헌 국민의회가 소집됐어. (…) 1789년 8월 28일, 왕권을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법안에 대한 투표가 있었단다. 그 국민회의의 결정에 대해 (당시 루이 16세) 왕이 반대할 수 있는 거부권이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투표였어. 표결하는 순간, 왕정 지지자는 연단의 오른 쪽으로 모였고, 왕정 반대자는 왼쪽으로 모였어. 당시에는 일어서거나 앉는 걸로 표결을 했기 때문에, 같은 표끼리 모이는 게 숫자를 세는데 더 편했고, 그 당시에도 정치인들이 서로 몸싸움을 했기 때문에 같은 편끼리 있는 게 더 안전했지. (…) 이게 좌파, 우파라는 말의 기원이야. 알고 있었니?

"아니요"라는 소리가 두 딸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아빠 : 그러니까, 서로 대립적인 좌와 우의 개념은 프랑스에서 만들어져 전 세계로 퍼진 거란다.

"전 세계라고요? 정말요?" 클레망스(두 딸 중 하나)가 놀라워하더군요.

이 책의 서술방식이 모두 이렇다. 즉 두 딸과의 대화인 만큼 주제에 관해 가볍게 스케치하면서도 핵심적인 이야기를 전달한다. 아무튼, 책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놀란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프랑스의 역사에서 비롯된 좌파, 우파라는 말의 기원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쳐도, 역사와 철학을 잘 가르치기로 유명한 프랑스의 중·고등학생 두 딸이 그것을 모른다고 대답했다는 점이다. 아무튼, 프랑스 아빠의 이야기는 1789년 대혁명에서 시작해서 1848년 혁명으로 이어지고, 다시 오늘날의 좌파와 우파로 이어진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좌파와 우파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을 두 딸에게 설명해 나간다.

언뜻 보기에 두 딸과의 두서없는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 책은 의외로 목차와 내용의 차례와 구성이 잘 짜여 있다. 초급 교육 교재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책의 맨 앞에서 '좌파란 무엇인가'라는 기본적인 용어 정의 문제를 이야기한 저자는, 그 다음에는 좌파가 갖는 인간관과 가치관을 이야기한다. 먼저 그는 좌파적 인간관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바로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가인 장자크 루소의 정신이다.

아빠 : (…)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천성적으로 선하고 창조물 가운데 가장 너그러운 동물이래.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선과 정의 그리고 진실을 열망하는데, 사회가 모든 악의 근원인 사유 재산과 불평등을 만들어서 인간을 망치고 악인으로 변하게 한다는 거지. 정의롭고, 평등하고, 갈등이 없도록 조직된 사회는 인간이 선하고 관대한 본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고, 오늘날 사회에 만연한 이기주의와 탐욕, 권력욕, 지배욕에 종말을 고하게 한다는 거야.

그에 반해 우파는 인간에 대해 비관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어. 대부분의 인간은 본래 악하고 폭력적이라는 거야. 쾌락을 위해 악행을 저지르고 다른 인간을 고문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거지. (…) 그렇기 때문에 우파는 권위에 집착하고 진정으로 선한 사회를 건설하는데 비관적인 태도를 보이는 거란다. (…) 근본적으로 좌파는 인간에 대해 낙관적이고, 우파는 비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

한마디로 말해서, 스스로 진보에 속한다고 말하는 제반 인사와 인물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서 동해 바닷가로 가는 다섯 시간의 운전 도중에 앙리 베베르처럼 사춘기 자녀들에게 '진보는 인간과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진보가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와 목적은 무엇인가', '진보는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바꾸려 하는가', '오늘날 진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명쾌하게 이야기해줄 사람이 있는가?

