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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새로 나온 책

2012년 8월 5주 새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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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고전에 입문하려고 하는 40대들에게 쉽고 즐겁고 편안하게, 마치 대중가수의 콘서트에 초대받아 온 것처럼 인문고전 읽기를 유쾌하게 즐길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 책은 일 년을 계절별로 나누고 계절에 따라 읽어야 할 인문고전 분야를 문학, 철학, 역사, 근현대교양서로 나누었다. 이어 매월 주별로 52주 동안 분류에 맞는 인문고전을 골라 책에 맞는 칼럼을 수록하고, 책과의 연관성을 끌어내 구체적인 고전 활용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 책은 인문독서 입문자들에게 ‘1년 52주, 한 주에 한 권씩 인문학을 만날 수 있는’ 체계적인 독서 방법론을 담고 있다. 매주 하나의 칼럼을 통하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삶의 문제들을 인문학적 프리즘으로 들여다보고, 그 주제에 관련한 인문학 책을 함께 읽어 근원을 파헤치는 인문학적 사고를 키우고 현실을 극복하는 지혜를 얻자는 것이다.

선인들은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을 이성을 닦는 자기수양의 학문으로 중시했고, 시서화는 감성 중심의 자기수양을 닦는 교양의 완성으로 보았다. 즉 문사철은 이성 중심의 지식의 완성이고 시서화는 감성 중심의 교양의 완성으로 삼았던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 또한 문사철을 전공필수로 하고 시서화를 교양필수로 했다. 그래서 벗을 만나면 먼저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교양을 나눈 후, 비로소 전공으로 들어가 문학과 역사, 철학, 정치를 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문사철’은 어떤 의미일까? 문학과 역사, 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문사철’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선시대와는 다른 현대적 버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으로 전 세계가 연결되어 있고, 글로벌화된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는 동양 고전뿐만 아니라 서양을 비롯한 세계적인 고전이 문사철에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경서를 읽기에는 겨울이 좋다. 그 정신이 전일한 까닭이다. 역사서를 읽기에는 여름이 적당하다. 그날이 길기 때문이다. 제자백가를 읽기에는 가을이 꼭 알맞다. 그 운치가 남다른 까닭이다. 문집을 읽자면 봄이 제격이다. 그 기운이 화창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장조(중국 당대 화가)의 제안에 따라 겨울에는 사서삼경과 경전 중심의 동양과 서양의 철학, 봄에는 서양과 동양의 문학작품, 여름에는 역사학, 가을에는 삶의 성찰을 근현대 교양 필독서를 중심으로 하여 읽기가 구성돼 있다.

마흔, 인문학을 만나라
최효찬 지음/행성B잎새

40대가 읽어야 할 인문학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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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자연주의와 인간주의의 관계를 다루어야 할 것 같다. 저자는 "자연의 휴머니즘"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또한 "자연은 인간적 자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마도 근대 민주주의와 인권 체제 아래서 합의된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위협받고 있으며 인간 생존을 위한 생태 환경 조건마저 위험에 빠져 버린 상황의 '비정상성'을 드러내기 위해 인간의 본성을 설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인간 본성은 '자연'으로부터 나온 '자연스러운' 것으로 제시한 후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이러한 '자연스러움'을 어떻게 왜곡하고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려는 의도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연 그 자체가 '인간적'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인간적 자연"은 사람들이 "자연 속의 모든 생명체들과 평등하게 연대하도록 이끄는 소명을 부여"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상 가능하겠지만 이런 정신과 가치는 "인간의 본성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자연의 요청"으로 제시된다. 이런 주장으로부터 저자는 "평등 의식의 선양, 연대 정신의 함양을 지극이 자연스러운 인본주의적 요청으로 이해"하게 된다(37쪽).

지금까지의 주장은 충분히 이해 가능하고 일면 호소력 있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일상적인 담론의 세계에서 인간성에 대한 호소는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지난 30여 년 동안 전개되어온 인간 사회와 자연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논쟁에서 제기된 첨예한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이론적 쟁점을 뭉뚱그려 덮어버리는 경향이 없지 않다.

저자가 인정하듯이 "인간 세계와 생태계 요소 사이에 상호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 어떻게, 어디쯤 방점을 찍을 것인가, 생태 중심주의와 인간 중심주의는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접점은 과연 어디인가, 아니면 그 둘은 오로지 양자택일의 대상일 따름인가 등의 문제를 꾸준히 탐색하는 일이 우리에게 던져진 난해한 인류사적 과업"(61쪽)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난해한 작업에서 제기되는 쟁점들을 논의하기보다는 너무 쉽게 절충적인, 때로는 모호한 결론을 내고 있는 것이다. 자연주의와 인간주의의 경계에서 생겨나는 수많은 문제들을 간과한 채 "자연주의와 인간주의는 동일한 것"(272쪽)이라고 선언할 있겠는가? 저자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자연관을 논의하면서 언급한 테드 벤턴의 지적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포함한 많은 사상가들이 "자연적 조건과 한계에 대해 이론적으로 온전하게 인식하는 것을 소홀히 한 측면이 있다"(96~97쪽)는 비판이 저자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어려움은 소위 프로메테우스주의로 표현되는 극단적인 인간 중심주의, 자연을 단지 인간의 필요 충족을 위한 수단과 대상으로 생각하는 인간 예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자연 그 자체의 독자성과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문제 해결을 가능하게 할 인간의 능동적 역할을 이론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의 독자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게 되면 근본 생태론(deep ecology)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인간 사회가 안고 있는 불평등과 착취 문제를 간과하고 모든 인간을 자연 파괴의 공범으로 몰아가는 보수적 입장으로 치우칠 위험이 크다. 반면에 인간의 독특성만을 고집한다면 생태 위기를 기술적으로 접근하게 되고 경제적 제도나 행정적 개입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로 과소평가하게 되는 위험이 있다.

생태 중심주의는 인간 사회의 위계질서와 억압을 간과한다는 점 때문에 사회 생태론(social ecology)으로부터 공격받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기제를 무시한다는 점 때문에 생태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비판받는다. 또한 생태 중심주의는 생물학적인 환원론에 치우침으로써 가부장적 질서 내에서 여성이 가지는 지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정당화할 위험이 높기 때문에 (사회적) 에코페미니즘으로부터도 공격받는다. 다른 한편 인간 중심주의는 여전히 개발과 성장의 고리로부터 단절하지 못하고 자연이 인간 사회를 한계 짓는 외적 조건임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논란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앞에서 정리한 저자의 논의는 이러한 쟁점들을 모두 우회한 채 자연 자체에 내재한 인간주의와 자연의 요청을 받아들인 인간주의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인간주의와 자연주의 사이에서 제기되어온 논쟁점들을 흐리고 있다. 자연주의적 입장을 지지할 때에는 저자의 강한 인간주의적 경향이 그것을 약화시킨다. 인간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은 자연주의에 대한 호소와 불편하게 동거하게 된다. 결국은 두 가지 입장 사이를 오가면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생태 환경 민주화 운동은 공평한 자원의 배분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 민주주의적 체제를 전제로 한 후에야 자연 생태계를 고려할 수 있는 고차원적 운동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할 있다.

첫째, 생태 위기의 근원은 자본주의의 생산 양식 그 자체에 있다는 생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 욕구조차 충족되지 않고 있는 비서구 국가들에서 이러한 욕구의 충족 방식 자체의 생태적인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분배가 되고 나서, 즉 어느 정도의 삶의 질이 성취되고 나서야 생태 환경 민주화 운동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와 생산 양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 욕구의 충족에서부터 생태 환경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욕구 충족의 위계는 서구 중심주의를 재생산한다. 많은 생태 이론가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듯이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모색하는 사상적 근원은 비서구의 여성과 농민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이들의 의식 수준은 아직 생태 환경 민주화 운동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된다. 이러한 입장이 비서구의 사상적 전통을 강조하는 저자의 입장과 공존할 수 있을까?

결론 부분에서 보이는 저자의 정치 전략은 여전히 근대적인 정치 체제와 운동을 전제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도, 그 비판에 근거한 녹색 사회로의 이행 전략도 충분히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와 관련된 이러한 모호성은 저자가 근대적 정치 원리와 공존하기 어려운 '원시성'에 호소할 때 더욱 심각해진다.