말하건대, 거의 아니 전혀 없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데, 왜냐하면 한국의 자칭 진보 세력은 지난 30년 동안 이런 기초적인 의문점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고 논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나의 의견에 조금이라도 동의한다면 이 책 <좌파 아빠가 들려주는 좌파 이야기>를 읽으시라. 그리고 이것과 비슷한 한국판 <진보 아빠가 들려주는 진보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준다고 가정한다면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그 목차와 내용을 스스로 구성하고 구상해 보시라. '진보의 재구성'은 이렇듯 '진보적 인간관과 세계관, 가치관의 재구상'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책의 내용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여름휴가와 관련된 이야기 하나. 이 책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유급휴가를 처음으로 도입한 것은 프랑스 최초의 좌파연합 공화국이었던 1937년 인민전선 정부였고, 그 때 처음으로 프랑스 국민 전체가 2주간의 여름 바캉스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 이래 지금까지 60년간의 기간 중에 프랑스인의 여름휴가는 3주(50년대), 4주(60년대), 5주(2000년대)로 늘어났는데, 그 중 단 1회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좌파 정부가 시행한 것이다. 말하자면, "진보 정권이 들어서면 여름휴가가 더 늘어나 더 행복한 시대가 열린다"는 사실을 서민들이 역사적으로 체험한 것이고, 따라서 프랑스인들은 '좌파 집권'이 자신의 일상적 행복과 여가시간 활용 즉 일상적 삶의 변화에 어떤 긍정적 의미를 지니는지를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그에 반해 한국의 진보 좌파는 어렵고 추상적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변화 문제로 들어가면 사실상 (진보적) 자유주의자가 말하는 내용과 별로 구별되지도 않는다. 유급 여름휴가 기간을 대폭 늘리는 것이 진보 좌파의 사고방식 속에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자리잡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좌파 이야기
앙리 베베르 지음, 임명주 옮김/에코리브르

'강남 스타일' 노! 아빠는 '좌파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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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식품이 식품에 내재된 영양소를 파괴한다는 주장은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 우유나 달걀, 곡물, 과일, 채소 등 가공되지 않은 자연식품을 섭취하면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자연식품'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영국의 로버트 매캐리슨은 파키스탄 훈자마을 사례를 들었다. 훈자마을 사람들이 먹는 음식은 곡물, 채소, 과일, 적당량의 우유와 버터가 전부이지만, 맹장염, 대장염, 암 등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질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캐리슨에게 영감을 받은 미국의 로데일은 1950년 건강잡지 '프리벤션'을 창간했다. 지나치게 문명화된 식습관 때문에 생기는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자연식품 섭취를 주로 다뤘다. 대표 사례가 훈자 마을이었다. 당초 주목을 끌지 못했던 로데일의 자연식품 옹호가 이슈로 떠오른 것은 1962년 출간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덕분이었다. 살충제를 비롯한 화학약품의 위험을 경고한 이 책 덕분에 훈자와 자연식품에 대한 관심이 폭증했다. 훈자마을 사람들이 눈병, 갑상선종, 간농양 등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조사보고가 나왔지만, 훈자 열풍은 쉽게 가라않지 않았다. 하지만 1972년 "설탕에 중독된 택시기사에게 치어죽는 경우가 아니라면 100세까지 살 것"이라고 뉴욕타임스와 인터뷰한 로데일은 몇 주 후 심야 TV 토크쇼에 출연했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식품 첨가물과 우유, 요구르트, 마가린, 쇠고기와 콜레스테롤, 식이지방의 유해성을 둘러싼 전문가들의 주장은 끊임없이 뒤집혀왔다. '기적의 식품'이라던 우유는 일급 살인마라는 오명을 뒤집어썼고, 건강한 심장의 보증수표를 자부하던 마가린은 동맥경화 주범으로 지목됐다. 이 때문에 저자는 전문가들이 어떤 식품을 먹는 것이 좋다고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놀랍다고 말한다.