저자는 "현대적 원시인"(39쪽)을 동경하고 있다. 알프스와 같은 장엄하고 거대한 자연이 북돋아주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사회적 적대와 투쟁을 대체하는 것처럼 보인다(157쪽). 정치 체제와 전략의 근대적 성격과는 공존하기 어려운 원시성에 대한 호소와 동경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녹색 사회로의 전환은 '지금, 여기'의 사회적 모순과 갈등, 투쟁, 열망으로부터 윤리적, 도덕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분석하고 이로부터 이행의 전략을 도출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모든 과제를 뒤로 미룬 채 원시성의 현대적 복원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민주주의는 "인간 사회의 범주를 뛰어넘어 전 생태계를 아우르는 총괄적 이념"이 된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친화적 연결고리로 기능할 정신적·실천적 개념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주장의 결론은 "'생태 환경' 민주주의를 모든 생명체 상호 간의 동등권 복원 이념"으로 인식하는 것이다(220~221쪽).

저자는 자연은 "우리 인간을 필연적으로 서로 '연대'하도록 창조했다"고까지 말한다. 인간은 "무한히 유한한 존재로서, 서로 연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자연에 의해 운명지어졌다"는 것이다(223쪽). 빈약한 정치 전략은 앞에서 비판된 인간주의화된 자연주의(자연주의의 규범적 혼동)에 의해, 즉 자연에 내재한(투사된) 아름다움과 숭고한 가치들에 의해 보완되고 있는 것이다.

전 지구적 생태 위기에 직면한 우리에게 "연대는 자연의 의지가 투영된 인간 본성이 지닌 아름다움"이며,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지는 삶을 가꾸어 나가기 위해 극진한 정성과 노력을 아끼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정신적 결의 같은 것"이라는 주장은 무력하다(256쪽). 녹색 운동의 목표를 "헌신적인 상부상조 정신을 뼈대로 하여 사회 구성원 상호 간의 굳건한 평등 및 연대를 촉진함으로써 인간 중심적 사회 환경을 정화"하는 것으로, 그리고 이러한 "인간적 환경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리의 자연에 대한 숭고한 사랑을 진작시키는 과업을 수행"하는 것으로 제시하는 것은 구체적 분석이 결여된 감성적 호소일 뿐이다(256쪽).

자연의 인간, 인간의 자연
박호성 지음/후마니타스

원시인' 타령으로는 자연도 인간도 보호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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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경제학자로 이름난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마르크스 사상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의 대안과 미래를 제시한 신간을 내놨다. 김 교수는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라는 이 책에서 진정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패배하지 않았고 마르크스 이론이 여전히 미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990년대 소련과 동유럽 사회의 붕괴에 대해 서구 자본주의 이론가와는 사뭇 다른 잣대를 들이댄다. 당시 소련이나 동유럽은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였다고 진단한다. ''소련식 자본주의'가 내부의 위기 때문에 '일반적 자본주의'로 성장·전환한 것이 바로 1990년대의 소련 사회의 붕괴'라는 분석이다.

그러면서 실업자 양산, 민주주의 후퇴, 인종 차별, 자연 파괴 등의 문제를 겪는 현재의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지금 인류의 99%가 1%의 특권층에 거대한 도전을 시작하고 있는데, 결국에는 99%가 사람 수와 유권자 수에서 그리고 지적 능력과 투쟁 능력에서 1%의 특권층을 이기는 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인류의 99%가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상태에서 1%가 자기의 특권을 유지하는 방법은 없으며, 이에 따라 자본주의체계는 다른 체제로 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5쪽)

김 교수는 "자본주의 사회가 새로운 사회를 자기의 태내에서 잉태하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본주의 사회 이후의 사회를 전망하는데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이 크게 유용하다고 말한다. 소수의 대자본가에 의한 생산수단 독점이 철폐되고 노동하는 개인에게 생산수단이 돌아가는 '정치 혁명' 등을 거치면 새로운 사회가 열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노동의 소외가 최종적으로 사라질 때, 새로운 사회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자개연)은 자기 발로 서게 되며, 인간과 인간 사이에 대립과 투쟁이 사라지고 인간이 자연과 조화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인간 역사상 처음으로 유적 존재로서의 인류가 인류 자체의 발달을 위해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할 것입니다."(10쪽)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
김수행 지음/한울(한울아카데미)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 (별책)
김수행 지음/한울(한울아카데미)

마르크스를 통해 내다본 현대사회의 미래는
‘자본주의 이후’에 주목한 마르크스 해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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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은 그의 아들들, 형제들에게 그들의 능력과 공훈에 따라 관직과 봉토 등을 하사했으며 이어 그가 딸들의 업적과 공로를 발표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고 기록한 바로 그 대목에서 검열자는 칭기즈칸의 발언을 삭제해버렸다. 검열자는 삭제된 텍스트에 들어 있던 "우리의 여자 후손들을 칭송하기로 하자"라는 단 문장만 남겨놓았다.