새로운 영양학적 발견이 뉴스로 나오면, 일단 충분히 기다려보라는 게 저자의 충고다. 그리고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쓴 마이클 폴란의 조언을 제시한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먹되 과식하지 말고, 과일과 채소를 많이 섭취하라.'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하비 리벤스테인 지음, 김지향 옮김/지식트리(조선북스)

메치니코프, 요구르트 먹으면 140살 산다더니…
현대인의 ‘먹거리 공포’… 그 뒤에 도사린 음모
먹거리 공포, 알고 보면 ‘꼼수 마케팅’
음식 공포의 미스터리, 그 배후에 숨겨진 꼼수
먹거리가 고민? 괜찮으니 그냥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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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전염된다. 불을 끄기 위해 일렬로 서서 물통을 전달하는 줄을 떠올려 보라. '고통의 먹이사슬'은 이 풍경과 닮은 것 같으면서도 정반대다. 불을 끄는 대신 희생자를 찾아 불태우고 그 또한 다른 희생자를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상처를 받으면 타인에게 그 고통을 전가하려고 든다. 새로운 희생자는 처음의 자극과는 상관없는 무고한 구경꾼이었으나 그도 결국 옆 사람에게 고통을 떠넘기는 행렬에 동참한다. 운전 중에 입이 거칠어진다면, 균일하던 폭탄주의 농도가 돌연 짙어진 적이 있다면 한 번쯤 돌아볼 일이다. 내가 화풀이를 하는 것은 아닌지.

요즘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무차별 칼부림'과 살기(殺氣)도 좌절하고 패배한 자의 눈먼 화풀이일 수 있다. 개코원숭이는 자신에게 해를 끼친 가해자에게 반격할 수 없을 때 약한 대상을 찾아 분풀이한다. 진화생물학자와 정신과 의사가 함께 쓴 이 책은 폭력의 원인을 '고통 떠넘기기'로 설명한다. 그것은 유전자의 명령이기도 하다. 스트레스를 발산하는 개체가 감내하는 개체보다 환경에 적응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고통이란 내부의 조난신호다. 처음에는 매우 주관적이고 한 개체에 머물지만 소용돌이치며 친구, 적, 친족, 낯선 개체 때로는 공동체와 심지어 국가 전체로까지 뻗어나가기도 한다. 고통에는 보복, 복수, 화풀이 등 세 가지 전달 방식이 있다. 보복은 해파리를 건드리면 쏘듯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다. "복수는 식혀서 먹어야 맛있는 음식과 같다"는 시칠리아 속담처럼 복수는 시간을 두고 나타나며 그 강도는 비례적이지 않다. 이 책은 무엇보다 화풀이에 집중한다. A가 B를 아프게 한 뒤에 그에 대한 대응으로 B가 C나 D를 아프게 하는 패턴은 놀라울 정도로 흔하게 발생한다.

오랜 진화의 세월 동안 악을 되갚는 개인과 집단은 오래 살아남았다. 누가 당신의 낙타를 가져갔는데 아무 대응도 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그는 당신의 딸도 데려갈 것이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알 카에다가 남긴 상처에서 비롯됐다. 미국인 대부분은 9·11테러로 입은 상처와 고통을 덜어줄 어떤 폭력적인 조치를 바랐다. 그 사건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누군가를 찾아 고통스럽게 만들어야 했다. 이미 위험하다고 알려진 대상, 쉽게 무찌를 수 있는 대상이면 더 좋았다.

스트레스와 힐링이 넘치는 세상이라서 더 분석적으로 읽히는 책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팔레스타인의 자살 폭탄 테러, 중세 유럽의 흑사병과 반(反)유대주의, 소설 '모비딕'에서 에이해브 선장의 집착 등 화풀이를 넓고 깊게 다루면서 흥미진진하다. 책장이 바삐 넘어간다.