신간 '칭기스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는 '몽골비사'의 잘려나간 페이지 속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인 잭 웨더포드 매칼래스터대 인류학과 교수는 몽골 민요, 설화 등 풍부한 자료와 현지답사 등을 토대로 칭기즈칸 딸들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책 내용은 흥미진진하고 놀랍다. 저자는 칭기즈칸이 영토 확장에 매진하는 동안 정복한 영토를 다스리며 제국을 유지한 것은 그의 딸들이었다고 말한다. 칭기즈칸의 네 아들은 "음주에는 비범했지만 전투에는 평범했고" 다른 것들도 모두 신통치가 않았다. 반면 일곱 혹은 여덟 명에 달하는 딸들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딸들 중 네 명은 왕비 자격으로 그들의 나라를 다스렸고, 대규모 군부대를 지휘했다. 그들은 평화기에는 아이들을 키웠지만 필요할 때는 활과 화살 통을 집어들고 전장으로 나가 조국과 가정을 지켰다. 몽골 왕실의 여성들은 말을 잘 탔으며 때로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남자들과 레슬링을 하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고손녀 쿠툴룬 공주의 이야기도 흥미를 자아낸다. 칭기즈칸의 증손자 카이두칸의 딸인 쿠툴룬 공주는 씨름을 잘해 당해낼 남자가 없었으며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토트'의 모델이기도 하다. 웨더포드 교수는 "이 여자들처럼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또 그토록 넓은 영토를 지배한 역사적 인물들은 전무후무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칭기즈칸의 딸들이 없었더라면 몽골 제국은 없었을 것"이라면서 "자신이 정복한 제국의 방비를 아들들에게만 맡겨놓을 수가 없어서 점점 더 딸들에게 의존하게 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여러 세대를 내려오면서 몽골의 연대기 작가들과 학자들은 기록에서 칭기즈칸 딸들의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삭제했고 그녀들은 역사 속에서 차츰 잊혀졌다. 칭기즈칸 딸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울 뿐 아니라 몽골의 역사를 큰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몽골의 장대한 역사를 분석하는 저자의 시야가 넓고 명쾌하다.

몽골 제국의 역사에서 칭기스칸의 여자 후손들이 해낸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우선, 그들은 ‘결혼 동맹’을 통해 제국의 운영에 참여했다. 당시의 결혼 동맹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정략 결혼과 달랐다. 그녀들은 결혼을 통해 남편이 속한 부족의 지배자가 되어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관철시켰다.

한 예로 칭기스칸의 딸 알라카이를 보자. 당시 칭기스칸은 고비 사막 때문에 중국을 정복할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그러나 알라카이가 고비 사막의 남쪽에 있는 옹구드 족에게 시집가 그 지역을 병참기지로 키워내면서 칭기스칸은 중국에 도전할 수 있었다.

이 같은 결혼 동맹의 예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바로 원나라 공주와 고려 왕자들의 결혼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몽골 여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가 고려였다. 몽골 족은 고려를 무지개 뜨는 나라 혹은 사위 나라라고 불렀다.… 몽골 족은 고려 왕실과 통혼을 했고 때때로 고려 왕자가 몽골 궁중에 와서 몽골 족의 언어와 관습을 배우기도 했다. 다른 사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고려는 전통적인 법률, 행정 구조, 조세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칭기스칸 시절의 구레겐(공주의 남편)과는 다르게, 고려의 사위들은 오지의 전장에 파견되지 않았다. … 고려는 제일 마지막으로 사위국이 된 나라였으나 이 지위를 원나라가 멸망한 1368년까지 유지했다.”

저자는 칭기스칸과 그의 딸들이 일궈낸 제국의 탄생기뿐 아니라 아들들에 의해 제국이 쇠락하는 과정도 다루고 있다. 칭기스칸 사후 뒤를 이어 대칸이 된 아들들은 누이들을 숙청하고 그녀들의 영토를 빼앗았다. 하지만 그 공백을 대신해 칭기스칸의 며느리들이 정치 일선에 등장한다. 동맹 관계에 따라 칭기스칸의 가문으로 시집온 그녀들은 주색잡기에 빠진 남편들을 대신해 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밖에도 저자는 칭기스칸의 현신(現身)이라고 불렸던 만두하이 왕비가 15세기에 몽골을 다시 통합하는 이야기도 소개한다. ‘몽골비사’에서 잘려나간 페이지 속 이야기들을 700년 만에 되살려낸 저자의 학문적 노력과 맛깔스러운 문장, 짜임새 있는 구성 등이 돋보이는 책이다.