화풀이는 본능이지만 과잉 대응하거나 무고한 사람을 겨냥해서는 안 된다. 고통 전가의 악순환을 끊는 방법은 없을까.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에서 "확 열이 받아도 한숨 돌렸다가 전후 사정을 파악한 뒤에 '이 정도라면 화내도 되겠어' 싶을 때 화를 내기로 했다"고 썼다. 이 책의 저자들은 유대교·기독교·이슬람·불교·심리학·게임이론·경제학자·정신의학 등이 쓰는 방식을 소개하고 나서 고통 최소화의 짧은 원칙 하나를 일러준다.

"어떤 행동이 세상의 고통을 증가시킬지 아니면 감소시킬지를 자신에게 물어볼 것. 그리고 언제나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쪽을 선택할 것."

화풀이 본능
데이비드 바래시 & 주디스 이브 립턴 지음, 고빛샘 옮김/명랑한지성

작은 화가 큰 禍 부른다… 화풀이의 '나비효과'
패배의 고통을 제3자에 전가하는 화풀이의 악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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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범위와 깊이는 거대한 숲을 방불케 한다. 하지만 굵은 줄기만 쳐내면, 그가 근대 정치 질서의 3요소로 꼽은 ①강한 국가 ②법치주의 ③책임정부의 진화에 관한 대서사다. 강한 국가는 권력의 효율적인 집행 능력과 관계가 있다. 반면 법치주의와 책임정부는 각각 권력을 제한하고 견제한다. 3요소는 지역마다 발전 정도나 양상이 달랐다. 이 셋이 삼발이처럼 균형을 잡았을 때 이상적인 근대국가는 달성됐다.

다른 한편, 3요소는 두 묶음으로도 읽힌다. 강한 국가 대 법치주의&책임정부. 전자는 중국 모델, 후자는 서구 모델이다. 결국 권위주의와 민주주의 체제 경쟁의 21세기 버전이다. '역사의 종언'에서 경쟁 구도가 공산주의 대 자유민주주의였다면 지금의 구도는 중국식 국가권위주의 대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재격돌이다. 왜 그런가. 그는 인류 역사의 '맨 처음'으로 인도한다.

근대 정치 사상가들은 국가의 기원을 '자연상태의 인간들' 간의 '사회계약'에서 찾았다. 하지만 현대 생물학과 인류학에 따르면 인간은 처음부터 서로 싸우면서 협력했다. 협력 원리는 두 가지. 한 핏줄끼리 뭉치는 '동족 선택'과 유전적으로 먼 사람과도 도움을 주고받는 '상호적 이타주의'였다. 하지만 씨족과 부족 단위를 넘어 국가를 낳은 주 동력은 피 튀기는 싸움, 전쟁이었다.

그중에서도 근대적 국가가 처음 등장한 곳은 중국이었다. BC 221년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다. 유럽보다 무려 1800년이나 앞섰다. 지방을 나눠 지배하던 봉건국들이 하나의 대제국으로 바뀐 것도 군사적 정복의 결과였다. 일설에 따르면 춘추시대 294년간 작은 나라들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 1211차례였다. 뒤이은 전국시대 254년 동안에는 468차례나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군조직은 물론 관료제, 세제, 기술혁신, 사상의 발달이 만개했다. 관료제도 처음엔 전비 마련을 위한 징세의 필요성에서 나왔다. 하지만 중국은 군주로 대표되는 국가권력이 비대했던 데 반해 이를 견제할 수 있는 법치주의의 전통은 희박했다. 정부의 책임성도 황제의 자제력에 오락가락했다.

반면 서유럽은 국가보다 사회가 먼저 발달했다. 개인주의가 근대국가나 자본주의가 나타나기 전부터 있었고, 국가보다 '법의 지배'가 먼저 자리 잡았다. 뿌리는 기독교였다. 법치주의는 교회가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체계적인 교회법을 마련하던 과정에서 나왔다. 11세기 교황은 황제와 서임권 투쟁을 하면서 독자적인 힘과 조직을 키워갔다. 유럽의 관료기구도 처음엔 교회 조직 정비 과정에서 탄생했다. 교회 조직이야말로 유럽 근대국가의 원형이었다.

통치자가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전통적으로 유교권의 군주는 백성에 대한 무한책임을 교육받았다. 하지만 그만큼 자의적이기도 했다. 군주가 의회를 통해 책임지는 제도적 방식은 유럽, 특히 영국과 덴마크에서 먼저 출현했다. 의회주의는 군주와 사회세력 간 절묘한 힘의 균형이 낳은 산물이었다.

저자는 근대 정치 질서 3요소의 가능성과 한계도 짚는다. 어느 하나라도 균형을 잃으면 위태롭다. 법치주의와 책임정치의 경우 그 자체로는 바람직하다. 하지만 때로는 정부를 발목 잡기도 한다. 국가는 때때로 신속 과감한 결정과 집행이 필요할 때가 있다. 후쿠야마는 말한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너무 쉽게 교착상태에 빠지고 경직되며, 장기적인 정치 경제적 생존을 위해 필요한 '고뇌의 결단'이 봉쇄되고 있다." 경제난 속에도 필요한 개혁을 단행하지 못하는 미국과 유럽을 염두에 둔 진단이다.

그런 면에서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는 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법치주의와 책임성이 결여된 강력한 국가는 그것대로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중국 왕조에서 반복해서 나타난 '나쁜 황제'의 문제다. 강력하고 유능한 황제가 계속 집권한다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지만 무능하고 방만한 군주를 만나면 국가권력은 통제 불능의 재앙이 된다. 후쿠야마는 오늘날 중국도 이 문제는 잠복돼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정치 질서의 기원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함규진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근대국가는 진시황과 교황에서 시작됐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역사는 끝났나
튼실한 정치체제 무너뜨린 건 ‘가산제’였다
미국의 세기 옹호한 정치이론가, 서구 아닌 문명권서 해답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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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고본 분량의 책 한 권을 무려 3년에 걸쳐 읽는다. 천천히, 그리고 깊이 음미하면서, 연관된 내용을 찾아 늘상 ‘옆길로 새기’도 하면서 철저하게 독파해서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독자는 중학생들이다. 혼자가 아니라 200명이 교사 한 명의 지도 아래 국어시간에 교과서 대신 이 소설 한 권만을 3년 내내 읽어 나간다. 1950년부터 일본 고베 사립 ‘나다’학교에서 시작된 이 유례없는 실험적 글읽기의 수혜자들이 전후 일본 주류사회를 이끈 여러 분야의 리더가 됐다.

그들이 읽은 책은 작가 나카 간스케(1885~1965)가 그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준 이모에 대한 애틋한 기억을 중심으로 자신의 소년기를 그려낸 자전적 소설 <은수저>(銀の匙)다. 일본 전통색이 짙은 고전급의 읽기 쉽지 않은 소설이다. 지도교사는 1912년 생으로, 100살을 넘긴 지금도 새 학습 계획을 짜고 있는 하시모토 다케시. 그는 중·고등학교 6년 과정을 교사 한 명이 한 교과목씩 맡아 계속 가르치는 중고등 일관학교 나다에서 이 파격적인 시도를 했고 성공했다. 그냥 읽히기만 한 게 아니라 어려운 낱말 풀이, 관련 정보와 지식을 담은 학습교재를 직접 만들어 나눠주고 학생들이 조별 토론을 하며 어떤 생각이든 자유롭게 발표하고 쓰게 하면서 그들이 수업의 주인이 되게 만들었다.