칭기스 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
잭 웨더포드 지음, 이종인 옮김/책과함께

몽골제국을 유지한 건 칭기즈칸의 딸들이었다
세계를 호령했던 칭기스칸… 그의 딸들이 제국을 지켰다
칭기스칸 딸들 없었으면 몽골 제국도 없었다
몽골 제국을 움직인 것은 칭기스 칸의 딸과 며느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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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이 부족해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바보'에 대한 사전적 정의다. 그런데 이 책은 무리 지어 사는 또 다른 바보들의 세계로 안내한다.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집단으로 뭉치면 본질적으로 어리석어진다는 것이다.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집단 지성이라는 게 거짓말이라니. 이 책은 거꾸로 인간의 특성은 '집단 어리석음'에 있다고 설파한다. 먼저 씁쓸한 농담. 우주에서 만난 두 행성의 대화다. 숨을 헐떡이며 한 행성이 말한다. "난 상태가 아주 안 좋아. 아무래도 호모 사피엔스가 생긴 것 같아!" 다른 행성이 받아친다. "저런, 안됐군. 나도 전에 호모 사피엔스를 앓았지. 하지만 걱정 마. 곧 사라질 거야!"

호모 사피엔스는 없다. 독일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우리가 호모 데멘스(Homo demens), 즉 '광기(狂氣)의 인간'으로 퇴행했다고 말한다. 신(神)과 조국, 명예 같은 가공물을 위해 삶을 희생할 만큼 미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모든 이데올로기를 자신들이 최후를 맞을 때까지 싸워 지켜야 할 만큼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여긴다. 미래의 시각에서는 우리 인간이 그저 네안데르탈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해줄 뿐이다.

이 책은 일회용 소비사회를 들추며 '계획적 진부화'라는 용어를 쓴다. 올이 나가지 않는 질긴 스타킹을 발명한 듀폰사(社)는 즉시 덜 질긴 제품을 개발하도록 지시했고, 전구 업체들은 전구 수명을 2500시간에서 1000시간으로 낮췄다. 휴대폰·복사기·냉장고에도 내장된 계획적 진부화 전략은 집단 어리석음의 결정적 증거다. 혼자라면 누구도 소중한 자원을 단시간 안에 쓰레기 더미로 바꾸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우주의 역사를 1년으로 환산해보면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명확해진다. 우주 대폭발을 1월 1일 0시로 잡으면 9월 초가 돼야 태양과 지구가 생겨난다. 9월 말에 최초의 원시 생명체가 나타나고 12월 20일쯤 육지에 척추동물이 출현한다. 공룡은 12월 28일부터 30일까지 무대를 장악한다. 마침내 12월 31일 자정을 몇 분 남기고서야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다. 우주에서 인간의 역사란 새해를 맞기 전 마지막 몇 초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우주의 하루살이들'은 우주의 중심에 서 있다고 착각한다.

교육이야말로 비교육적인 '바보 만들기 시스템'이라고 저자는 비꼰다. 학생들은 죽은 지식을 삼키고 시험장에서 점수와 교환하기 위해 토해내는 훈련을 할 뿐이다. 마우스 클릭으로 세상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정신적 지체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통렬하면서 유머러스하다.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에서 "우린 울면서 세상에 태어났지. 바보들만 득실거리는 이 거대한 무대에 떠밀려 나온 게 슬퍼서 울지"라고 썼다. 하지만 울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 책은 "어리석음으로부터 탈피하라"고 주문한다. 동화 '벌거숭이 임금님' 속 꼬마처럼 이성의 목소리로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외치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어리석은 종교인, 어리석은 생태학자, 어리석은 경제학자, 어리석은 정치인의 익살극을 끝낼 수 있다. 호모 사피엔스로 돌아갈 수 있다.

어리석은 자에게 권력을 주지 마라
미하엘 슈미트-살로몬 지음, 김현정 옮김/고즈윈

뭉치면 바보가 되는 사람들, 호모 사피엔스
무엇이 호모 사피언스를 호모 데멘스로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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