나다학교 졸업생들은 1962년에 교토대학, 1968년에는 도쿄대학 입시에서 가장 많은 합격자를 내며 고등학교별 전국 최고의 성적을 냈고 그 뒤에도 줄곧 수위 자리를 지켰다. 대입 성적 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는 하시모토의 ‘기적의 교실’ <은수저> 수업은 1984년 그의 은퇴 때까지 5기에 걸쳐 30여년간 이어졌다. 1000여명의 그의 제자들 중 다수가 변호사, 대학교수, 총장, 교사, 국회의원, 대기업 간부로 출세했다.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은 바로 그 제자들이 회고하는 하시모토 및 그의 수업과 그 장점들을 정리한 책이다.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
이토 우지다카 지음, 이수경 옮김/21세기북스(북이십일)

소설 한권으로 3년 수업, 기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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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어려서부터 줄기차게 보고 듣고 외웠던, 대한민국 헌법 제1조다. 중요하다고 해서 외웠지만, 실상 그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왜 대한민국인지, 민주는 무엇이고 공화국은 또 무엇인지, 그 둘을 합한 민주공화국은 어떤 의미인지 일목요연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은 이런 질문에 조목조목 대답하며, 대한민국 민주주의 기원을 추적하는 책이다.

대답의 시작은 흔히 알고 있는 1948년 정부 수립이 아니라 19세기 조선의 고종과 미국 사절단인 ‘보빙사’ 부책임자로 다녀온 홍영식의 대화다. 홍영식의 <복명문답기>는 고종과의 대화를 자세하게 소개하는데, 고종은 대통령의 임기와 행정부 구성, 잦은 정권 교체의 폐단 등을 묻는다. 고종은 홍영식과의 대화에서 “민주제를 하는 나라는 우리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과 보통 사람 사이의 차별이 두드러지지 않겠구나”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짧은 대화 한 토막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기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이미 19세기 말부터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최초의 민주주의자로 동학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을 꼽는다는 점이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개화당 인물들이 첫 번째 민주주의자가 아닐까 싶지만, 지은이는 개화당 인사들을 “군주제나 신분제에 맞서, 모든 사람의 자유와 법 앞에 평등을 실현하는 데 크게 기여한 사상이자 운동”에 매진한 자유주의자로 분류한다. 그렇다면 전봉준을 최초의 민주주의자로 부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1894년 전주성에 입성한 전봉준과 동학군은 백성들에게 못된 일을 일삼던 고을 관리와 양반 부호를 혼내 주고,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잘못된 조세 행정을 고쳤다. 관청의 곡식이나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분풀이식으로 진행되지 않고 농민들이 “회의를 열어 공동의 실천 과제를 선정하고, 대표를 뽑아 질서 있게 행동”했다. “민이 나라의 주인으로, 민이 나랏일의 결정권을 갖는다”는 민주주의의 간결한 정의에 이보다 잘 들어맞는 일은 없다는 게 지은이의 판단이다.

한편 지은이는 1919년 3·1운동으로 “마침내 대한민국이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왕이 빼앗긴 나라를 우리 힘으로 되찾자”며 만세 시위를 벌인 3·1운동은 “다만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데 그치지 않고 나라의 주인이 실제로 바뀌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또한 3·1운동을 전후로 각지에서 무장투쟁을 촉구하는 선언이 터져 나왔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본 틀이 마련되었다. 임시정부의 기초를 닦은 조소앙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임시헌장 1조를 만들며 “인민이나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새로운 나라”를 시작하도록 이끌었다.

민주공화국에 대한 꿈은 식민지 너머를 꿈꾸게 했고, 그렇게 쟁취한 광복은 선거를 통해 민주공화국을 세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민주공화국을 향한 대한민국의 노정이 탄탄대로는 아니었다. 분단과 이념 대립으로 민주공화국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때도 수없이 많았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은 19세기 말부터 정부 수립까지의 역사를 살피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뿌리와 기원을 찾아 고군분투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19세기부터 무르익은 민주공화국을 향한 열망이 결국 1948년 정부 수립으로 이어졌고, 그 열망이 오늘 대한민국을 있게 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민주주의가 퇴보하고 있는 오늘 우리 시대에, 민주주의의 과거를 이야기하며,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야 할 민주주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
김육훈 지음/휴머니스트

19세기 고종, 미국사절단 홍영식에 민주주의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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